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엄마는 이기적' 과도한 자책이 낳은 결과

[엄마의 이름을 찾아서] 한 여성의 미래에 투자한다는 것

등록 2019.06.19 13:54수정 2019.06.1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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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엄마가 된 여성들은 자신의 이름보다 아이의 이름으로 불리는 데 더 익숙해집니다. 엄마는 자신의 고유한 이름으로 살아갈 수 없는 걸까요? '나다운' 엄마, 이름을 지키는 엄마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봅니다.[편집자말]

2008년 방송된 KBS <인간극장> '성보의 미소'편의 장면들 ⓒ KBS


(* 이전기사: 김소영 아나운서도 피해갈 수 없는 이것)

나를 깨어나게 한 다큐멘터리 속 아이의 이름은 '성보'였다. 성보는 혼자서 호흡을 할 수 없는 희귀 난치병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다. 보조호흡장치에 의존해 숨을 쉬기 때문에 성보의 곁에는 호흡장치를 관리해 줄 누군가가 24시간 붙어 있어야 했다. 이런 역할을 자처한 건 성보의 엄마였다. 성보가 태어난 후부터 성보의 엄마는 한순간도 성보 곁을 떠나지 않았고, 밤에도 10번 이상 깨어나 성보를 돌봤다. 그런데 이 엄마는 웃고 있었다.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성보의 미소>였지만, 내 머릿속엔 이 엄마의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아픈 아기의 곁을 24시간 지키는 것. 아마도 내가 엄마가 아니었다면, 엄마니까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가 되어 보니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엄마라고 해도, 다른 모든 욕구를 내려놓은 채 아이에게 온전히 헌신하는 일은 쉽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특별한 질병이 없는 아이와 24시간 붙어서 생활하는 것도 숨이 막힐 지경인데, 저 엄마는 어떻게 웃을 수 있을까. 저 웃음 뒤의 아픔은 얼마나 클까. 나는 이런 엄마들이 웃을 수 있는 심리적 기제가 무척 궁금해졌다. 나아가 이를 활용해 자기 자신의 삶을 살 수 없는 엄마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심리학도였음을 그제야 떠올렸다. 복학을 해 이런 것들을 연구해보고 싶었다. 갑자기 정신이 맑게 깨어나는 듯했다.   

엄마, 다시 공부를 시작하다

문제는 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어떻게 아이를 돌보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늘나라에 계신 친정어머니를 호출할 수도, 다른 지역에 사시는 시어머니께 부탁을 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학교에 가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만 아이를 맡기면 됐기에 어린이집은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고민 끝에 집에서 아이를 돌봐주시는 '이모님'들을 섭외해 보았다. 하지만 유난히 예민한 기질을 타고난 아이는 낯선 이의 호의를 받아주는 법이 없었다. 나름 '베테랑'이라고 소문난 이모님들도 일주일을 못 버티고 그만두곤 하셨다.


그 무렵 산후도우미로 신생아인 아이와 나를 돌봐주셨던 이모님이 우리를 보기 위해 방문하신 일이 있었다. 아이는 신기하게도 이분에게는 낯가림을 하지 않았다. 신생아 시절 맡았던 이모님의 냄새를 기억하는 듯했다. 이모님은 우리 부부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셨고, 일주일에 두 번 내가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동안 아이를 봐주시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출산 1년 후인 2009년 9월. 복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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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출산 1년 후인 2009년 9월. 복학을 했다. ⓒ unsplash

 
다시 시작한 공부는 정말 재미있었다. 수업 시간 자체를 즐겼고, 심지어 예전엔 그토록 긴장했던 발표 수업도 힘들이지 않고 해냈다. '아이도 키우고 있는데 이까짓 공부쯤이야.'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물론, 공부할 시간은 늘 부족했고, 육아와 대학원 공부를 병행하는 게 체력적으로 버겁긴 했다. 

엄마가 되기 전에는 수업을 듣고 학교 도서관에서 편안하게 공부했지만, 이제는 수업이 끝나는 대로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와 이모님과 바통터치를 해야 했다. 나는 아이가 자는 동안 공부할 내용들을 메모해 눈에 잘 보이게 집 안 여기저기 붙여 두었다. 아이를 돌보면서 수시로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공부를 했다.

