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자, 엄마 기다리는 집에 가자"
세월호 아이들 끌어안은 잠수사의 죽음

6월 17일은 김관홍 3주기... '김관홍법’ 아직도 국회 문턱 못넘어

등록 2019.06.17 15:57수정 2019.06.1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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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관홍 잠수사의 생전 모습 ⓒ 오마이뉴스 이희훈


"집에 가자, 집에 가자, 엄마가 기다리는 집으로 가자."

아이들의 엉킨 팔을 하나하나 풀며 이야기한다. 힘들었을 아이들을 다독거리며 한 명 한 명 그렇게 아이들을 온 몸으로 끌어안고 물 밖으로 나왔다.

바다 속은 정말 깜깜했다. 한 치 앞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아이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가족들을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다.

세월호 수색작업에 참여했던 김관홍 잠수사와 많은 민간 잠수사의 이야기다. 6월 17일은 김관홍 잠수사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되는 날이다. 그는 자택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결국 숨을 거두었다. 사망원인은 급성 심근경색이었다.

김관홍 잠수사는 서울 은평 토박이로 숭실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학교 다닐 때는 운동을 좋아했다. 유난히 힘이 세고 폐활량이 좋던 그가 찾은 직업은 잠수사였다. 1996년부터 오래된 교각의 안정성을 점검하고 수리하는 일, 유물 발굴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을 찾아내는 일까지 다양한 일을 했다.

생업 포기하고 참사현장으로 달려간 김관홍 잠수사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던 때 그는 산업 잠수사로 지금까지 해온 공부와 노력을 바탕으로 큰 공사 계약을 앞두고 수중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계속 전화는 오는데 저는 애가 셋이고 작업은 맡아놨고 제가 데리고 있는 잠수사들도 먹여 살려야 되고요."

무조건 참사 현장으로 달려갈 수도, 그렇다고 모른 체 할 수도 없었다. TV화면을 통해 나오는 사고수습 현장 장면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구조작업을 지켜보던 김관홍 잠수사는 결국 모든 일을 뒤로 한 채, 세월호 참사 현장으로 달려간다. 갈등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동료들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간 것이다.

참사 현장에 도착한 건 4월 23일이었다.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잠수사 500여명이 투입됐다던 당국의 발표와 달리 20여명의 민간 잠수사들이 밤낮없이 실종자 수색작업을 벌였다.

"무작정 간다고 해서 다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고 팀을 짜서 들어가야 하고 스테이지가 있는 세팅된 바지선도 필요하고요. 심해 작업을 하는 산업 다이버는 일반 레포츠 다이버들과는 달라요. 희생자를 구조하려는 마음은 알지만 산업 다이버가 아니면 심해에서 구조 작업을 하기 어렵죠."

민간 잠수사들은 해양경찰을 대신해 수심 30~40미터 아래에 있는 세월호 선체에 진입했다. 좁고 구불구불한 통로를 지나다니기 위해 산소통을 포기하고 가느다란 공기호스에 의지하는 표면 공급식 잠수방식을 택했다.

배가 쓰러진 상태에서는 헬멧과 렁(잠수용 압축공기탱크)을 멘 해군이나 해경은 선내 진입을 할 수 없었기에 민간 잠수사들이 경로를 확보하면서 이동라인을 설치했다. 제대로 된 세월호 설계도조차 없는 상태였다.

목숨 걸고 뛰어든 구조작업, 하지만 남은 건 극심한 트라우마
 

김관홍 잠수사가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다. ⓒ 김관홍 추모연대

캄캄한 바다 속에 가라앉은 세월호에서 잠수사들은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을 생생하게 만나야 했다. 그리고 한 구, 한 구 온 몸으로 감싸안고 가족들 품으로 돌려보냈다.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도망갈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애타게 기다리는 가족들의 고통을 알기 때문이었다.

세월호가 침몰한 맹골수도는 물살이 매우 거세서 물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 한정돼 있지만 민간 잠수사들은 유가족들의 고통이 어떨지 알기에 무리한 일인 줄 알면서도 계속 작업을 진행했다. 하루 한 번이라는 심해 잠수규정도 어긴 채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4월 30일에는 김관홍 잠수사도 위험한 사고를 겪었다. 작업을 하러 물속에 들어갔다 물살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떠내려갔다.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챔버에 들어가 감압을 하다가 쓰러져 호흡이 끊어진 상태가 되었다. 다행히 병원으로 이송된 후 6시간 동안 감압 치료를 받고 살아났다. 잠수병으로 생사의 기로에 섰던 김관홍 잠수사는 병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흘 만에 참사 현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2014년 7월 10일, 김관홍 잠수사는 그 날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민간 잠수사들이 태풍을 피해 돌아온 날, 해경은 문자 한 통으로 민간 잠수사에게 철수를 통보했다. 80여 일을 수십 미터 바다 속을 헤매며 실종자들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냈는데 이제 와서 민간 잠수사들의 방식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경은 떠나는 민간 잠수사에게 치료와 보상을 약속했지만 결국 보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희생자를 수습했지만 그 과정에서 얻게 된 트라우마와 육체적 고통은 고스란히 민간 잠수사들의 몫이 되었다. 김관홍 잠수사가 트라우마가 심할 때는 '아디다스 츄리닝'을 입은 고등학생을 보면 길에서 주저앉을 정도였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학생들이 그 옷을 많이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민간 잠수사들이 세월호 수습과정에서 여러 부상과 질병을 얻었고 그의 선배였던 공우영씨는 동료 잠수사 사망 사고에 대해 가장 나이가 많아 실질적 리더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기소까지 됐다. 청와대 대변인과 해경의 고위직 간부들은 이 민간 잠수사들이 마치 거액의 보상을 받은 것처럼 왜곡하면서 모욕하는 일까지 있었다.

