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도 한곡 해봐" 김뻑국의 인생 바꾼 이후락과의 술자리

[종로의 기록, 우리동네 예술가] 김뻑국 재담가 인터뷰 ①

등록 2019.06.22 12:20수정 2019.07.07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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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중심인 종로는 수많은 예술인들이 600여 년 동안 문화의 역사를 일궈온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종로의 기록, 우리동네 예술가'는 종로에서 나고 자라며 예술을 펼쳐왔거나, 종로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이 시대의 예술인들을 인터뷰합니다.[편집자말]

재담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뻑국 선생 ⓒ 종로문화재단

 
격동의 시대, 재담은 민중들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호사였다. 풍자와 해학이 응축된 이야깃거리에 신명나는 노랫가락을 더한 재담의 재미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 중심에는 소리와 춤을 모두 섭렵한 종합예술인, 김뻑국이 있었다.

그의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길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눈앞에 팔도강산이 펼쳐진다. 지역별 문화와 특산물을 쉴 새 없이 청산유수로 읊어내는 덕분이다. 60년 넘도록,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며 관객들을 웃고 울려온 그는 마치 전성기 시절로 돌아간 듯 자신의 인생사를 유쾌한 재담으로 풀어냈다. 인터뷰는 지난 4월 17일에 진행됐다.


"재담은 코미디의 시초... 뿌리를 잊어선 안 돼"

"지금 우리가 하는 재담은 대한제국 시절, '가무별감'이라는 직책을 받고 고종황제에게 궁중연희를 올렸던 박춘재씨가 만든 것들 토대로 한 거예요. 팔도강산 전부가 재담 속에 다 녹아 있잖아요.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끝없이 이어지니 매일 같이 불러서 들어도 얼마나 재밌었겠습니까? 지금 인기를 끌고 있는 코미디와 만담의 역사를 되짚어 올라가다보면, 재담이 그 시초였어요. 결코 뿌리를 잊어선 안 되죠."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원폭투하를 목격한 이후 가족과 함께 고향인 충남 보령으로 돌아왔지만, 한국어가 서툴렀던 탓에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놀림 받기 일쑤였다. 서러운 마음에 집을 나와 무작정 올라탄 기차에서 내려보니 서울역이었다. 갈 곳 없이 떠돌다 전차를 타고 동대문역에서 내린 그는 운명처럼 국악인 이충선을 만나게 된다.

"덩그러니 혼자 떨고 있으니 딱해 보였던 모양이야. '밥 안 먹었지?' 하고 묻는데 순간 꾀가 발동하더라고. 손짓발짓 해가면서 말 못하는 시늉을 했지. 그랬더니 자기 따라 오면 일도 할 수 있고, 밥도 굶지 않을 거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간 곳이 뚝섬 근방의 해장국집이에요. 거기 할머니가 큰 뚝배기에 인절미를 넣은 해장국을 주는데 맛이 기가 막혔어요. 맛있는 걸 먹다 보니까 고향에서 밥 굶고 있을 부모님이 생각나서 눈물이 절로 나더라고. 거기서 물 길어주고 심부름도 해주면서 1년 8개월을 있었어."

피리 명인으로 유명했던 이충선씨를 따라다니면서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지만, 굿판과 연희마당을 구경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그러다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용인으로 피란한 그는 빈집의 광을 뒤져 남아 있는 곡식들로 굶주린 배를 채우며 연명했다.


홀로 방황하다 1953년 상경한 그는 탑골공원에서 국악인 최경명씨를 만나 장구와 피리를 배웠고, 인천과 강화 등지를 떠돌면서 약장수 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배뱅이굿으로 유명한 이은관씨의 공연을 보고 감동한 그는 이씨와 동고동락하며 본격적으로 재담의 세계에 눈뜬다.

"당시 민요를 잘 부르는 여자 소리꾼들은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많았지만, 남자들은 활약할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먹고 살려면 재담을 해야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이은관 선생을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배운 거예요."

'조선의 마지막 무동(舞童)'으로 불린 명무 고 김천홍 선생에게 탈춤을 사사한 것도 그때문이었다. 1960년대 초에는 KBS 탤런트 겸 성우로 뽑혀 약 2년간 연기자 활동을 하기도 했다. 김뻑국이란 예명은 그 당시, 뻐꾸기 소리를 잘 흉내 낸다고 얻은 이름이다. 본명인 김진환보다 더 널리 알려지며 활약했지만, 무대를 그리워했던 그는 다시금 재담가의 삶으로 돌아가게 된다.

인생을 바꾼 결정적 계기
 

여전히 녹슬지 않은 재담 실력을 선보이는 김뻑국 선생 ⓒ 종로문화재단


재담가로서 유명세를 얻게 된 데에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의 만남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직후, 이후락 부장이 북한에서 무사 귀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연 파티에 이은관씨와 함께 초대받아 가면서 그의 인생도 달라졌다. 김지미, 서수남, 하청일 등 유명 연예인 20여 명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이 부장은 술을 한 잔씩 돌리며 각자 노래 한 곡씩을 부르게 했다. 엄숙하기 짝이 없는 자리에서 그는 호기롭게 노래를 불러 좌중을 폭소케 했다.

