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얼마나 해봤냐'는 질문, 왜 들어야 하죠?

[야망 있는 여자들을 위한 비밀사교클럽] 섹스 칼럼니스트 은하선 인터뷰 ①

등록 2019.06.26 19:49수정 2019.06.27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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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고 말하고 꿈꾸는 여성들이 늘어나는 시대, 우리에게는 더 많은 롤모델이 필요합니다. '야망 있는 여자들을 위한 비밀사교클럽'은 사회 곳곳에서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하며 마음껏 야망을 품고 살아가는 30대 이상 여성들을 인터뷰합니다.[편집자말]
야망 있는 여자들을 위한 비밀사교클럽, 일명 '야비클럽' 시리즈가 세 번째 인터뷰에 접어들었다. 야망 있는 여자들을 위한 오프라인 모임도 준비 중이다. 40대에 접어들어도 투명인간이 되지 않는 법이 궁금해 시작했던 인터뷰 연재이지만, 회차를 거듭해갈수록 다른 질문도 늘어난다. 

앞서 울프소셜클럽의 김진아 대표가 주장한 '여성연대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여성의 권익을 높이는 방법이 '밀어주고 끌어주는 것'이 돼야 하는지는 확신이 없다.

[김진아 대표 인터뷰 ①] 10년차 프리랜서의 조언 "회사에서 실패하라"
[김진아 대표 인터뷰 ②] "퇴사 권하는 콘텐츠는 여자에게 해롭습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라는 슬로건 아래 지난 백 년을 풍미했던 '으쌰으쌰' 문화가 과연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것일까?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이 시대의 여성들에게는 새로운 방식의 정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야비클럽 세 번째 인터뷰이에게는 그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세 번째 주인공의 이름은 은하선. 책 <이기적 섹스>의 저자, 앨범 <나도 모르는 나>를 발매한 싱어송라이터, EBS <까칠남녀>에 출연한 섹스칼럼니스트, 섹스토이 숍 '은하선토이즈' 대표, 비건을 위한 술집 '드렁큰비건' 공동 대표, 유튜브 퀴어방송국 '큐플래닛' 운영자, 퀴어 오케스트라 무지개음악대 단원. 은하선 대표의 활동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성소수자로 살며 다양한 성 담론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지난 20일 홍대의 한 카페에서 솔직하면서도 소신 있는 그를 만났다.

"시사평론가에게 '정치 해봤냐'고 안 묻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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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작가 은하선 ⓒ 권우성

 
- 자기 소개를 부탁한다. 작가이자 가수, 연예인이자 운동가, 유튜브 방송 운영자, 자영업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거로 알고 있는데. 
"섹스 칼럼니스트 은하선이다. 2015년 책 <이기적 섹스>를 썼고 EBS <까칠남녀>에 패널로 출연하면서 대중에게 알려졌다. 드렁큰비건과 은하선토이즈를 운영하고 있다."

- 대표 직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을까? 
"시간을 가장 많이 쓰는 일은 드렁큰비건과 은하선토이즈 운영이다. 그렇다고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하거나 방송을 하는 일이 부수적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누군가 제게 '너는 하는 일이 많은데 그 중 뭐가 가장 재밌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다 재밌다. 어떤 것도 사이드잡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 그렇다면 섹스 칼럼니스트로 자신을 먼저 소개한 이유는?
"섹스 칼럼니스트라고 소개하면 방송에서는 '섹스' 자를 자르고 칼럼니스트만 내보낸다. 섹스 칼럼니스트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이 놀라는 걸 보는 게 재밌다. '섹스 칼럼니스트 은하선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네? 뭘 하신다고요?' 되묻는다. 시사 칼럼니스트나 시사평론가라고 했을 때는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시사평론가들에게는 '정치 해본 적 있냐'고 묻지 않으면서, 섹스 칼럼니스트는 '섹스를 얼마나 해봤냐'는 질문을 왜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증명을 해야 하는 건가. 가끔 이런 댓글도 달린다. '섹스 칼럼니스트인데 어떻게 양성애자야?', '섹스 칼럼니스트면 그만큼 많이 했다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미아리에 있는 여자들이 섹스 칼럼니스트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래서 섹스를 해체하는 작업을 한다. 섹스는 뭘까? 정상적인 섹스는 뭘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걸 좋아한다."

- 어쩌다 이렇게 다양한 직업을 갖게 됐나?
"이렇게 많은 일을 하자고 계획한 건 아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섹스토이숍은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은하선토이즈은 원래 '걸스타운'이라는 퀴어와 여성을 위한 공간에 작게 붙어서 시작했다. 화장실로 가는 통로 옆에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드렁큰비건 운영도 마찬가지다. 파트너가 요리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게를 운영하고 사업을 할 만한 가능성을 열게 됐다. 이렇게 빨리 책을 쓸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방송도 마찬가지다. 2016년에 <SBS 스페셜>에 나왔던 것을 계기로 방송국에서 러브콜이 종종 왔고, 2017년 EBS <까칠남녀>에 고정 패널로 출연하게 됐다. 글도 쓰고 방송 일도 하고 작은 사업도 하는 사람이지만 계획했던 건 하나도 없다."

