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엄마의 아바타였다... 남편은 날 죽이려 했다"

['보이지 않는' 여성 홈리스의 이야기 ②] 은영씨의 파란만장 인생 스토리

등록 2019.07.08 08:42수정 2019.07.08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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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6일과 18일 두 차례에 걸쳐 김은영(가명, 59)씨를 만났다. 처음 김은영씨를 만난 곳은 서울 중랑구에 위치한 그녀의 집이었다. 인터뷰에 대한 걱정과 기대 때문인지 반려견을 품에 안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엄마의 꼭두각시 인형으로 살다
    

태릉입구 인근의 카페에서 인터뷰 하는 김은영씨 ⓒ 문세경

 
"저희 엄마는 딸을 낳은 게 아니라 인형을 낳았어요."

은영씨의 어머니는 20살에 은영씨를 낳았다.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결혼하고 출산한 탓에 자신이 하지 못했던 것을 은영씨를 통해 해소하려 했다. 은영씨 밑으로 남동생이 두 명 있었지만 어머니의 관심은 은영씨에게만 있었다. 은영씨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어머니의 마음에 드는 옷을 입어야 했다. 액세서리도 마찬가지였다. 은영씨 의지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학창 시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학교가 끝나면 버스정류장에서 저를 기다리셨어요. 친구들과 놀고 싶었지만 매일 같이 기다리는 엄마 때문에 다른 곳으로 샐 수도 없었어요. 심지어 남자친구에게 연애편지를 쓸 때도 엄마가 불러주는 대로 썼어요."

은영씨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것처럼 살았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하루빨리 엄마에게서 독립해 자신의 인생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결혼'밖에 없었다. 대학 시절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가 있었다. 엄마는 그 사실을 알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결혼을 추진했다. 엄마는 군에 입대한 남자친구가 제대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고, 제대 후 한 달이 지나자마자 바로 결혼식을 올리게 했다. 은영씨의 나이 24살이었다.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남편은 무능력했고 학업을 이어간다며 돈을 벌지 않았다. 은영씨는 유치원 교사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남편과 얼굴 볼 시간이 적었던 탓에 부부 사이는 돈독하지 못했다. 그 사이 은영씨는 불임 판정을 받았다.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든 그때, 은영씨는 어쩌다 한 번씩 마주치는 남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설마 하던 그녀의 짐작은 이내 확신이 되었다. 남편의 몸은 은영씨와 있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엄마는 그때의 일(남편의 바람)도 저에게 문제가 있다는 듯 말했어요. '저 때문에 아버지와 이혼 위기까지 갔었다'고 하면서 말이죠. 저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결혼하라 해서 결혼한 건데. 당시에는 정말 억울했어요. 아버지도 그때의 일을 아시는 것 같았지만 말씀은 안 하세요."  

두 번째 결혼 "토끼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격"

결국 은영씨는 32살에 남편과 이혼했다. 그리고 곧바로 울산으로 내려갔다. 남편의 배신으로 입은 상처가 컸고, 엄마의 구속도 견디기 힘들었다. 울산에서 교회에 다니며 몸과 마음을 추스를 즈음 목사님이 은영씨에게 한 남자를 소개해 주었다. 낯선 외지에서 마음 둘 곳 없었던 은영씨는 6개월 만에 결혼을 했다. 두 번째 결혼이었지만 망설일 틈이 없었다. 
 

재혼한 남편은 결혼 초부터 은영씨에게 폭력을 가했다. 말다툼으로 시작한 싸움의 마지막은 남편의 폭력이었다. ⓒ pixabay

 
"첫 남편의 배신에다 엄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치듯 울산으로 내려갔다가 (목사님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났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토끼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난 격이네요. 두 번째 남편을 만나 꾸린 재혼 가정은 일반적인 재혼 가정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를 가지고 있었어요. 남편에게는 전처와의 사이에서 생긴 딸이 있었어요. 저는 아이를 못 낳으니까 딸이 있는 집안으로 결혼하는 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남자가 소위 '마마보이'였어요. 돈을 벌면 자기 엄마한테 다 갖다주고 저에게는 주지 않았죠.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도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제가 맏며느리인데 막내며느리의 갑질 심했고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시댁은 딸을 돌봐줄 '보모'가 필요했던 거고, 저는 남편이란 이름의 '남자'가 필요했던 거였어요. 서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만난 거였죠.

