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2개 파일 '현미경 검증'... 지금까지 이런 재판은 없었다

[사법농단-양승태 검증기일] 원칙과 효율 사이... 임종헌 USB 파일-출력물 일일이 따져가며 진행

등록 2019.06.18 09:28수정 2019.06.18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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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의 모습. ⓒ 이희훈

 
검찰과 변호인이 형사소송법 조문을 세세히 다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 재판에서 또 하나의 진풍경이 펼쳐졌다.

14일 오후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5부(부장판사 박남천)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USB 관련 검증기일을 따로 진행했다. 검찰은 지난해 7월 임 전 차장 사무실 압수수색에서 확보한 USB 속 법원행정처 문건을 출력해 재판부에 증거로 신청했다. 검증기일은 USB 파일 1142개 전체와 그 출력물의 동일성·무결성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였다.

모든 증거는 '진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특히 디지털 증거는 편집이 쉽기 때문에 압수과정에서 문제가 없는지, 그 증거를 법원에 출력해 제출하면서 훼손되지 않았는지가 중요하다. 대법원은 2007년 '일심회'사건과 2013년 '왕재산'사건에서 압수물인 디지털 저장매체로부터 출력한 문건을 증거로 사용하려면 원본과 출력물이 동일해야 하고(동일성), 출력과정에서 내용이나 형태가 바뀌지 않아야 한다(무결성)는 원칙을 선언했다.

재판부는 이에 따라 임 전 차장 USB 파일 1142개의 검증에 나섰다. 이 파일들은 양승태 대법원이 어떻게 사법행정권을 남용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자료로, 디지털 증거로 쓸 수 있는지를 두고 임 전 차장 재판 때부터 법정공방이 끊이질 않았다. 압수수색절차가 적법한지 뿐 아니라 USB 파일과 출력물의 동일성, 무결성을 따지는 절차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공방에 또 공방... 더욱 엄격히 '원칙' 따졌더니

문제는 속도였다. 이 재판은 양 전 대법원장 구속 4개월 만에야 첫 공판이 열릴 정도로 지지부진했고, 여전히 그렇다. 원칙대로 디지털 증거 검증을 하려고 해도 워낙 파일 수가 많은 터라 재판은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재판부는 검찰과 변호인의 동의를 얻어 '효율'을 택했다. 12일 오후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대법관, 고영한 전 대법관 쪽에서 꼽은 30개 파일과 그 출력물을 대표로 동일성과 무결성을 확인하는 검증기일을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날 오전 박병대 전 대법관의 변호인이 일부 문건을 USB 파일에서 찾을 수 없다며 검증대상 문제를 제기했고, 검찰과 변호인이 다시 팽팽하게 맞섰다. 결국 계획한 증거조사를 시작조차 못 하자 박남천 부장판사는 "오늘(12일) 검증을 한다고 해도 재판 진행이 (원점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며 1142개 파일 전체를 확인하겠다고 정리했다.

그렇게 열린 14일 검증기일은 USB 파일을 화면에 띄운 뒤 출력물과 일일이 대조하는 방식으로 열렸다. 오후 2시 20분부터 시작한 재판은 네 차례 휴정 후 오후 9시 23분에 끝났지만, 검찰이 준비한 1142개 파일의 10%수준만 검증할 수 있었다. 원본 파일과 달리 쪽 번호가 25번부터 시작하거나 출력물에 적힌 날짜가 다른 경우가 몇 차례 나오긴 했지만, 대체로 파일과 출력물의 내용과 형태에 차이가 없었다.

결국 늘어진 '속도'... 변호인의 또 다른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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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구속 125일만에 첫 재판사법행정권 남용, 재판 개입 등 '사법농단' 피고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된지 125일만인 5월 29일 오전 첫 재판을 받기 위해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도착하고 있다. ⓒ 권우성

 
철저히 '원칙대로' 하는 검증이었지만 역시 속도가 문제였다. 꼼꼼한 절차를 주장해온 피고인 쪽에게도 다소 힘든 상황이었다. 결국 고영한 전 대법관의 변호인이 "USB 파일 자체를 확인하면 이런 절차를 계속 갈 필요는 없다"며 검찰에 파일 제공이 가능한지 물었다.

하지만 검찰은 "파일 자체에 개인정보가 있고 파일 형태라 유포될 수 있어서 다른 사건에서도 출력물로만 제공한다"고 답했다. 또 "편의를 위해서 변호인께서 저희 사무실에서 보고 간 적도 있다"며 "(검찰청에서 파일을) 보고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다가 다시 문제 삼기도 했다"고 말했다. 피고인 쪽에서 절차마다 꼼꼼하게 이의를 제기했으니 꼼꼼하게 할 것 다 하겠다는 뜻이었다.

검찰이 물러서지 않자 변호인들은 또 다시 '심리 속도를 늦춰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이들은 6월 28일부터 시작하기로 한 증인신문 기일을 7월 5일로 미루고, 추가로 검증기일을 진행하자고 했다. 세 피고인 없이 변호인들만 참석해서 6월 17~21일 사이에 검증을 마무리하는 방법도 제안했다.

박남천 부장판사는 "하루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진행해왔는데 피고인들의 여러 가지 주장이 나오면서 검증 범위가 늘어났다"고 입을 뗐다. 이어 "변호인들은 피고인이 참석하지 않는 상황에서 하면 안 되겠냐는데 그건 절차가 중간에 바뀌는 것이라 바람직하지 않다"며 "피고인 모두 참석하는 상태에서, 한 기일을 잡아서 더 여유 있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했다. 재판부는 18일 오전 10시부터 '현미경 검증'을 이어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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