- 뭔가를 계획하지 않고 사는 삶이 불안하진 않은가?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계획이 없었다고 말하신다(웃음). 가끔 학교 다닐 때 일화를 이야기해 주신다. 내가 언제나 지각을 해서 교통지도를 하시는 녹색어머니회 어머님들이 내가 오는 걸 신호 삼아 일을 마무리하셨다고 한다. 내가 들어가면 나머지 학생들은 다 들어갔다는 뜻이니까. 어머니께서 그 이야기를 듣고 충격받으셨단다."

- 그럼 천성이 그렇다는 걸까?
"계획한 것이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아서, 계획한 걸 멈췄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나는 예중, 예고, 음대를 나왔다. 오보에를 계속했다. 음악을 계속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음악은 안 하고 작가나 사업가로 살고 있지 않나. 

음악은 정말 열심히 했는데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것에 반해, 방송과 글쓰기는 예상치 않게 반응이 좋았다. 내가 계획하거나 노력한다고 해서 어떤 일을 잘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남들이 내가 열심히 하는 걸 알아주진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해야 할까. 

대신 생각지도 못 하는 일들이 커졌다. 책을 낸다거나, 파트너가 가게를 하게 되어서 같이 사업을 하게 되는 일들, 방송을 하는 일이 그렇다. 그래서 계획하기를 멈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은 걸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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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작가 은하선 ⓒ 권우성

 
심보선 시인은 최근 산문집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에서 예측과 예감의 차이를 이야기한 바 있다.
 
"예측과 예감은 미래를 상상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이다. 예측은 연속성과 정체성을 지키는 방식으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미래, 통제는 할 수 없더라도 적어도 준비할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다. 예감은 연속성과 정체성이 깨지는 방식으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타자의 출현으로부터, 내가 '무엇'이라고 임의적으로 명명하지만 사실 '무엇'이 아닌 어떤 존재의 출현으로부터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다." 

심보선 시인의 말대로 예감이 삶을 변화시키는 수수께끼 같은 힘을 감지하는 것이라면, 은하선 대표는 예측하기보다는 예감하는 삶을 사는 것 같았다. 어떤 일들이 그를 '예측'이 아닌 '예감'의 인생으로 끌어 당겼을지 궁금했다. 

- 왜 오보에의 길을 그만뒀나?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글 쓰는 일, 방송하는 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스트레스였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할 때면 잘한다, 재능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노력한 것보다 성과가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커서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기대에 못 미치는 두려움이 너무 컸다. 

놓고 싶었지만, 오보에를 너무 사랑했다. 그래서 독일로 유학을 하러 갔는데, 그곳에서 공부하면서도 내가 한국에 돌아가서 오보에를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은 들었다. 계속되는 오디션이나 연주가 지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이 나를 성추행한 일이 있어서, 한국에서 음악을 하기에 불리할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음악은 인맥이 중요하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 오보에는 고급 취미가 됐다. 지난해부터 퀴어 오케스트라 무지개 음악대를 만들어서 단원으로 활동 중이다. 서울퀴어문화축제 등에서 연주했다."

- 그럼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일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원래 '야망'을 물으려고 했었다. 
"사실 인터뷰 제안을 받았을 때 '야망'이라는 단어 때문에 멈칫했다. '여자들의 야망'이라는 단어가 너무 신자유주의적인 서사이지 않은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서사다. 난 이런 야망이 있었고, 사람들을 이렇게 바꾸고 싶었고, 세상을 이렇게 좋게 만들고 싶었다는 식의. 그런 서사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넌 뭐가 제일 좋아?', '궁극적으로는 뭘 하고 싶어?', '목표가 뭐야?' 그렇게 묻는다. 나는 그냥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다. 꿈도 크지 않다.

한 번은 누군가 인터뷰에서 '드렁큰비건을 어떻게 키우고 싶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나와 파트너는 '키울 생각 없다'고 답했다. 왜 굳이 뭔가를 키워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 성향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작게 시작하는 게 좋다. 조금씩 키워나가는 게 좋다."

'야망'이 누군가에게는 '노오력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자기착취의 프레임으로 비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큰 사람이 되어 사회에 기여한다'는 식의 스토리는 찬양 받지 못한다. 작더라도 내 개인의 것을,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하는 때가 아닌가.

(* 은하선 인터뷰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기적 섹스 - 그놈들의 섹스는 잘못됐다

은하선 (지은이),
동녘,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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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밥 벌어 먹고 사는 프리랜서 작가 딴짓매거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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