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잘 안 될 때는..." 영자 언니의 '고퀄' 조언

[30대에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

등록 2019.06.22 19:28수정 2019.07.06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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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대에 접어드니 지나온 시간이 이제야 제대로 보입니다. 서른과 마흔 사이에서 방황하던 삼십 대의 나에게 들려주고픈, 지나갔지만 늦진 않은 후회입니다.[편집자말]
"'괜찮다'는 참 좋은 위로지만, 현실 속에서 제 스스로 괜찮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말 같아요."

이번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부문에 초청된 영화 <다행이네요>의 김송미 감독의 말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30대 영상 제작 감독으로 산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단박에 느껴지는 말이었다.


절벽 같은 현실에서 "괜찮아"라는 위로는 너무 무책임하게 들린다는 뜻이었으리라. '이 사회에서 낙오자가 된 것 아닐까?' 그렇게 자존감이 바닥이 친 상황에서 찍게 된 영화가 바로 <다행이네요>였다.
 

김송미 감독의 다큐 '다행이네요' ⓒ 김송미

 
이 영화는 괜찮지 않은 청년들이 괜찮아지기 위해서 프로젝트 마을인 '괜찮아마을'에서 6주 동안 지내는 모습을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인생의 큰 고비에서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청년들이 대안 마을에서 나름의 길을 찾는 모습을 촬영하며, 김 감독은 어떻게 해야 괜찮아질 수 있는지 함께 답을 찾았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그들이 찾아낸 답은 '말'이었다. 내 스스로를 인정해야 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의 인정도 필요하다는 것. 그 두 가지가 잘 맞물려야 사람은 건강하게 작동된다는 것을 배웠다는 김 감독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결국 괜찮아진다는 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인정 속에서 자신의 가치에 납득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가는 것. 설사 그 길이 세상이 말하는 번듯한 탄탄대로가 아니어도 말이다.

길을 찾기 위해 모였다가 더 중요한 것,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다시 돌아온 현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고 해서 삶이 마법처럼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는다.

다만 이제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다큐 감독이라는 이상과 영상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 사이에서 김 감독은 주눅 들지 않고 무게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다 가는 길, 혹은 크고 화려한 길이 아닌, 일상의 작은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잃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괜찮다"라는 말이 싫을지 몰라도 그녀는 꽤 괜찮아 보였다.

30대에 행복이라 생각했던 것들

6월 중순, 외부에서 청탁을 받아 김 감독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30대에는 열심히 일해서 인정받으면 그게 행복인 줄 알았다. 또 남들이 사는 만큼, 사는 대로 사는 게 안전한 줄 알았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서 목표도 달성하고 승진도 했다. 하지만 삶에 늘 그런 순간만 있는 건 아니다. 목표를 달성해도 기쁨은 그때뿐, 이내 이걸 하려고 그렇게 애쓰며 살았나 싶어서 공허해졌다.

열심히 살다가 강제로 브레이크가 걸려 백수가 되거나 연애도 결혼도 생각대로 안 풀릴 때에는 더 최악이었다. 그런 처지를 견뎌낼 마음의 힘이 없었다. 목표 달성이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살았으니 그 목표에 배신당하고 굴러 떨어질 때면 나를 사랑할 어떤 이유도 찾지 못했던 것이다.

명함이 없으면 초라했고, 이력서를 냈는데 아무 데에서 연락이 오지 않으면 나 자신이 쓸모가 폐기된 존재로 전락한 것 같았다. 통장의 잔고가 '0'을 향해 갈 때는 내 자존감도 곤궁해졌다. 작은 말 한 마디에도 상처받고, 풀어내지 못한 상처는 늘 두 가지 나쁜 방향으로 향했다. 무리해서 더 열심히 하거나, 무기력해지거나.

나를 못 마땅해하고, 내 스스로 납득할 만한 수준이 되도록 늘 다그쳤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가. 안 되면 안 된다고 미워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돌아보면, 30대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야단치고 싶다. 너는 왜 너의 가치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고 업신여겼느냐고.