그럴 때마다 딸아이만 바라봤어요. 친엄마는 아니지만 따뜻하게 품었어요. 저와 딸아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가 돈독해졌어요. 그 아이를 처음 만난 게 9살 때였어요. 친 모녀처럼 의지하며 지냈는데 딸이 25살에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그때 얼마나 놀라고 슬펐는지 말로 다하지 못해요."


은영씨는 재혼한 남편의 딸을 성심껏 키웠다. 불임 때문에 더욱 아이에게 애착을 가졌다. 친엄마 이상으로 아이를 돌보자 아이도 은영씨에게 정을 주었다.

은영씨는 첫 결혼의 스트레스로 다낭성난소증후군이라는 진단과 함께 불임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재혼한 지 10년만인 43살에 갑자기 임신을 하게 되었다. 생각지도 않은 임신이었기에 놀랐고 믿어지지 않았다. 거기다 노산이었으니 걱정도 되었다. 하늘이 주신 선물이니 꼭 낳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과 시어머니는 은영씨의 임신을 축하해주지 않았다. 전처가 낳은 딸만 잘 키워주길 바랐지만, 은영씨는 소중한 생명을 지켜냈고 10달 후 아들을 낳았다.

"시댁에서는 저의 임신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배 속에 있을 때는 아들인지 딸인지 모르잖아요. 산달이 다 되어 가는데 출산 준비를 하나도 못 했어요. 남편이 돈을 안 갖다주니까. 애는 나올 때가 됐는데 기저귀 하나를 준비하지 못했어요. 아무것도 없었는데 교회 목사님하고 사모님이 어디서 기저귀를 얻어오셨어요. 그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그걸 받자마자 삶아서 널었어요. 기저귀가 바람에 펄럭거리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재혼한 남편은 결혼 초부터 은영씨에게 폭력을 가했다. 말다툼으로 시작한 싸움의 마지막은 남편의 폭력이었다. 

"술만 먹으면 그래요. 일주일에 다섯 번은 폭력을 썼어요. (허벅지를 보여주며) 여기 흉터 보이죠? 그릇을 던져서 이렇게 된 거예요. 이만큼이 벌어져서 꿰매야 하는 데 꿰맬 시기를 놓쳐서 꿰맬 수가 없대요. 그대로 아문 거죠. 이쪽(이마를 보여주며)도 여기저기 울퉁불퉁해요. 이게 다 맞아서 생긴 거예요. 갈비뼈도 부러져서 병원에 여러 번 입원했었고요. 도구를 쓰지 않으면 그나마 상처가 크지 않은데 어떨 때는 각목으로 때리고, 머리카락을 다 뽑기도 하고 그랬어요. 한 번은 남편이 사이다에 농약을 탔어요. 목을 졸라서 숨이 넘어가려고 하는데 아들이 말려서 살았어요. 

시어머니는 아들이 그런 것을 알면서도 저보고 참으라고만 했어요. 샘도 많았어요. 누구 병원 가면 본인도 병원 가서 누워야 하고, 친구들이 어디 놀러 가면 본인도 놀러 가야 하고. 제가 친정엄마한테 하도 당하고 살아서 시어머니한테만큼은 정붙이고 살려고 했는데, 시어머니는 자신의 욕구를 다 채우면 싹 돌변하는 타입이었어요." 

