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두 여중생의 무례함에 대해서

[김승일 시인의 학교詩끌 7] 학생들 마음마다 보이지 않는 방어막이 있다 1

등록 2019.06.24 11:56수정 2019.06.24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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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 시인의 학교詩끌'은, 학교가 폭력으로 시끌시끌하다는 뜻, 시(詩)로 학교를 끌어당기거나 끌어준다는 뜻, 결국에는 좋은 의미에서 학교가 시끌시끌했으면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글이 학교폭력 예방 문화를 만들어 나아가려는 모든 분께 진심으로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기자 말

몇 해가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그런 얼굴들이 있다. 그 얼굴들은 하나같이 밉다가, 친근해지다가, 결국은 짠한 마음을 갖게 한다. 무수한 학생들을 만나는 나로서 유독 기억나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로는 왜 그럴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학생들을 만난 지 햇수로 5년이 되어가는 시점부터 잠들기 전에는 이런 생각이 자주 든다. 내가 생각하는 만큼 그 학생들은 가끔이라도 선생이었던 나를 기억해줄까.

신기한 것은 학기 내내 죽어라 말을 듣지 않던 학생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말을 잘 듣고 수업에 열심히 참여했던 학생들의 얼굴은 (그 당시에는 예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진다. 기억이란 것은 마음에 남은 어떤 자국 같은 것이다. 말을 잘 듣지 않고 말썽을 피우던 학생들이 내 마음에 더 많은 자국을 남긴 것은 아닐까.

인사하자마자 책상과 한 몸이 되어버리는 두 여학생

나의 모든 강의 철학을 무력화시키는 여학생 둘을 만난 적이 있다. 그 둘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내가 애써 만들어놓은 수업 분위기를 그 둘은 단 한 마디로 무너뜨렸다. 갑작스러운 질문과 뜬금없는 행동을 하는 것은 늘 둘의 몫이었다. 교실의 분위기를 휘어잡는 카리스마.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강력한 비속어와 신조어.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면 누구든 비난해버리는 독불장군 캐릭터. 자기 자신의 잘못은 생각 안 하고 친구 탓 선생님 탓만 하는 세상에서 가장 억울해보이게 울상을 짓는 얼굴 둘. 정말이지 내 머리와 가슴에 담긴 교육법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두 여학생 때문에 한 학기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뻔했다.

일단 그 두 명의 여학생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언어가 내겐 없었다. 내가 발화하는 언어는 그 둘의 마음에 닿질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다시 생각해보면 그 여학생의 세계 속으로 나는 한 걸음도 진입하지 못했다. 그 두 명의 학생은 어떤 세상에 살고 있었을까. 그 둘에게 굉장히 따분했거나, 그 둘보다 너무 앞서갔거나, 또는 그 둘에게 무의미했을 내 언어의 세계보다는 훨씬 재미있는 곳에 가 있었을 거라는 추측을 해볼 뿐이다.

나는 온화한 선생이고 싶었지만, 나는 늘 화가 나 있었다. 내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 교실을 인정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 또한 권위의 노예였을까. 권위에 대해서 늘 경계해온 나였지만, 나 자신이 권위적이었던 것이다. 선생으로서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모든 행위 앞에서 분노하는 마음을 나는 간신히 숨기고 있었다.

"감히 내 수업을 엉망으로 만들어! 감히! 나의 이 말을 무시해! 감히! 내가 이렇게 중요한 말을 하고 있는데 감히! 머리에 피도 안 마른(이런 구시대적인 언어가 생각나기도 했다) 녀석들이 감히! 나를 무시해!"

이런 말이 내 속에서만 종종 들끓었다. 이 감정은 학생들의 편으로 열려있는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두 명의 여학생을 감동시킬 수 있는 언어가 내겐 없다는 데서 오는 일종의 실망감 같은 것이 수업 중에 생겨난 것이리라.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엎드려 있는 학생 둘을 내려다보는 데서 오는 무력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선생님께 인사!" 하자마자 책상과 한 몸이 되어버리는 두 여학생의 자동화된 '더 이상 내게 참견하지 마, 또는 다가오지 마'의 차가운 세계 앞에서 나는 어리둥절했고 슬펐다.
 

요즘 학생들은 수업 내내 엎드려 있는 경우가 많다. ⓒ 김승일

   

엎드려만 있는 학생들을 보면 화가 나기도 하지만 결국 마음이 짠해지는 경우가 많다. 요즘 학생들은 자기 마음을 진솔하게 고백할 만한 통로가 별로 없다. 겨우 핸드폰이라는 물건이, 그들 마음에 작은 창문의 역할을 해줄 뿐이다. ⓒ 김승일

 
내 학생들을 적으로 오인하다니!

다른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그 두 명의 학생들을 (수업이 끝날 때까지) 일으켜 세울 수 없다는 굴욕감이 스물 스물 생겨나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이건 결국 좋은 강의를 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한 나라는 존재의 안팎에서 벌어지는 전쟁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처음엔 그 두 명의 여학생을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 평화로운 내 수업을 방해하는 훼방꾼.

문학 애니메이션 수업답게 학생들과 <에반게리온>을 함께 보면서 '저 둘은 마치 지구로 쳐들어온 사도(악당) 캐릭터와 같은 녀석들이군' 하고 혼자서 웃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적이라니! 내가 사랑해야 할 학생들을 적으로 오인하다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화를 내보기도 하고, 달래보기도 하고, 선물을 줘서 꼬드겨보기도 하고, 칭찬을 해보기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지만 그 둘에겐 효과가 없었다.

