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웃지 못한 시상식 "다시는 이런 일 없기를"

[현장] '진실의힘 인권상' 받은 산업재해 피해가족 단체 '다시는'

등록 2019.06.27 11:43수정 2019.06.27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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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진실의힘 인권상은 산업재해 피해가족 네트워크 '다시는'이 수상했다. ⓒ 김종훈

 
"황상기에서 시작된 걸음이 박상옥, 김시녀, 한혜경, 김미숙, 이상영, 박정숙, 김용만, 강석경, 홍순성, 이종민, 이용관, 이한솔 그리고 지금 김도현에게까지 이어졌다."

박동운 재단법인 진실의힘 이사장이 26일 오후 '제9회 진실의힘 인권상' 시상식에서 거론한 이름들이다. 이들은 모두 산업재해피해가족 네트워크 '다시는'의 구성원들로, 2019년 진실의힘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박 이사장은 "'다시는'이 하나의 깃발을 세우고 함께 걸음을 시작한 것은 돈과 이윤, 폭력에 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라면서 "내 자식은 돌아올 수 없지만 또 다른 죽음은 막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라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박 이사장이 처음으로 언급한 '다시는'의 황상기씨와 박상옥씨는 백혈병으로 사망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노동자 고 황유미씨의 부모님이다. 이어 언급된 김시녀씨와 한혜경씨는 삼성전자 LCD 공장노동자로 일하다 뇌종양이 발병한 한씨와 그의 어머니다.

김미숙씨는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사망한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이며, 이상영씨와 박정숙씨는 제주도 서귀포시에 위치한 음료공장에 현장실습 나갔다가 생수 포장 적재기 프레스에 눌리는 사고를 당해 사망한 고 이민호군의 부모님이다.

김용만씨는 분당 토다이 현장실습생 고 김동균군의 아버지이고, 강석경씨는 CJ 진천 현장실습생 고 김동준군의 어머니다. 홍순성씨는 LG유플러스 하청업체 현장실습생 고 홍수연씨의 아버지고, 이종민씨는 LG유플러스 하청업체 노동자로 근무하다 사망한 고 이문수씨의 아버지다. 이용관씨와 이한솔씨는 tvN에서 일하다 숨진 고 이한빛 PD의 가족이다.

박 이사장이 마지막에 언급한 김도현씨는 지난 4월 수원의 한 신축건물 공사현장에서 추락해 사망한 스물다섯 청년 고 김태규씨의 누나다. '다시는'은 산재피해를 당한 이들이 함께 만든 모임이다. 단체명처럼 '다시는 자신들과 같은 아픔을 겪는 산업재해 피해가 재발해서는 안 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산재피해가족 네트워크 '다시는'은 김용균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산재 피해자 가족들끼리 자연스레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됐고, 숙고 끝에 지난 4월 26일 아름다운재단의 '2019 공익활동가 네트워크 지원 사업'에 공모해 정식등록을 마쳤다. 이들은 산업재해가 발생할 때 기업 경영자까지도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과 현장실습생 제도 개선 운동 등을 벌이고 있다.

"유미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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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재해 피해가족 네트워크 '다시는'이 받은 제9회 진실의힘 인권상을 받자 참석자가 눈물을 훔친다. ⓒ 김종훈

  
이날 시상식에는 현장에 참석한 산재피해 가족들이 순서대로 나와 수상소감을 밝혔다. 그런데 수상자들이 말을 이을 때마다 시상식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눈물과 콧물을 훔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만큼 '다시는' 구성원들이 담담히 전하는 메시지의 울림이 컸다. 

가장 먼저 연단에 오른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는 "우리 유미는 삼성에서 반도체를 만들다가 백혈병에 걸려 죽었다"면서 "유미가 병에 걸려 힘들게 고생하고 있을 때 제가 유미한테 병에 걸린 원인을 꼭 밝힌다고 약속했고,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지만 그 약속을 지켜냈다"라고 밝혔다. 

지난해 황씨는 삼성으로부터 공식 사과와 보상, 재발방지 약속을 받아냈다. 2007년 딸의 죽음 이후 삼성이 건넨 거액의 회유를 무시하고,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을 위한 단체 '반올림'을 만든 지 11년 만에 거둔 성과였다. 

