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축장 될 뻔한 폐교, 누구나 작가 되는 '마법 학교' 되다

[한국의 혁신가들 ⑥] 책마을해리 이대건 대표

등록 2019.06.17 08:06수정 2019.06.19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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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혁신기업가들을 돕기 위해 만든 글로벌 비영리조직 ‘아쇼카’는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체인지메이커)를 “새로운 아이디어로 기존의 관행과 시스템을 바꾼 사람들”이라고 정의합니다. 우리 사회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변화를 만들기 위한 체인지메이커들의 도전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긍정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사회적 기업과 스타트업, 비영리 단체들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발굴해 소개합니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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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을 해리의 입구 옆 플라타너스 나무 위에 대나무로 만든 오두막이 있다.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만든 또 하나의 작은 도서관이다. ⓒ 이희훈

 
바닷가와 맞닿아 있는 전북 고창 해리면 월봉마을. 마을 한가운데 지난 2001년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연 학교가 서 있다. 학교의 이름도 나성초등학교에서 '책마을해리'로 바꿔 달았다. 

교문 없는 학교의 입구 옆으로 다섯 그루의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버티고 서있다. 그 중 한 그루에는 <톰소여의 모험> 주인공들의 아지트를 떠올리게 하는 '트리하우스'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열리는 건축학교에 참가한 학생들이 손을 보태 만들었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교실로 쓰였던 빨간 벽돌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벽면을 가득 채운 책이 반긴다. 이곳에 있는 책은 무려 17만권. 교실 두 개를 합쳐 만든 '책숲시간의숲'에는 3만여 권의 책이 천장까지 쌓여 있다. 최근 공사를 끝낸 버들눈도서관에는 5만권의 책이 들어간다. 읽고 싶은 책을 가지고 들어가 스스로 갇히는 '책감옥'도 있다. 이곳에 들어가면 책을 다 읽기 전까지는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누구나 책, 누구나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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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을 해리 이대건 대표의 키보다 훨씬 높은 책장에 책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 이희훈

 
책으로 둘러싸인 곳이지만 이곳은 단순히 책만 읽는 도서관이 아니다. 책마을해리의 정체성은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데 있다. 이곳에 오면 누구나 읽고, 경험하고, 쓰고, 펴낸다. 여기서는 누구나 작가가 되는 마법에 빠진다.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 마법학교 같다. 그러고 보니 책마을해리를 만든 이대건 대표도 해리포터를 닮았다. 이 대표는 책마을해리 이름을 지으면서 지역 이름인 해리면과 해리포터에서 해리를 따왔다.   

이곳에서 촌장이라고 불리는 이 대표는 서울에 있는 한 출판사에서 기획편집자로 20년 넘게 몸을 담았다. 책을 읽는 데서 끝나지 않고 책을 만들어 내는 새로운 책마을을 만드는 꿈을 키워 오던 그는 2006년 폐교를 인수해 '마법의 학교'로 재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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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을 해리 ⓒ 이희훈

  "유럽에도 수백 개의 책마을이 있어요. 다양한 책마을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거기는 소비의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책마을해리에도 17만권의 책이 있는데 읽기만 하면 책도 소비재가 돼버려요.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책을 만들어보는 게 우리식의 책마을 만들기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이 대표가 터전을 잡은 고창은 그의 고향이다. 지금 책마을해리가 있는 공간은 그의 증조부가 일제 강점기였던 1936년 마을을 위해 기부해 만든 학교다. 학생수 감소로 2001년 문을 닫은 후 방치되다가 이 대표가 다시 사들였다. 군에서 폐교를 처분할 당시 도축업자들이 학교를 눈독들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와 이 대표가 떠안다시피 서둘러 매입했다. 2000년대 들어 출판계에 전자책에 대한 환상이 퍼지던 시기였다. 

"당시 출판사들이 종이책은 금방 없어질 것처럼 전자책 전환에 사활을 걸었어요. 저는 그럴수록 오히려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가진 공간이 필요하겠다 싶었어요. 오히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종이와 활자가 지식체계의 근본적으로 소비되는 공간, 소비를 넘어서 생산되는 공간, 종이와 활자의 감성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공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도축장 될 뻔한 폐교가 누구나 작가로 변신하는 '마법 학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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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을 해리에는 국민학교 시절 세워진 건물과 동상들이 잘 유지 되어 있다. 동상 주변에는 새로 가꾼 꽃밭이 자리 잡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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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을 해리 ⓒ 이희훈

 
2006년 1월 폐교 매입 잔금을 치른 후 5~6년 동안은 주말에만 이곳으로 와 책마을에 필요한 공간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방치된 폐교는 손볼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이대로 서울을 왔다갔다 하다가는 책마을을 완성 못하고 아스팔트 위에서 인생 끝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2012년 가족들과 함께 고창으로 완전히 이주했다. 