'한번 미워하기 시작하면 끝장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 다음부턴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 모든 힘을 집중했다.

미워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새로운 국면이 올 거라고 나는 믿기로 했다. '설마 한 학기가 끝날 동안 계속 이런 식이겠어' 이런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나는 그 두 명의 여학생에게 한 발자국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진심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이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랑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예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다니, 나는 힘이 쭉 빠져버렸다.

나는 이 이야기를 수업에 녹여내기로 마음먹었다. <에반게리온>의 한 구간을 잘라서 문학적으로 의미화 했다. 학생들이 좋아하는 만화 영상으로 다가가면 말로 하는 것보다는 어떤 내용을 전달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었다.

<에반게리온>에는 무시무시한 사도 캐릭터들이 나오는데 당연히 이들은 초능력을 쓸 줄 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초능력은 'AT필드(Absolute Terror Field)'다. 이 초능력에 굳이 다른 이름을 붙이자면 '마음의 벽 전개 능력'이 될 것이다. 마음에 벽을 쌓는 것이 어떻게 능력이 될 수 있을까. 아래의 그림(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을 보면 그 능력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상상해볼 수 있다.
 

AT 필드 : 일명 '마음의 방어막'<에반게리온>이라는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에반게리온 초호기’의 거대 칼날을 마음의 벽 하나만으로 거뜬히 막아내고 있는 ‘나기사 카오루(인간형 사도)’의 모습. ⓒ 나무위키

 
서로 귀 기울이지 않은 채 거리 좁히려는 건 폭력일 수도

사람은 저마다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본능이 있다. 외부의 자극이나 충격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면 죽을 것 같은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은 순간에도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방어막조차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무력하고도 두려운 현실을 마주할 것인가. 그러니까 이 방어막 또는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는 우리 자신을 외부세계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초능력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 방어기제의 사전적 의미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속이거나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여, 감정적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심리 의식이나 행위를 가리키는 정신분석 용어.'

모든 사람은 상처받거나 위협받는 상황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평온해지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여기서 평온이라는 말을 오해하면 안 된다. 그 어떤 감정도 없는 상태가 평온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평온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은 이해(공감)와 사랑(내면적 포옹의 상태)이다. 이해와 사랑은 진공의 상태가 아니다. 또한 無운동성의 세계도 아니다. 평온은 사실상, 우리가 가장 갈망하는 운동성으로 가득한 마음 상태라고 재해석할 수 있다.

상처가 많을 때 우리는 마음의 벽이 더 커지고 두꺼워지는 것을 경험한다. 누군가 내게 활짝 웃으며 다가온다고 해서 반가운 마음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님을 부정할 수 없다. 활짝 웃을 수 없을 때 활짝 웃으며 다가오는 행위는 오히려 불편을 넘어 위협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좀 더 섬세하게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학생들의 마음도 그러하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단순하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 착각에서 비롯된 여러 언행들이 아직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은 학생들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아직 가깝지 않은 상태, 선생과 학생들 사이를 채우고 있는 그 거리(Distance, Space)를 존중해야만 한다. 윤성택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곳엔 관절을 꺾고 웅크리고 있는 별자리(스토리)들로 가득 차 있다.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상태에서 그 거리를 좁히려는 모든 행위는 폭력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사실 웅크리고 있는 스스로의 고립 상태에서 성장한다. 그 각자의 성장기를 우리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나는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여학생 둘을 통해서 표면적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이 내밀한 성장기를 내가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깊이 되짚어보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다.

제멋대로이고 무례한 학생들에게 매번 화를 내거나 혼을 내는 데서 그친다면, 그것은 올바른 교육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결국 선생도 학생들 앞에서 방어막을 치고 똑같이 버티겠다는 심사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렇게 한 학기는 냉담하게 지나가버리고 뻥 차버린 축구공처럼 이해와 사랑은 저 멀리 학교의 담장을 넘어가버린다.
 
나무가 햇빛의 속삭임을 다 수긍하면서 자라겠는가.
나무가 바람의 명령을 다 받아들이면서 가지를 꺾어 크겠는가. 
-김승일 시인, 「관절은 대관절」일부
 

학생들의 시선모든 학생들은 우리의 별빛이다. 학생들 하나 하나를 귀하게 여기면 앞으로 우리 사회에 멋진 이야기들이 이어지지 않을까. ⓒ 김승일

 
학생들에게 다가가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가슴 아팠다. 사랑을 표현할 길이 막혔을 때, 우리는 시집을 펼쳐보지 않는가. 시를 쓰게 되는 날은 사실 무언가 막혀 있을 때다. 가로막혀 있을 때 우리는 오히려 그 너머를 바라보려는 힘을 갖게 된다.

엎드려 있던 여학생 둘이 엎드려 있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얼굴을 들어서 무언가 말을 했을 때, 나는 그것이 죄다 '무례하다'고만 해석했던 것은 아닐까. 나조차 방어막을 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필름을 돌려 소중했던 과거를 밤하늘에 상영해본다. 밤하늘에 빛나는 모든 과거들이 별자리처럼 빛나고 있다. 사실은 사랑받고 싶었는지도 모를 두 명의 여학생 이야기다.
덧붙이는 글 [김승일 시인의 학교詩끌]은 이번 호부터 <오마이뉴스>에만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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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없는 학교를 소망합니다. 제 첫 시집 『프로메테우스』를 학교에서 낭독합니다. 학교폭력을 예방하고, 피해학생들을 치유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강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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