사람도 그림이 되는 곳, 천국으로 가는 계단 같네

[고흥의 4색 4도①] 박치기왕 김일의 고향, 거금도와 어린 사슴의 비애, 소록도

등록 2019.06.15 19:20수정 2019.06.16 19:01
0
원고료로 응원
고흥이 가까워졌음을 알리는 건 쏜살같이 내달리는 도로 위의 커다란 입간판이다. '지붕 없는 미술관, 고흥'이란 글귀에 묘한 호기심이 발동한다. 남도 중 고흥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고흥에 대한 정보는 우주 시대를 개막하는 우주 발사대가 전부다.

내가 처음 고흥을 찾은 건 장수호 힐링정원(민간정원 제7호)에서 개최된 1000만송이 국화축제 때다. 그때 느낀 점은 소박한 도시였다. 그건 나만의 착각. 그럼, 고흥의 우주 발사대가 들어선 외나로도가 다일까? 여기까지가 다라고 생각한다면 고흥의 진정한 제맛을 못 본 것이다.


고흥엔 빠지지 말고 가야 할 4색 4도가 있다. 박치기왕 김일의 고향인 '거금도'를 필두로, 한센인의 아픔을 간직한 '소록도', 미술 전시관 '연홍도', 고양이의 천국인 민간정원 '애도(쑥섬)'다. 그 이외에도 팔영산, 마복산과 어우러진 다도해국립공원의 비경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고흥으로 넘어가기 전 만남의 광장에서 향이 그윽한 차가운 유자 한 잔을 들이켰다. 바깥 기온이 예사롭지 않다. 따가운 태양 빛을 냉유자로 식혀본다.
  

노을빛 띤 거금대교 서서히 금빛으로 물든 금진 선착장에서 본 거금대교다. ⓒ 최정선

 
박치기왕의 김일의 고향, 거금도

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居金島)는 한반도에서 열 번째 큰 섬이다. 2011년 거금대교가 들어서 현재 육지나 다름없다. 거금도의 빼어난 경관만큼 유명한 건 프로레슬러 김일(1927~2006)의 고향이란 점이다.

5060세대들에게 '박치기왕 김일'은 한국 프로레슬링의 전설적 인물이며 국민 영웅으로 기억된다. 흑백 텔레비전 속 '박치기왕'의 박치기 한 방은 그렇게 통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거금도'란 명칭은 적대봉(해발 592m)의 금맥과 밀접하다. 거억금도(巨億今島)였던 지명에 따라 거금도가 됐다. 현재 금광은 사라졌지만, 낙타 모양이 신비로운 섬이다. 옛 조선시대에는 도양목장(道陽牧場)의 부속 섬이었다. 그 영향으로 한낱 절이도(折爾島)라 불렸지만 이순신 장군의 '절이도 해전'이 펼쳐진 영광스러운 현장이다.


거금도는 소록도를 거쳐야 한다. 고흥에서 소록대교와 거금대교를 지나야 한다. 거금대교는 육지와 섬을 잇는 연륙교라기보다 섬과 섬을 잇는 연도교다. 일주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향하면 우리나라 프로레슬러 1세대를 기념하는 김일기념체육관을 만난다. 

김일은 1929년 거금도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고향 사랑이 각별했다. 프로레슬러가 되기 전에 전국 씨름판을 휩쓸면서 부상으로 받은 쌀을 고향 사람들에게 나눠줄 정도였다. 1960년대 말 국민 영웅으로 떠올라 청와대 초청을 받은 자리에서 고향인 거금도에 전기를 넣기를 청원했다. 덕분에 거금도는 전국의 어느 섬보다 먼저 전기가 들어왔다.

금의 시비공원 전망좋은 곳
  

금의 시비공원 거금도 앞바다의 탁 트인 절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전망 포인트. 이 시원한 언덕 위의 조망 데크가 인상 깊다. ⓒ 최정선

 
오천항에서 가까운 전망대로 금의 시비공원과 소원동산이 있다. 두 곳은 거금도에서 전망 좋은 곳으로 이름 떨치고 있다. 해안일주도로를 따라 산모롱이에 이르자 금의 시비공원이 보인다. 거금도 앞바다의 탁 트인 절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전망 포인트. 이 시원한 언덕 위의 조망 데크가 인상 깊다. 쉼터인 작은 정자도 있다.