이 대표는 욕심 내지 않고 자신이 구상한 프로그램에 필요한 공간을 하나씩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교실을 수리해 도서관을 열었다. 이후 공간이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책을 펴내기 위한 마을학교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만화학교, 그림책학교, 시인학교, 책영화학교, 고창 지역 초중고 학생들이 참여하는 책학교, 각지의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진로캠프 등 다양한 형태의 책 출판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모든 마을학교 시작 전에는 참가자들이 책 출판 계약서를 쓴다. 계약서를 쓰는 경험이 새로운 자극을 주면서 참가자들이 책임감을 갖고 글쓰기에 몰입하게 된다고 한다.    

월봉마을 할머니들을 위한 마을학교도 있다. 프로그램의 이름은 '밭 매다 딴짓거리'. 평생 논밭일만 해오던 할머니들이 학교에 모여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농사일에는 전문가인 할머니들은 처음엔 연필 쥐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호미 쥐는 근육은 있어도 연필을 쥐는 근육은 없어서"라는 게 이 대표의 설명이다. 

그래도 할머니들은 포기하지 않고 거친 손으로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기록하지 않았으면 없어질 뻔했던 삶이 글과 그림으로 되살아났다. 삐뚤빼뚤한 글씨에 맞춤법도 종종 어긋나는 할머니들의 글에는 일상의 언어가 그대로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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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을 해리에서 지역 주민 등과 함께 펴내고 추천 하는 7권의 책. ⓒ 이희훈

 
"오늘 띠풀이 파느라고 디질 번 해라 파 모중 하니라고 디지는 중 알았는디 다행 디지진 않았다. 나는 일하는디 경화가 와서 이야기 도움 햐줘서 힘든지 모르고 했다"
"마늘 밭에 풀을 맸다. 저녁에 숭어회를 먹었다. 당연히 복분자도 마셨다. 기분이 찢어지다 좋았다."


할머니들이 풀어놓은 이야기들은 <개념어 없이 잘 사는 법>, <밭 매다 딴짓거리>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여 세상에 나왔고 할머니들은 작가이자 시인이 됐다. 최근 전국 각지의 할머니 작가들이 전성시대를 맞았는데 사실 할머니 작가 만들기는 책마을해리에서 처음 시작됐다.

"할머니들 책을 출판하고 전시회를 열고 작가와의 대화 자리를 마련했어요. 할머니 자녀들이 손자 손녀를 데리고 함께 왔는데 모두들 놀라워하더군요. 할머니들은 수십 년 반복돼온 일상을 바꾸기가 쉽지 않은데 그런 가족들의 반응을 보면서 자기 삶을 기록하는 것의 힘을 느끼시는 것 같아요. 글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과거의 세대가 자기 기억보따리에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경험한 거죠." 

천방지축 아이들도 마을학교를 통해 진지한 작가가 된다. 아이들은 이곳에 와서 책을 보고 갯벌에서 놀고, 밥을 지어먹으면서 책 한권을 만든다. 새로운 공간은 생각보다 힘이 있었다.  말이 어떻게 글이 되는가를 보여주면 아이들은 자유롭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저도 처음에는 이해가 안됐어요. 글쓰기를 싫어하는 아이들이 공부를 강요받던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니까 글을 쓰더라고요. 사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벌려준 판이란 게 학년 별로 해야 할 공부, 다녀야할 학원을 정해주는 것밖에 없어요. 어른들이 강요하는 체계를 없애버리니까 아이들이 스스로 몰입하고, 정말 재밌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더라고요."

쇠락해 가던 마을 공동체에 생기를 불어넣은 책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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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을 해리 이대건 대표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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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독서 동호회에서 책마을 해리를 알고 독서모임을 하기 위해 찾아와 나무 그늘 아래서 함께 독서토론을 하고 있다. ⓒ 이희훈

 
책마을해리에는 세 개의 출판사가 있다. 인문학 책을 펴내는 '도서출판 기역', 어린이·청소년 책을 펴내는 '나무늘보', 그림책을 펴내는 '책마을해리'다. 이들 출판사를 통해 지금까지 출판한 책은 90권이 넘는다. 경주지진을 소재로 고창여자고등학교 학생 12명이 함께 기획해서 쓴 <흔들리며 흔들리지 않고>는 2017년 '세종도서'(우수 출판 콘텐츠)로 선정되기도 했다. 