"어떤 재난에도 국민을 부르지 마십시오, 정부가 알아서 하셔야 합니다"
 

김관홍 잠수사의 생전 인터뷰. ⓒ 김어준의 파파이스.


김관홍 잠수사는 2015년 9월 15일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참가해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한다.

"저희 법적인 논리 몰라요. 돈을 벌려고 간 현장이 아니었습니다. 돈을 벌려고 간 현장이었으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한 번 밖에 들어가면 안 되는 그 수심에서 많게는 네 번, 다섯 번……

법리 논리 모릅니다. 제발 상식과 통념에서 판단하셔야죠. 법리 논리? 저희가 간 게, 양심적으로 간 게 죄입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타인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재난에도 국민을 부르지 마십시오. 정부가 알아서 하셔야 합니다. 이상입니다."


양심을 따라 행동한 민간 잠수사에게 남겨진 고통은 많은 치료비와 생활고로 이어졌다. 김관홍 잠수사도 본업인 잠수사 일을 그만두고 낮에는 아내의 꽃가게 일을,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며 생계활동을 이어나가는 한편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지속적인 치료와 관리가 필요한 상태였지만 국가는 치료비 지원을 끊었고 망가진 몸으로는 잠수사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약이 없으면 잠을 못 자고, 화 조절이 안 되니까 그러다가 7월달경에 지금 현재 유가족분들을 만났어요. 만나 가지고 '고맙다'고, '고생했고, 고맙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저 정신과 치료제를 끊었어요. 그 한 마디에."

2015년 12월 16일, 4·16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1차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참가한 김관홍 잠수사의 말이다. 잠수사이기 이전에 한 명의 국민이었고 그래서 사고 현장으로 달려간 그에게 우리사회는 무엇을 해야 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장면이다.

"저는 잠수사이기 전에 국민입니다. 국민이기 때문에 달려간 거고, 제 직업이. 제가 가진 기술이 그 현장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간 것일 뿐이지, 국가 국민이기 때문이기 간 거지 애국자나 영웅은 아녜요. 저희가 왜 마지막에, 저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11구가 남아있을 당시에 왜 나와야 했는지, 왜 저희가 그런 식으로 쫓겨나야 했는지, 우리는 포기 못했는데 그들은 왜 저희가 나가야만 했는지 저는 그걸 묻고 싶고요. 가족분들한테 저희는 구조 업무를 한 것이 아닙니다. 좀더 빨리 찾아서 한 구라도 더 찾아드리려고 했을 뿐이고...

고위 공무원들한테 묻겠습니다. 저희는 그 당시 생각이 다 나요. 잊을 수 없고 뼈에 사무치는데, 사회 지도층이신 고위 공무원께서는 왜 모르고 왜 기억이 안 나는지, 저보다 훌륭하신 분들이 자리에 계시는데 저희는 일명 '노가다'예요. 그런 사람보다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천불 같은데… 가족분들하고 저희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단순한 거예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 진실은 다를 수 있지만 상황은 정확히 얘기를 해야죠. 욕을 먹더라도….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김관홍 잠수사는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 활동하며 박주민 의원실과 협력하여 세월호 잠수사들을 지원하는 법안을 만들고 있었다. 법안이 완성되어 국회법제실에 넘어온 날이 2016년 6월 17일이다. 법안 명칭은 '4·16세월호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으로 약칭 김관홍 법으로 불린다. 하지만 아직도 이 법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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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관홍법' 처리를 위해 국회 온 동료 잠수사세월호 참사 당시 바다에 뛰어들었던 고 김관홍 민간잠수사의 동료 황병주씨(오른쪽)가 지난 2018년 8월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를 방문해 박주민 의원(왼쪽)이 마련한 세월호참사 피해지원특별법 개정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그가 "국회는 '고 김관홍법' 의결을 더 이상 미루지 말라"는 손팻말을 들고 섰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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