은영씨는 재혼한 남편의 폭력을 견디기 힘들어 여러 번 도망쳤다. 남편의 폭력을 피해 집을 나왔지만 보고 싶다는 딸아이의 전화를 받고 마음이 약해져 다시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은영씨는 딸이 사고로 죽은 후 더 악몽 같은 세월을 보냈다. 결국 6살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도망쳤다. 수소문 끝에 여성긴급전화 1366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전화를 걸었고, 센터의 도움으로 여성노숙인 자활쉼터인 '내일의 집'에서 지내게 됐다.

1년 후 남편은 어떻게 알았는지 내일의 집으로 찾아왔다. 아들은 다시 아빠에게 갔고 은영씨는 6개월 후 다시 울산으로 가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도망쳤다. 이후 은영씨는 남편의 폭력을 피해 도망쳤다가 잡히는 생활을 견디기 힘들어 이혼을 요구했다. 하지만 남편은 이혼을 해주지 않았다. 결국 위자료 한 푼 못 받고 아들의 양육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이혼을 했다. 그녀의 나이 51살이었다. 

"아이 아빠는 아들을 키운다고 해놓고 방치했어요. 오전에 일한다고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고. 들어와서는 술 마시고. 아이의 끼니를 술안주로 해결하곤 했어요. 아동학대였죠. 아빠가 없는 동안 아이는 개 한 마리와 혼자 지냈어요. (중략). 아들과 전화로 소식을 주고 받으면서 마음이 무너졌어요. 이혼 후에는 파출부로 일하면서 고시원에 살았어요. 아들을 하루빨리 데리고 오려고 악착같이 일했어요. 아들과 고시원에 살 순 없으니까요."

가정폭력 상담사, 새로운 꿈을 가지다 

은영씨는 고시원에 살면서 '매입임대주택'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신청해 입주했다. 당시 아들은 울산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5학년이 되자 혼자 은영씨를 찾아 서울로 왔다. 그때부터 은영씨와 남편 간 아이의 양육권 싸움이 시작되었다.

폭력 남편에게서 벗어나고자 이혼을 했지만 아이의 양육권을 갖지 못해 늘 전전긍긍하던 은영씨는 양육권 반환 소송을 했다. 은영씨의 안타까운 사연을 들은 지인은 아들의 양육권을 되찾는 데 도움을 줬다. 친부에게 아이 양육에 대한 어떤 도움도 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뤄졌다. 그제야 한시름 놓은 은영씨는 두 차례에 걸쳐 내일의 집에서 살았던 소회를 말했다.

"아들이 6살이었을 때 처음 내일의 집에 간 거예요. 몸이 많이 안 좋아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때였어요. 다른 엄마들이 돈 벌어와서 자기 아이들 맛있는 것 사 먹일 때 참 서럽고 미안하더라고요. 햄버거 같은 거 사 와서 자기 아이만 먹이고, 다른 아이들은 먹고 싶어서 쳐다보고. 한방에서 20~30명이 오글오글 싸우면서 살았어요. 아이들끼리 놀다가 싸우면 엄마들이 말리다가 (감정이 격해져) 또 싸워요. 저는 나이 들어서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힘에 부쳐서 싸우지 못하니까 숨어서 혼자 많이 울었어요. 새벽 일찍 일어나 밥해 먹고 청소하는 건 하나도 안 힘들었는데, 엄마들끼리 이간질하고 싸우는 건 정말 힘들었어요. 거기다 아이 양육권을 찾기 전이라 애 아빠가 아이를 언제 데리고 갈지 모르니까 불안감도 상당했어요."

비슷한 이유로 쉼터에 온 이들과 함께 사는 게 힘들었다던 은영씨는 그래도 쉼터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가정폭력으로 집을 나와서 갈 곳이 없으니 노숙하기 직전이었죠. 어디에 어떤 시설이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아이와 함께 갈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았어요. 힘든 일이 많았지만 내일의 집은 저를 내 집 이상으로 품어준 곳이에요."