시가 새겨진 푯돌이 보이고, 주변에 그림 같은 풍광을 즐기며 산책하기 좋은 나무 데크도 있다. 이곳은 멀리 섬과 섬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을 맞는 일출 장소로도 유명하다. 이곳엔 지역민들의 시가 돌에 새겨져 곳곳에 놓여 있다.

바다 쪽으로 돌출된 발코니 전망대 앞으로 원을 그리며 섰다. 풍경과 어우러져 사람도 그림이 된다. 바닷가까지 거닐 수 있도록 설치된 계단이 꼭 천국으로 가는 계단같다. 이곳 전망대는 고흥의 바다와 문학이 어우러진 문학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이라고 한다.
  
어린 사슴의 비애, 소록도
  

소록도에서 바라본 소록대교 소록대교가 2009년 개통돼 육지나 다름없는 곳이 됐다. 소록도는 일제강점기부터 나병 환자 집단 거주지였다. ⓒ 최정선

 
전남 고흥 소록도(小鹿島)를 찾았다. 소록은 '어린 사슴'을 뜻하는 한자어다. 소록도의 원래 명칭은 녹도(鹿島)다. 유추컨대, 과거 이 섬에 사슴이 많았던가, 사슴을 방목했을 듯하다.

거금도의 징검다리인 소록도는 일제강점기부터 나병 환자 집단 거주지였다. 1916년 유일한 나병 전문병원인 자혜의원(조선총독부령 제7호)이 이곳에 들어선 뒤, 일본은 나병 환자를 이곳에 강제 수용했다.

지금은 소록대교가 2009년 개통돼 섬에서 육지나 다름없는 곳이 됐다. 소록도가 가까워 오자 해안을 따라 푸른 소나무의 숲이 맞아준다. 그 사이로 난 도로는 소록도 입구에서 멈춘다. 이곳에서 한 달에 한 번 한센인의 면회가 이루어졌단다. 행여 바람결에 병이 옮길 새라 그리운 가족의 손 한번 잡아 볼 수도 없는 애환 어린 장소다. 그래서 수탄장(愁嘆場)이라 부른다.

한센병 환자의 삶은 세 번 죽어야 전생의 인연을 끊는다고 한다. 처음은 가족, 친지, 사회로부터의 단절을 뜻하는 사회적 죽음, 두 번째는 피부가 썩어 가며 서서히 죽는 육체적 죽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어서도 묻히지 못하고 해부되는 치욕의 죽음이다.
  

소록도의 검시실 1935년 건립된 검시실(檢屍室, 등록문화재 제66호)을 둘러봤다. 이곳은 해부실로도 사용되었다. ⓒ 최정선

 
검문소를 지나 1935년 건립된 검시실(檢屍室, 등록문화재 제66호)을 둘러봤다. 이곳은 해부실로도 사용되었다. 당시 끔찍했던 현장이지만 지금은 뿌연 먼지와 덩그러니 수술대만 남아 있다. 특별할 것 없는 곳처럼 보인다. 하지만 함께한 고흥군 문화해설사가 들려준 어느 청년의 이야기는 이곳을 다시 보게 했다. 수술대와 검시대, 시체 해부실이 핏빛이 돼 흑백필름처럼 영사됐다.

검시실 옆 감금실(監禁室, 등록문화제 제67호)에서 생을 마감한 불우한 청년, 이동(李東)의 흔적이 있다. 그곳엔 그의 시와 슬픈 사연이 잠들어 있다. 그는 소나무를 옮겨 심지 못한 죄로 결국 수용소 속 감옥에 갇혀 죽게 된다. 그의 애절한 시는 당시 이곳에서 자행된 일제의 만행을 그대로 느끼게 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 6만 명이 넘는 나병 환자가 동원돼 조성된 곳이 중앙공원이다. 공원은 6,000여 평에 만들어진 일본식 정원으로, 아름답지만 강제노역으로 조성된 곳이다. 정원뿐만 아니라 중국의 기술을 전수받은 벽돌공장의 흔적은 그 당시 강제노동의 강도를 어림짐작케 했다. 비단 나라 잃은 서러움은 사람만의 것은 아니었다. 아름드리 소나무마다 난 구멍은 송진을 채취한 흔적으로,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소록도 중앙공원의 구라탑과 두 수녀를 기리는 세마비
  