책마을해리는 책이 팔리지 않아 출판사들이 어려움을 겪는 시대에 책을 통해 사람을 불러모으고 마을 공동체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특히 문화적인 불평등을 겪는 지역의 어린이·청소년·노인들은 자신의 삶을 글로 표현할 기회를 누리며 문화 콘텐츠 생산자로 거듭나고 있다. 책마을해리의 활동이 알려지면서 이제는 전국의 지자체와 도서관에서 이곳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찾고 있다. 

"지역이 소멸한다고 하는데 그걸 막을 수 있는 건 이런 공간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인 부는 중앙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데 지역의 언어와 이야기는 중앙이 통제할 수 없어요. 중앙이 통제하지 못하는 것에서 활로를 찾아야한다고 생각해요. 지역의 이야기마저 없어진다면 그거야 말로 지역의 소멸이죠.

또 출판계가 어렵다고 하는데 책을 만들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고급 독자가 된다고 생각해요. 자기 책 한 권을 출판하고 나면 또 하고 싶거든요. 책을 쓰려면 자료를 모아야하는데 책만큼 좋은 통로가 없죠. 그래서 고급 독자가 되는 거예요. 주변에서는 독자가 없는데 저자만 많이 만들어서 뭐하냐고 하기도 하는데 반대에요. 책을 출판함으로써 새로운 독자가 생기는 거죠."


책마을해리를 만든 열정과 노력을 인정받아 이 대표는 지난 4월 우리나라의 12번째 '아쇼카 펠로'로 선정됐다. 아쇼카는 사회혁신기업가들을 돕기 위해 만든 글로벌 비영리조직으로 매년 새로운 아이디어로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낸 이들을 '아쇼카 펠로'로 선정해 지원하고 있다. 

12번째 아쇼카펠로 선정된 고창의 해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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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을 해리 이대건 대표 ⓒ 이희훈

 
아쇼카의 검증 과정은 까다로운데 이 대표도 5년간의 검증 과정을 거쳤다. 아쇼카한국은 이 대표를 주목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보통 지역재생이라고 하면 관광, 일자리 창출 등 경제적 차원의 개발에 그쳤다. 그 과정에서 지역민은 소외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책을 통해 지역공동화 문제를 해결한 것은 책마을해리가 처음이다. 지역주민들이 문화의 생산자가 되도록 접근하는 방식도 놀라웠다."

이 대표에게 아쇼카펠로로 선정되는 과정은 책마을해리를 만든 지난 10여년을 돌아보고 새로운 방향을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

"변방의 사람들이 자기 삶을 기록해 글로 꽃피우고, 그렇게 삶의 흔적을 남기는 데 도움을 준 역할을 해왔는데 아쇼카펠로로 선정되면서 내가 했던 일들이 사회적으로도 가치가 있구나라는 인정을 받은 것 같아 힘이 납니다. 40대에 책마을해리를 만들었고 50대가 되면서 아쇼카펠로가 됐는데 저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책마을해리에도 분기점이 될 것 같아요."

책마을해리의 새로운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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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을 해리 이대건 대표 ⓒ 이희훈

 
이제 책마을해리는 새로운 10년을 준비하고 있다. 먼저 이 대표는 책마을해리의 프로그램을 공교육에 이식하는 작업을 확대해나갈 예정이다. 그 중 하나가 교사들이 참여하는 출판 프로그램이다. 이 대표는 전국 각 지역의 교사들과 몇 차례 출판 기획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책이 교사들을 바꾸는 경험을 했다. 

"작년에 광주에서 교사 출판 모임을 진행했어요. 10개 팀 40명이 참여했는데 9권의 책을 냈어요. 그 중 3권은 반응이 좋아 2쇄를 내기도 했죠. 출판 이후 선생님들의 삶이 바뀌더라고요. 책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본 경험의 힘이죠. 교사가 바뀌면 교실이 바뀌고 학교가 바뀌고 아이들이 바뀌고 지역사회가 바뀝니다."

책마을해리에서 해왔던 프로그램을 좀 더 체계화해서 읽고 쓰고 책을 만드는 활동에 초점을 둔 대안학교 운영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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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을 해리 이대건 대표 ⓒ 이희훈

 
"'노인 한 명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어요. 한 사람 안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책이 있다는 이야기죠. 젊은 세대가 문화 생산자로서 한 권의 책을 펴내는 것은 세계의 중심이 돼 보는 경험이에요. 혼자서는 어렵지만 여럿이 함께하면 할 수 있어요. 이런 경험이 있으면 앞으로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하든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다른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요. 이런 새로운 세대를 만들어 내는 게 책마을해리의 가장 큰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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