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이름은 조센삐였다', 그 영화는 지금도 창피해"

[딸이 묻고 엄마의 삶이 답하다⑥] 일본이 사과하는 그날을 위해

등록 2019.06.19 20:13수정 2019.06.1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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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써 주세요. 실록, 보도자료, 연구 자료 등의 형태로 정리해봐야 대중에게 알리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더 널리 알릴 수 있도록 꼭 써 주세요." 

1970년대 후반 일제사 발굴을 위해 헌신했던 고 임종국 선생(1929~1989)의 <정신대 실록>을 읽고 위안부의 진실에 분노한 엄마 윤정모 작가가 천안 자택으로 찾아갔을 때 한 첫마디다.
 

임종국 선생과 작가 윤정모위안부에 대해서 알려야해 ⓒ 윤솔지

 
"임종국 선생이 쓴 <친일문학론>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 선생님의 연구 방법은 철저한 자료조사를 통한 실증적 고찰이었거든. 책을 본 후 그동안 내가 존경하던 혹은 인정했던 문학인들의 구체적 친일파 행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어. 그런데 <정신대 실록>을 통해 위안부 참상까지 알게 되면서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지. 동물의 살을 으깨듯 피와 죽은 살이 난무한 그 내용을 생각하며 1982년에 <에미이름은 조센삐였다>라는 소설을 썼어. 지금도 용어에 대한 논의가 많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인 위안부를 조센삐라고 불렀어. '조센'은 한국, '삐'는 창녀를 뜻하는 prostitute에서 P의 일본식 발음이야."
 

에미이름은 조센삐였다위안부참상을 최초로 알리다 ⓒ 윤솔지

 
엄마 윤정모 작가의 <에미이름은 조센삐였다>는 위안부의 참상을 알린 첫 소설이 되었다. 대중에게는 유인물처럼 진실을 알리는 글이 되었다. 심지어 영화로도 제작돼 천만 관객이 들었지만, 엄마는 실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표현해내지 못한 영화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소설에 쓰인 것처럼 위안부들의 짓밟힌 인권에 관한 내용은 거의 없었어. 노출과 성적인 표현에 중심을 두었기에 영화를 차마 볼 수 없었어. 지금도 창피해. 20만 명이 당했다고 생각해봐. 아직도 나는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살이 녹아내리는 것 같아. 전쟁에서 패배하고 철수하면서까지 위안부를 섹스특공대라고 칭하고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위안부 한 명당 적게는 50명, 많게는 100여 명까지 일본군을 대하게 했어. 그러다 사망하면 짐짝처럼 위안부들을 길에 버리고 갔지.

위안부들이 반항이라도 하면 상상할 수 없는 고문으로 죽는 모습을 동료들에게 본보기로 보여주고, 임신하고 출산이 임박할 때까지도 일본군의 상대가 되어야 했다는 기록들. 어떻게 그걸 덮고 넘어갈 수 있니? 이런 비인간적인 행태들을 알리려 평생 헌신한 임종국 선생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야." 


임종국 선생은 1945년 해방되던 해 열일곱 살 소년이었다. 퇴각하던 일본군들이 우물가에서 물을 마시며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하는 모습에 선생은 '다신 제국주의의 굴욕적인 식민지가 되면 안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이후 선생은 일본이 일본제국관보에 남기고 간 자료가 보관되고 있던 정부 도서관을 찾아냈다. 소실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 개월간 자취하며 징병, 학병, 위안부 등 남은 것들을 기록으로 정리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친일파 개개인의 친일행적은 물론 그 집안의 친일내력까지 줄줄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 심지어 당신의 아버지가 친일파였던 것도 숨기지 않고 공개했다.

엄마 윤정모는 우리나라의 부역자들을 처벌하지 못한 역사, 힘과 권력이 친일파에 몰려있는 현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임종국 선생은 '그들이 저렇게 건재한 것은 우선 우리나라 내부에 이유가 있어요. 국민 대다수가 실상을 잊거나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급선무는 모든 사실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친일사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야만 두 번 다시 누군가에게 역사를 왜곡할 수 있는 틈새조차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고 답했다고 한다.
  

일본과 호주에 강연을 다녔다엄마 윤정모 ⓒ 윤솔지

   
<에미이름은 조센삐였다>는 영어, 독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돼 전 세계에 알려졌고 엄마는 일본과 호주 등에 초청되어 강연을 하기도했다. 

"호주에서는 '피해국에서 소설로 나온 것은 처음'이라며 초청을 했어. 멜버른, 시드니, 모나쉬 대학에서 강연을 했지. 연달아 다니는 일정에 피로도가 심해 한 번은 강연 전 밖에 앉아서 깜빡 졸고 있는데 뒤통수에 서늘한 바람이 스쳐 가더라고. 그때 '아. 이거는 할머니들의 일이다. 할머니들이 일깨우는 거다. 나는 할머니들을 위해 온 거다'라는 생각에 곧장 강단에 들어갔어."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에 대해 세계 최초로 증언했다. 할머니의 용기에 더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설립자인 이효재 선생은 UN 연설을 통해 참혹한 위안부 상황을 알렸다. 2005년에 윤미향씨가 정대협 상임대표가 되면서 전 세계 피해자, 활동가들과 연대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진실규명과 사과를 요구하는 물결이 넘쳤다.

"앞으로는 절대로 역사를 왜곡하고 짓밟는 일이 일어나선 안돼. 식민지 당시 소위 배웠다는 지식인들의 합세가 한몫했어. 우리가 이완용을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로만 알고 있지. 그 사람이 얼마나 배운 사람인지는 이야기하지 않잖아. 그런 것이 더 견제해야 할 점이야. 힘과 지식을 가졌으면서 욕심과 탐욕, 개인의 이익만 있는 놈들, 그들을 우리가 막을 수 있을까? 난 그런 사람들이 정말 무섭다고 생각해. 그런 주도면밀함으로 한순간에 나라를 팔아먹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직도 우리는 사과 받지 못했다. 구 주한일본대사관 앞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도 1392차를 앞두고 있고 생존 할머니는 이제 스물한 분 남았다. 한 분씩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모진 세상만 사시게 하다 보내드리는 것 같아 죄책감이 쌓여만 간다. 과연 한 분이라도 살아계실 때 우리는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일본이라는 나라는 쉽게 사과할 나라가 아니야. 우리나라 법정에서 '불법'이라고 물어내라고 해서 지킬 놈들이겠니? 그 나라 보수의 잔인한 풍토를 봤을 때 사과할 인간들이 못돼. '한 분이라도 살아계실 때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에 대해 회의적이기는 해. 하지만 그날은 꼭 올 거야. 우리가 기억하니까. 우리의 몫이니까." 

임종국 선생은 1929년 경남 창녕태생으로 1960년대 사화집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저술로는 <친일문학론>(1966)과 <흘러간 성좌>(1966)가 있다. <친일문학론>에서는 일제 치하의 우리나라 작가·시인·비평가들 중에서 친일 작품을 발표하였던 인물들과 그 작품을 비판했으며 이를 시작으로 다른 분야의 친일파에까지 연구를 확장하였다.

1988년 <일본군의 조선침략사>를 내놓은 이후 임종을 불과 8개월 앞둔 1989년 3월에 1994년 완간 계획으로 친일파총서 10권 중 <총론> <사상침략과 친일파> <정치침략과 친일파> <해방 이후 친일파> 등 4권의 집필을 준비한다. 그러나 지병으로 1989년 11월 12일 향년 60세로 타계한다.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윤정모 지음,
당대,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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