아이와 외출할 때도 작은 메모지에 공부할 것들을 적어 유모차 뒤에 붙이고 나갔다. 몸은 늘 피곤했지만, 아이에게만 집중하며 나 자신을 완전히 잃은 채 우울해했던 때보다는 훨씬 행복했다.  

'이기적인 엄마'라는 걱정

하지만, 이런 행복감 속에서도 마음 한 구석엔 늘 묵직한 불편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심리학자이자 여성학자인 캐럴 길리건이 말한 '이기적인 여자'라는 걱정이었다.

길리건은 남성의 심리적 발달과정을 마치 모든 인간의 것인 양 받아 들여왔던 심리학계에서 여성의 심리적 발달도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 학자다. 특히, 정의와 합리성을 도덕성 발달의 기준으로 내세우는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 이론'에 반기를 들며 관계성과 보살핌도 도덕성의 기준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모든 존재가 함께 실천해야 하는 보편 윤리인 '보살핌'이 남성과 여성, 정의와 보살핌으로 이분화는 가부장제 아래에서 여성의 자기희생으로 잘못 이해돼 왔다고 지적했다. 길리건은 타인을 위해 '자기희생'을 하는 것이 착한 여자라는 가부장적 편견 때문에 여성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할 때 늘 '이기적'이라는 걱정에 시달리게 됐다고 이야기한다.

당시 나의 상태가 딱 이랬다. 엄마가 아이를 맡기면서까지 공부하는 건 너무 '이기적'인 게 아닐까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충분한 보살핌을 제공하지 못해 남편과 아이가 불편한 건 아닌가 걱정하며 미안해했다.

나는 학비까지 남편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엄마가 되기 전에는 조교 생활을 하며 학비를 해결했지만, 엄마가 된 후에는 수업을 마친 후 바로 아이에게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학비를 버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 자신이 정말 '이기적'인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이런 마음은 공부와 육아를 병행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과도하게 남편을 챙기고, 시댁에 잘하려고 애쓰는 '착한 아내' '착한 며느리' 증후군으로 나타났다. 나는 스스로를 압박하고 있었다.

한 여성의 미래에 투자하는 것
 

다시 시작한 공부는 우울했던 내게 활력이 되어 주었다. ⓒ pixabay


대학원을 졸업한 뒤 상담 현장에서 일하면서 나는 이런 갈등이 나만의 경험이 아님을 깨달았다. 내가 만난 많은 '엄마' 내담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시작하기를 망설였다.

"나 때문에 식구들이 불편해지면 어쩌죠?"
"제가 너무 이기적인 건 아닐까요?"


이런 질문들은 육아와 일 사이에 갈등하는 내담자들의 단골 질문이었다. 길리건의 말은 정말 사실이었다.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에게 부여된 돌봄과 희생의 가치는 여성들의 내면에 이토록 깊이 새겨져 불필요한 심리적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얼마 전 읽은 <아내 가뭄>의 저자 애너벨 크랩은 호주의 가부장 문화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주장을 펼쳤다.
 
미래를 위해 빚을 내 주택을 구입하고, 주식에도 투자하면서 왜 아내의 미래에는 투자하지 않는가. 육아와 일의 갈림길에서 여성이 커리어를 포기하는 건, 미래에 들어올 수입을 포기하는 것이며, 일을 함으로써 얻게 될 인간관계와 한 사람의 성장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의 육아 때문에 아내가 꿈을 포기하는 것은 가정 경제에도 손해가 아닌가.

10년 전 '이기심의 망령'에 시달렸던 내게, 같은 고민을 했던 많은 내담자들에게 꼭 필요한 말이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나는 식구들에게 미안해하면서도 학업을 이어갔다. <성보의 미소>를 보면서 다짐했던 대로 소아암 환아 엄마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을 웃게 하는 심리적 기제에 대해 연구했다. 연구 결과, 엄마들 스스로 찾아낸 삶의 의미가 아이가 난치병에 걸린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 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이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생각할 수도 없는 논문 주제였다. 내가 엄마였기에 이 엄마들의 마음에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 논문은 꽤 좋은 평가를 받았고, 나는 처음으로 엄마로서의 나와 심리학도로서의 내가 통합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결혼 후 분열된 나의 자아는 공부를 하면서 조금씩 통합되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에도 실립니다.
#모성 #엄마 #일 #육아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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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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