영화를 찍고 나서 김 감독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했다. 가장 큰 외적 변화라면 자신만의 작업실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저 스스로 괜찮아야 누군가에게도 괜찮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조금이라도 생기지 않을까요. 아무리 존경스러운 삶이라 하더라도 너무 힘들게 살면 공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이렇게 살아도 잘 먹고 잘 산답니다' 해야 제가 갖고 있는 가치가 더 오래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업실 벽 군데군데 붙어 있는 메모에 그녀의 싱그러운 결기가 가득했다. 자신과 자신의 삶을 사랑하기 시작한 30대 초반의 그녀는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생각했다.

'아, 나도 30대 때 이걸 알았다면, 좋았을 걸.'

내게 주어진 일상을 쓸고 닦기
 

개그우먼 이영자씨. 타인이 내뱉은 말에 상처받을 때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순간들을 차곡차곡 모아갔다고 한다. 예를 들면 작은 화분을 가꾸는 일들이었다. ⓒ KBS

 
나 스스로 괜찮아지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어려운 것도 아닌데 못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 경우에는 짐으로 가득 찬 다용도실과 방을 정리해서 작업할 수 있는 책상 공간을 만드는 일이 그렇다. 막상 해보면 반나절도 안 걸릴 일인데 말이다. 또 몇 년 전 독립할 때 친구한테 선물받은 고급 식기 세트를 그만 애지중지하고 사용하는 것도 포함된다.

올해 들어서 내 자신을 위해 적어도 하루에 한 끼는 제철 음식으로 정성스럽게 먹자고 결심했는데,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늘 대충 때우자는 유혹에 넘어갈 때가 많다. 결심이 시들시들해던 차에 며칠 전 이 그릇을 발견하고는 한숨이 나왔다.

'난 이 좋은 걸 왜 나를 위해 쓰지 않고 모셔두고 있는 걸까.'

좋은 거니까 손님 오면 대접한다고 고이 모셔둔 것인데, 사실 손님이 집에 오는 일은 많지 않고 밥을 먹는 경우는 더더구나 적다. 그런데도 아까워서 못 쓰다 보니 잊어버리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한 끼를 정성스럽게 해 먹는 건 못하더라도 있는 반찬을 좋은 그릇에 보기 좋게 담아 먹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닌데 말이다.

또 18년 전,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들어올 때부터 쪽방만큼 작은 내 방과 베란다를 터서 넓게 만들자는 말이 나왔는데 난 곧 이 집을 떠날 거라는 생각에 유보했다. 중간에 나가서 산 3년을 제외하고는 난 여전히 쪽방 같은 방에서 감당할 수 없는 짐들을 이고지고 아무렇게나 살고 있다.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 때문에 좋은 것을 미루며 산 것이다.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고 대접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삶에는 '대충'이나 '아무렇게나'가 많다. 과연 나만 이럴까. 주변에는 육아를 하면서 아이보다 자신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친구들이 꽤 있다.

가족 부양의 책임감 때문에 자기 꿈을 다 포기하고 일에 자신을 갈아 넣으며 살아온 친구들도 인생이 빈껍데기 같다며 허무하다는 말을 종종 한다. 아이나 가족이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생을 길게 놓고 봤을 때 자신이 행복해야 가족에게도 더 좋다는 의미였다. 스스로 괜찮아야 누군가에게도 괜찮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김 감독의 말과 같은 맥락이다.

궤도에서 벗어난 삶, 안 풀리고 못 미치는 삶이라며 나를 푸대접하고 업신여겼던 30대를 반성한다. 성공을 하거나 부러움을 살 만한 구석은 없지만, 그래도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가치를 추구한다면 이제라도 내게 주어진 일상을 쓸고 닦으며 광을 내야 한다.

개그우먼 이영자씨는 지금의 전성기가 오기 전,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을 때나 타인이 내뱉은 말에 상처받을 때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순간들을 차곡차곡 모아갔다고 한다. 예를 들면 작은 화분을 가꾸는 일들이었다.

나도 고급 그릇부터 꺼냈다. 그리고 일단 책장의 책들을 싹 정리했다. 내일은 책장과 책상 배치를 좀 해보고, 그 다음 날에는 인터넷 선을 새로 연결하고, 그 다음에는 또 다른 것들을 하나씩 해보려 한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이런 사소한 순간들은 나를 소중히 여기는데 도움이 된다. 우리 영자 언니도 그랬다.

"마음 먹은 일이 잘 안 될 때는 만만한 꿈부터 꿔라."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30대에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 #김송미 감독 #괜찮아마을 #영화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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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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