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님, 상산고 앞에서 '멈칫'하면 안됩니다

지역과 무관하고 특권의식만 심어주는 자사고 폐지해야

등록 2019.06.23 18:58수정 2019.06.23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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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오전 자율형사립고(자사고) 지정취소 결정을 받은 전북 전주 상산고등학교 정문 앞을 시민이 지나고 있다. 2019.6.21 ⓒ 연합뉴스

 
자사고 폐지라는 대의가 지역의 한 명문 자사고 교문 앞에서 멈춰 설 모양이다. 전북 상산고의 일반고 전환 결정을 두고 관할 전북교육청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학부모들은 물론 여당의 지역 국회의원들까지 가세해 상산고를 편들고 나섰다.

물론 그 중심엔 보수언론들이 있다. 그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자사고 폐지에 소수의 반대 목소리를 부추기고 마치 다수의 여론인 양 왜곡하고 있다. 연일 전북교육청과 교육부를 성토하며, 자사고 폐지를 공산주의적 발상이라며 해묵은 색깔론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한다'는 헌법 조문까지 들먹이며, 자사고 폐지는 헌법 정신을 파괴하는 행위라는 주장이다. 공정한 기회를 넘어 결과조차 균등하게 하려는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견강부회다.

지역 교육청의 판단을 따르겠다던 교육부도 언론보도에 덴 듯 갈팡질팡하며, 전환 결정을 재고할 수도 있다는 뜻을 슬쩍 내비쳤다. 들끓는 여론에 한 발 빼는 듯한 무책임한 태도다. 자사고를 폐지하고 일반고로 전환하겠다는 건 지난 대선 때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자사고 폐지 두고 공산주의 운운,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

21년차 현직 교사로서, 교육자적 사명감과 양심을 걸고 단언하건대, 자사고는 애초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괴물'이다. 적어도 승자독식과 각자도생의 무한경쟁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자사고는 결코 '본령'에 충실할 수 없는 학교다. 모든 자사고가 입시명문고로 변질된 건 이미 예견된 바다.

자사고는 애초 건학이념에 충실하고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다양화하겠다는 취지로 설립되었다. 하지만 자율성을 보장받은 자사고의 커리큘럼은 대부분 국영수를 비롯한 대학입시를 위한 과목으로 편성됐다. 커리큘럼만 놓고 보면 '자사고끼리의 획일성'을 걱정해야할 처지가 됐다.

커리큘럼의 자율성은 조변석개하는 입시제도의 변화에도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게 했다. 학생부 종합전형이냐 수능이냐를 놓고 해마다 여론이 들끓고 있지만, 진학 실적에 관한 한 그들의 철옹성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명실 공히 대한민국 고등학교의 '스카이 캐슬'이다.

'내 아이는 특별하다'며 자사고 폐지 반대를 부르짖는 학부모들이야 그렇다 치자. 자녀에게 자신의 모든 욕망을 투사하는 그들에게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금언 따위는 공자님 말씀일 뿐이다. 애초 그들에게 교육의 공공성을 기대하기란 무망하다.

문제는 교육의 공공성을 외면하고 천연덕스럽게 짓밟는, 자칭 '교육 전문가'들이다. 자사고 폐지를 두고 공산주의적 발상이라거나, 지역 인재의 성장을 가로막고 발전을 저해한다는 논리를 펴는 이들은 하나같이 대학 교수들이다. 그들은 언론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언론은 교수라는 직함에 기대 여론을 호도하는, 말하자면 '공생 관계'다.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도 그들 못지않다. 대의보다 당선 가능성에 목매단 그들에게 여론의 향배는 정치적 판단과 선택의 기준이 된다. 얼마 전 '한유총 사태'에서도 보았듯, 정치인들에게는 침묵하는 다수보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영향력을 발휘하는 소수가 더 무서운 법이다.

'교육 전문가' 행세를 하고 있지만, 실상 저들은 우리 교육과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그저 대학 교수나 정치인이라는 '직함'으로 인해 장삼이사들의 눈과 귀를 현혹할 가능성이 커서 문제인 거다.

졸업하면 지역에 없는 '지역 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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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산고등학교 자율형사립고 재지정 평가 발표일인 20일 오전 전북도교육청 앞에서 학부모들이 항의 집회를 하고 있다. 학부모들은 이날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상산고의 자사고 지정 취소 소식이 알려지자 도교육청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 연합뉴스

 
자사고 폐지를 두고 공산주의 운운하는 건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이라 귀를 씻고 싶은 심정일 뿐 첨언하진 않겠다. 그런데, 지역의 인재 양성을 가로막는다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주위에 적지 않은 듯해 이것만큼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그러자면 지역 인재의 올바른 정의부터 필요하다.

자사고가 지역에 있고 그 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면 지역 인재일까. 이는 자사고뿐만 아니라 일반고에도 똑같이 적용될 질문이지만, 출신지역이나 학교의 위치를 기준 삼는 건 우스꽝스럽다. 더욱이 전국을 모집 단위로 하는 자사고가 지역 인재 운운하는 건 남우세스러운 일이다.