이후 또 다른 삼성전자 LCD 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이 발생한 한혜경씨 역시 7전 8기 끝에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황씨는 "삼성이 거액의 돈으로 회유할 때 혜경씨가 잘 버텨주지 않았다면 이런 결과를 만들기 어려웠다"라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황씨는 "작년에 용균이가 죽고, 용균이 엄마가 힘들게 싸우면서 산재피해 가족들을 만나는 일이 많아졌다. 함께 했고 결국 산업안전보건법도 개정됐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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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재해 피해가족 네트워크 '다시는'이 받은 제9회 진실의힘 인권상 수상자 고 이한빛 피디 아버지 이용관씨 ⓒ 김종훈

  
이어 연단에 오른 고 이한빛 피디의 아버지 이용관씨는 "자식을 잃은 순간부터 삶이 멈추어버렸지만 나와 똑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가족을 만난 뒤 처음으로 웃음기를 띨 수 있었다"면서 "다시는 우리 아이들 같은 죽음이 없도록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늘 되새긴다"라고 밝혔다. 

다소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을 잇던 이씨가 아들 고 이한빛 피디가 남긴 유서를 읽으며 눈물을 보이자 장내는 순식간에 눈물바다로 변했다. 

"제 아들 이한빛 피디는 사회적 약자와 비정규직 등 인권 문제해결을 위해 치열하게 살다간 27살의 청년이었다. 입사한 뒤 첫 월급을 세월호대책위와 KTX 해고승무원 후원금으로 썼다. 죽는 순간까지도 '통장 정리하고 남는 돈이 있으면 빈곤사회연대 등 몇 개 단체에 후원금을 내달라'라는 말을 하고 떠났다." 

이날 시상식 현장에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와 생존자 가족들이 함께 만든 합창단의 공연이 진행됐다. 현장에서 이한빛 피디의 마지막 모습을 전해 들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의 눈시울 역시 금세 붉어졌다.

"어린 학생들이 일하다 죽는 것을 막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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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재해 피해가족 네트워크 '다시는'이 받은 제9회 진실의힘 인권상을 수상했다. ⓒ 김종훈

 
고 이민호군의 부모님 이상영씨와 박정숙씨, 김동준군의 어머니 강석경씨, 김동균군의 아버지 김용만씨는 함께 연단에 올랐다. 이들은 모두 자녀들이 특성화고를 다니다 현장실습 과정에서 산재를 당한 피해 가족들이다.

민호군 아버지 이상영씨는 "오늘 이렇게 기쁜 날이 왔지만 마음은 참 그렇다"면서 "민호가 사고를 당하고 10일 동안 중환자실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기적을 바랐지만 민호는 먼저 떠났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이씨는 "회사는 '민호의 사고는 민호 잘못으로 일어난 사고라 회사 잘못이 없다'며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회사 대표라는 사람은 한 번도 분향하지 않았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다시는' 가족들을 만나 힘이 났다"라고 덧붙였다.

"생을 마감하고 싶은 충동이 계속 일었지만 '다시는' 가족들을 만나 서로에게 위로가 됐다. 우리들은 '우리 아이처럼 죽는 일이 없어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단호하게 맞서고 나아갈 것이다."

고 이민호군이 일했던 음료 회사의 대표이사 김모씨는 업무상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됐지만 지난 1월 법원으로부터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김씨에게 적용된 벌금은 500만 원에 불과했다.

이상영씨에 이어 연단에 오른 수원 신축공사 현장에서 추락사한 고 김태규씨의 누나 김도현씨가 "산재 발생 후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기업과 책임자는 벌금이나 집행유예로 끝나는 게 현실"이라고 목소리를 높인 이유다. 김씨는 "제 동생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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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재해 피해가족 네트워크 '다시는'이 받은 제9회 진실의힘 인권상 상패 ⓒ 김종훈

 
이날 시상식에는 최영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이 깜짝 등장해 축사했다. 최 위원장은 "제도적 폭력에 의해 노동자의 죽음이 이어지고 있다"면서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얼마나 기가 막혔으면 투사가 될 수밖에 없는지 이해가 간다"라고 밝혔다. 최 위원장은 이어 "아직도 6명의 노동자가 매일 희생당하고 있다. 인권위도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막막하다. 지난 2001년부터 2018년까지 산재로 인해 사망한 인원은 4만 2359명에 달한다. 연으로 따지면 약 24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해마다 목숨을 잃고 있다. 산재 사망 비율만 놓고 보면 OECD 가입국 중 1위다.

한편 '진실의힘'은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 간첩으로 몰려 처벌받았다가 재심을 통해 누명을 벗은 이들이 주축이 돼 만든 단체로, 지난해에는 형제복지원 생존자인 한종선씨를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서승 교수와 홍성우 변호사, 유서대필사건의 피해자 강기훈씨 등도 수상했다.
#다시는 #진실의힘 #산업재해 #김용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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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팀 취재기자. 오늘도 애국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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