그러나 쉼터는 임시거처이기 때문에 아이와 함께 오랫동안 머무를 수 없다. 쉼터에 있는 동안 엄마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립의 기반을 마련해야 했다. 이 때문에 아이들은 쉽게 방치됐다. 모든 엄마들의 걱정은 아이들이 시설에 남아 방치되는 것이라고 했다. 남편의 폭력을 피해 시설에 왔지만 또 다른 숙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망가진 몸과 마음의 치유가 필요했던 은영씨는 쉼터 생활을 하면서 1주일에 한 번씩 상담을 받았다. 

"친정엄마에게 받은 학대와 아바타처럼 산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싶었어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고 싶었어요. 상담사에게 엄마 이야기부터 했어요. '나는 엄마가 만든 인형이었고 엄마는 나를 통해 대리만족하며 살았다'고 말했어요. 상담하면서 많이 울었어요. 상담사는 듣기만 했어요. 그렇게 진통의 시간을 겪고 나니까 엄마에 대해서 몰랐던 것이 보이고 엄마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나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어요.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살았을 때는 나 자신을 몰랐는데 상담을 하면서 내가 나아갈 방향이 보이고 아이와 살아갈 방법을 찾게 되었어요."

은영씨는 현재 매입임대주택에서 아이의 양육권 찾을 때 도움을 받았던 분과 함께 살고 있다. 은영씨에겐 남편이, 아들에겐 새 아빠가 생긴 것이다. 
 

평범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룬 그녀에게 행복한 일들이 가득하기를 바라본다. ⓒ pixabay

 
"제가 43살에 아들을 낳았으니 늦둥이나 다름없잖아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저하고 잠깐 살다가 시댁에 아이를 빼앗겼었어요. 양육권을 완전히 되찾아 온 시기가 아들이 5학년 때예요. 양육권 찾을 때 도움을 준 분과 연이 닿아서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저에겐 남편이, 아들에겐 새 아빠가 생겼어요. 저희 세 식구는 지금 5년째 함께 살고 있어요. 그동안 우리 세 식구 정말 몸부림 치며 살았네요. 

몸이 안 좋지만 지금도 식당에서 하루에 5시간씩 일하고 있어요. 나이 50이 넘으면 일할 곳이 없어요. 그렇게 일을 해야 누구한테 의지하지 않고 아들에게 필요한 것을 해줄 수 있어요. 그래야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자립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다행히 새 아빠가 재택근무를 하면서 저의 빈 자리를 채워줬어요.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아들도 덜 외로웠고요.

원래는 유아교육학과를 나왔는데 방송대학교 교육학과에 다시 들어갔어요. 성폭력 상담교육 과정과 가정폭력 상담교육 과정을 이수했어요. 가정폭력 상담사가 되고 싶어서요. 사회복지 공부도 시작했는데 몸도 아프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중단했어요. 교육학 공부는 꼭 마칠 거예요. 졸업 논문 주제도 벌써 생각해놨어요. '쉼터, 그 후.' 저의 경험을 담아 쉼터 이후 자립을 위해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 쓰고 싶어요.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이 가정 폭력의 아픔이 있는 엄마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얘기했어요. 부끄러운 얘기는 아니지만 유쾌한 얘기도 아니기 때문에 꺼내기가 쉽지 않았고, 솔직히 말해서 힘들었어요. 노숙하기 직전까지 갔다가 쉼터를 만나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고, 아픔을 보듬어 주는 사람을 만나 살고 있기 때문에 참고 이야기했어요."

시종일관 담담한 모습으로 인터뷰에 응해준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겸손하게 손사래를 치며 빗길을 걸어가는 그녀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남은 삶은 부디 행복하기를 바란다.  

[기획 / '보이지 않는' 여성 홈리스의 이야기]
① 폭력 아빠와 새엄마 피해 거리로... 여성 홈리스의 고백http://omn.kr/1jdsi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종교계노숙인지원민관협력네트워크>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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