개인적으로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한 어느 국회의원의 사례를 보자. 그는 지역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이후 사법고시를 통해 검사가 되었고, 승승장구해 부장검사 자리에까지 올랐다. 법복을 벗은 뒤 그는 총선에 나가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런 경로를 거친 정치인들이 어디 한 둘이랴마는,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총선에 출마하기까지 단 한 번도 나고 자란 고향에 발을 디딘 적이 없다. 서울에 열 채도 넘는 집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정작 고향에는 그의 집이 없었다. 과연 그를 두고 지역 인재라 부를 수 있을까.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고 했다지만, 진학이든 취업이든 일단 서울로 올라가고 나면 웬만해선 지역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은퇴 후 전원생활을 꿈꾸거나 선거에 출마할 게 아니라면, 서울을 '생존의 동아줄'처럼 여기는 사회다. 젊은이들 사이에선 서울을 벗어나는 걸 두고 스스로 '좌천'이라 냉소한다.

서울에 지역 출신 대학생들의 기숙사를 운영하는 광역단체도 여럿이고, 지역의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모아 읍내에 기숙학원을 운영하는 농어촌 지역도 있다. 죄다 고향을 등진다며 인구의 격감을 걱정하면서도 아이들만큼은 서울의 명문대에 진학시키기 위해 도민과 군민들이 낸 세금을 기꺼이 쓰고 있는 것이다. 그곳의 모토는 하나같이 '지역 인재 양성의 요람'이다.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아 서울로 간 아이들이 과연 그 '은혜'를 기억하고 갚게 될까. 진학 지도 경험으로 장담하건대,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특별한 대우를 받아온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특권의식에 젖어들게 되어, 더 높은 곳을 향해 앞만 보고 내달릴 뿐 과거를 뒤돌아볼 여유가 없다.

심지어 그들 중엔 지방 출신임을 부끄럽게 여기며, '서울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경우도 많다. 대학에 진학한 뒤 부지불식간 튀어나오는 사투리에 스트레스를 받아 거울 앞에서 서울말을 연습한다는 '웃픈' 현실 앞에, 지역 인재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고향이 어디든, 어느 학교를 나왔든, 서울이 아닌 지역의 발전에 헌신하는 이가 진짜 지역 인재다.

특권의식이라는 독버섯 자라게 하는 '숙주'

흔히 자사고를 입시 명문고로 전락했다는 것에만 주목하지만, 그보다 아이들에게 특권의식이라는 독버섯을 자라게 하는 숙주라는 게 더 큰 문제다. '1%의 엘리트가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논리가 여전히 횡행하고, 일반고와는 다른 특별한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자긍심을 내면화한다. 자긍심과 특권의식은, 시쳇말로 깻잎 한 장 차이다.

자사고 폐지에 반대하는 이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는 논리는 '실력의 하향평준화'다. 대학입시 과목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게 실력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우습지만, 우리 교육 현장엔 그보다 시급한 문제가 한 둘이 아니다. 학벌구조에다 자사고가 기름 부은 고교 서열화가 몰고 온 폐해는 '실력의 하향평준화' 논쟁이 한가하게 들릴 정도다.

자사고와 일반고의 분리는 일반고 내의 우열반 편성을 막을 명분을 허물어버렸다. 자사고는 허용하면서, 왜 일반고 내에서는 성적순으로 반을 편성하지 못하게 하느냐는 질문에 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실제로 몇 해 전 임대아파트에 사는 가난한 아이들을 분리해 반을 편성해달라고 학부모들이 학교를 찾아와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진 적도 있다.

수업시간 모둠활동을 하는 데에도 걸림돌로 작용한다. 성적순으로 지그재그 모둠을 편성하면, 상위권 아이들이 하위권 아이들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된다고 항의하고, 자유롭게 모둠을 구성하도록 하면, 모둠은 정확히 성적순으로 서열화하고 만다. 하위권 아이들끼리 뭉친 모둠은 종일 무기력한 모습으로, 사실상 수업에서 배제 당한다.

교육과정에서야 협동학습을 강조하고 있지만, 수업시간 친구들끼리 끌어주고 밀어주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짝꿍은 자신의 경쟁 상대일 뿐,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라는 인식이 희미해져 버렸다. 이 모든 걸 자사고 탓으로 돌릴 순 없겠지만, 자사고를 정점으로 한 고등학교 서열화가 부추긴 결과임은 분명하다.

백 보 양보해서, 자사고를 폐지해 실력이 하향평준화한다고 해도, 그로 인해 아이들의 숨 막히는 경쟁이 조금이나마 완화될 수 있다면 우리가 가야할 길은 명확하다. 이른바 '1:99 사회'를 바라는 게 아니라면, 미래세대 아이들이 더디 가더라도 함께 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옳다. 요컨대, 자신의 자녀에게만 매몰될 때, 학교는 괴물이 되는 법이다. 지금 자사고의 모습이 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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