중앙공원의 구라탑(救癩塔) 공원 중앙에 하얀 탑이 하늘 높이 눈부시게 서 있다. 성 미카엘 대천사가 악마인 한센병을 발로 밟고 박멸하듯 창으로 찌르는 형상이다. ⓒ 최정선

 
공원 중앙에 하얀 탑이 하늘 높이 눈부시게 서 있다. 성 미카엘 대천사가 악마인 한센병을 발로 밟고 창으로 찌르는 형상을 한 구라탑(救癩塔)이다. 그 아래엔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글이 눈에 들어온다. 그 탑의 옆면에는 1963년 근로봉사단이었던 국제 워크 캠프 남녀 대학생 133명의 이름이 나열돼 있다. 현재 이 탑은 소록도의 랜드마크가 됐다.
  

두 수녀를 기리는 세마비 마리안느 스퇴거(Marianne Stoeger·85)와 마가렛 피사렛(Margareth Pissarek·84) 두 수녀를 기리는 탑인 세마비(3M)다. 세마비는 마리아 수녀를 더해 세 명의 M자로 시작하는 수녀를 지칭한다. ⓒ 최정선

 
조금만 걸으면 또 하나의 탑이 있다. 마리안느 스퇴거(Marianne Stoeger·85)와 마가렛 피사렛(Margareth Pissarek·84) 두 수녀를 기리는 탑인 세마비(3M)다. 세마비는 마리아 수녀를 더해 세 명의 M자로 시작하는 수녀를 지칭한다.

한센병은 피부가 두꺼비처럼 갈라져 나병(癩病)이라 불렀다. 달리 업병(業病)이라 했고 속된 말로 '문둥이'라 별칭했다.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도 한센병에 대한 당시의 잘못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소설 초입, 통영의 들머리인 장대 고개에 살았던 문둥이들에 대한 표현이 리얼하다. 그들이 키운 작물은 거대해 크기를 보고 꺼린다는 내용이 나온다. 한센병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오해다.

현대 의학에서 한센병은 더 이상 불치병이 아니라 정복된 지 오래다. 하지만 여전히 부정적 의식이 남아 있다. 이런 오해를 불식시킨 천사가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수녀다. 그들은 1962년 소록도에 나환자를 돌보고자 왔다.

소록도에 거주하는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 탄압은 해방 후에도 '갱생원'이라는 명칭 아래 지속되다 1960년 국립소록도병원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개선된다. 이 시점 해외 선교 일환으로 자원봉사자들이 소록도를 찾았다. 그들 중 오스트리아에서 온 두 수녀는 남달랐다. 맨손과 맨입으로 환자들의 피고름을 짜내는 그들 앞에 환우들은 눈물을 흘렸다.

수많은 환자의 손과 발이던 수녀들은 건강 문제로, 40년 전에 들고 왔던 가방 하나만 들고 모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거룩함을 남기고자 노벨평화상 후보 추천을 위한 활동이 펼쳐지고 있다.
  

소록도 자원봉사회관 이희호 여사는 소록도의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자원봉사회관 건립을 도왔다. 그가 참여한 가운데 2001년 3월 23일 기공식을 가졌고 10월경 완공됐다. ⓒ 최정선

 
소록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저명인사가 한 분 더 있다. 바로 타계하신 이희호(李姬鎬) 여사다. 그는 튀지 않는 내조의 여왕으로 유명하지만 2000년 5월 역대 영부인으로 처음 소록도를 방문했다.

"이제 소록도는 외로움의 땅이 아닌 희망의 땅, 축복의 땅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해 사회적 냉대와 몰이해로 힘들어하는 한센병 환우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소록도의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자원봉사회관 건립을 도왔다. 그 인연으로 이희호 여사가 참여한 가운데 2001년 3월 23일 기공식을 가졌고 10월경 완공됐다.

지금 소록도에 남은 환우들은 500여 명. 아직도 그들에 대한 편견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녹동항을 향해 어린 사슴이 슬피 운다. 나도 이런 편견에 온전히 벗어났는지 다시 되돌아본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생각없이 경주> 저자입니다. 블로그 '3초일상의 나찾기'( https://blog.naver.com/bangel94 )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고흥 #거금도 #소록도 #금의 시비공원 #김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단독] 윤석열 장모 "100억 잔고증명 위조, 또 있다" 법정 증언
  4. 4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5. 5 '휴대폰 통째 저장' 논란... 2시간도 못간 검찰 해명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