"인기가 없어서 뒤쪽에 앉아 있었는데 이 부장이 '너도 여기 왔으면 한 마디 해야지!' 하고 노래를 시키더라고. 악단이 있기를 해, 마이크가 있길 해. 평소 하던 대로 '네가 먼저 살자고 옆구리 쿡쿡 찔렀지. 내가 먼저 살자고 계약서에 도장 찍었나' 하고 민요를 불렀지. 이 부장이 그걸 듣고 손뼉을 치더니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는 거야. 가고 싶어도 며칠 신은 양말 냄새가 지독해서 차마 못 가겠노라 이야길 했더니 그분이 '그게 구수한 냄새 아니야? 그런 양말 신으니까 재밌는 소리가 나오지! 이리로 와서 노래 한 곡 더 해봐!' 하시더라고.

그때 번쩍 든 생각이 그분이 일본 갔다 온 직후니까 거기 맞춰서 '봄이 왔네. 봄이 왔어. 이 강산 삼천리 통일이 왔네!' 그랬다고요. 그랬더니 그분이 '너 같은 사람 세 명만 있었으면, 내가 통일을 시켰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북한 갈 때 데려갈 걸 그랬네!' 라고 하시더라고. 자리가 파하고 돌아가는 길에 얼마 받을지 적으라고 하는데 영문도 모르고 옆 사람이 백만 원이라고 쓰는 걸 보고 똑같이 따라 적었지."


당시 백만 원은 집 한 채를 장만할 수 있을 정도로 큰돈이었다. 그는 그 돈으로 비싼 양복 한 벌과 구두 한 켤레를 한 뒤, 남은 돈을 몽땅 털어서 1975년 '김뻑국 예술단'을 창단한다. 갑작스럽게 들어온 목돈에 욕심이 생겼을 법도 하지만, 돈을 바라보는 관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내가 이 생활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돈은 그날 쓰는 돈만 내 돈이라는 거예요. 저장해 놓은 돈은 다른 사람이 채가게 되어 있어요. 재산 많이 남기면 또 자식들끼리 싸움 나고 그러잖아. 그래서 돈은 예술단에 다 넣은 거예요. 난 살면서 유명한 분들도 만나봤고, 이런저런 무대에 서면서 공연도 실컷 했고, 영화까지 찍어봤으니 여한이 없죠. 나는 돈이 필요 없더라고."

오로지 입 하나로 
 

노태우 전대통령과 함께한 사진. 맨 우측 김뻑국 선생 ⓒ 종로문화재단

   

김종필 전국무총리와 악수하는 김뻑국 선생 ⓒ 종로문화재단


재담가로서 서서히 인기를 얻게 되면서 그를 찾는 무대도 늘어갔다. 무엇보다 지역의 특색과 문화를 재치 있게 풀어내는 그의 말솜씨에 관객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재담은 그야말로 원맨쇼거든요. 지역마다 천차만별인 요리와 술, 전설들을 끼워 넣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관객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재담 공연을 보고선 푹 빠져서는 '단장님, 무대 한 번만 세워 주세요!' 라고 찾아오는 이들도 참 많았죠."

수많은 무대에 섰지만, 그가 유독 잊지 못하는 것은 육영수 여사의 초대를 받고 소록도에서 공연을 했던 순간이다.

"새벽 4시에 비밀리에 차로 데리러 왔더라고요. 마땅히 입을 옷도 없어서 급하게 옷 한 벌을 빌려 입었죠. '쾌지나 칭칭나네'를 부른 김상국, '노란 샤스 입은 사나이'의 한명숙, 그리고 가수 배성희씨까지 총 네 명이 갔어요. 정식 극장도 아니고, 식당 안에 있는 조그만 공간이었는데 80명 정도 되는 나병환자들이 모여 있더라고요. 다른 분들은 10분 정도 노래를 부르고 끝났는데, 저는 재담으로 30분을 꽉 채웠어요. 환자들이 많이 웃으면서 기뻐해서 무대에 선 저도 보람이 있었죠.

공연 끝나고 나서는 육 여사가 환자 한 명, 한 명과 악수를 하기에 저희도 따라 했어요.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육 여사가 소원이 뭐냐고 묻기에 노인잔치를 많이 열어 주십사 부탁했죠. 그거 좋은 생각이다 하시더라고요. 그 뒤로 공연 기회가 많이 생겼죠. '가신 뒤에 후회 말고 살아생전 효도하자'라는 문구를 넣어 제작한 포스터를 헬기를 동원해서 뿌려주고 그랬어요. 그 덕분인지 어디서 공연을 하더라도 용케들 잘 알고 찾아왔죠."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살아생전 효도하자'는 표어로 제작된 공연 포스터 ⓒ 종로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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