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중반에 얻은 새 직장, 이건 예상 못했다

마지막 관문 건강검진, 돌보지 못한 내 몸을 마주하다

등록 2019.07.01 13:42수정 2019.07.01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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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중반에 새 직장을 얻었다. 오, 어떻게 이런 일이. 나의 조상님 중에도 나라를 구한 우국지사가 계셨던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엄혹한 시절에 취업이라니. 그것도 퇴직해야 마땅한 오십 중반의 중늙은이가. 그런데 입사를 확정 짓기 전에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 하나 남아 있었다.


지금의 내 건강상태가 앞으로의 일과 상황을 견뎌낼 만큼 튼튼한지 알아보는 일이었다. 그 흔한 신체검사 말이다. 겉으로만 보면 난 멀쩡하다. 어디 아픈 구석도 없다. 가족력도 특별한 게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딘가 찝찝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몸 어딘가가 고장 나 있다면, 가령 피가 불순하다든가 오줌에 뭐가 섞여 나오기라도 하면, 그래서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불합격 판정을 받기라도 하면, 어렵사리 성공한 취업은 그냥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불안했다.
 

새로 만든 사원증 이거 한 장 손에 쥐려 너무 오래 돌고 돌았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젊은 친구들에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나도 살아야 했다. ⓒ 이상구

 
야인으로 지내던 지난 8년 동안 건강검진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나라에서 공짜로 해준다는데도 나는 일부러 거부했다. 무서워서 그랬다. 불규칙한 생활, 넘치는 스트레스, 과도한 음주와 흡연 등 내 몸뚱이는 암 같은 질병이 도사리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어딘가 탈이 났다 해도 뭐 하나 이상할 게 없었다. 몸 속 구석구석까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는 분명 고장이 나 있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무턱대고 건강검진 받았다가 덜커덕 '암' 같은 질병 판정이라도 받는다면 어쩔 텐가.

병이 무서운 게 아니었다. 그 이후에 벌어질 일련의 상황들이 두려웠다. 변변한 직장도 없는 데다 모아 놓은 돈도 없다. 두어 개 있던 보험도 몇 년 전 다 깼다. 그런데 수술? 무슨 돈으로? 빚내서 수술한다 치자. 누가 날 돌봐줄 건가.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는 큰 수술 받으시고 지금 회복 중이다.

다른 가족은 없다. 그러니 건강검진→질병진단→수술→회복의 단계를 정상적으로 밟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모든 걸 하늘에 맡긴 채 여기까지 온 거다. 그저 아무 일 없기만 바라면서 지금껏 스스로를 방치했던 거다.


그러니 지금 내 속이 어떤 상태인지는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폐나 간에 이상이 없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노릇이었다. 다른 데서 미리 검사 한 번 하고 어디 이상 있으면 급한 대로 약 좀 먹고 다시 볼까, 그런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모든 걸 하늘에 맡기고 일단 검사를 받아야 했다. 가까운 병원에 예약을 하려고 전화를 했다. 예약은 따로 받지 않고 8시간 금식하고 다음날 아침에 병원 검사장으로 바로 오면 된다고 했다.

신체검사 따위를 두려워 한 진짜 이유는

8시간이나 금식하라고? 사실 그건 야식 같은 건 먹지 말라는 얘기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 8이라는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크게 느껴졌다. 마치 며칠은 굶으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참 별 게 다 신경 쓰였다. 초저녁에 밥 먹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쉬 잠이 올 리 만무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감은 강박으로 바뀌었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진작 건강에 신경 좀 쓸 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어떻게 잠깐 잠이 들었다. 결과지에 시뻘건 글씨로 '불합격' 도장이 찍히는 꿈까지 꿨다. 아침에 일어나 비몽사몽간에 낯만 씻고 병원으로 행했다. 접수를 하고 제일 먼저 키와 몸무게를 쟀다.

근데 이게 웬 일? 키는 1cm가 줄었고 몸무게는 3kg이 늘었다. 나이 들면 그런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간호사께 재측정을 요청했다. 간호사께서는 '별 이상한' 하는 표정으로 다시 재 줬다.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그게 지금의 나였다. 아, 세월의 무상함이여.

가슴둘레를 쟀다. 숨을 한껏 들이마셔 가슴을 최대한 부풀렸다. 그래봤자였다. 새가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혈압도 쟀다. 정상과 초기 고혈압의 경계였다. 약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다음은 청력 측정이었다. 몇 년 전부터 이명기가 있긴 했지만 듣는 덴 지장이 없었다. 결과도 예상과 같았다. 그 다음은 시력이었다. 숫자와 원의 터진 방향, 새며 강아지 같은 그림을 잘 맞추었다고 생각했는데, 간호사께서는 말 해주지도 않고 그냥 좌 0.9, 우 1.2로 써 버렸다. 한창 때 양쪽 다 1.5였는데, 눈조차 많이 늙었다.

드디어 내가 제일 우려했던 폐와 간의 건강상태를 검사하는 차례였다. 가슴 엑스레이를 찍었다. 소변을 받고 따끔하게 피를 뽑아 샘플을 제출했다. 긴장감에 혓바닥이 말랐다. 요즘은 소변과 피만 잘 살펴도 무슨 병이 있는지 대충 알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신장이나 간의 상태는 바로 다 나온다고 했다. 그동안 그 중요한 장기들을 혹사시켜온 나로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의사선생님과 간단한 문진을 하고 치아도 들여다봤다. 결과는 2~3일 후에야 나온다고 했다.
 

신체검사 결과지 합격 도장의 파아란 잉크가 선명하다. 이 한마디 때문에 몇 날을 고민해야 했다. ⓒ 이상구

 
초조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이틀 째 되던 날 결과가 나왔다는 전화를 받았다. 미리 부탁했더니 조금 서둘러 주신 거였다. 병원에 가 결과지를 받았다. 얼른 꺼내 보았다. 모든 검사항목이 '정상'이었다. 서류 하단엔 파아란 잉크로 '합격'이라는 스템프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 모진 세월, 무차별적 자살테러를 묵묵히 견뎌준 폐, 간, 소화기 등등이 고마웠다. 충직한 그들 덕분에 나는 다음 주부터 새로 생긴 일터로 갈 수 있게 됐다. 이 어찌 감격스럽지 않을 손가.

다시 말하지만 세세하게 들여다보는 건강검진이 아니라 그냥 설렁설렁 보는 신체검사였다. 그런데도 그 결과를 받아 들고는 눈물이라도 쏟을 듯 감격해 하는 모습을 남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별 꼴 다보겠다며 혀를 찰지도 모를 일이다. 가관도 저런 가관이 없다 할 게다. 그러나 당사자인 나는 그렇지 않다.

검사 전엔 정말 심각했고, 무사히 끝내고 난 후엔 더 없이 마음이 놓였다. 단순히 아직까진 건강하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기뻤다. 아직은 내가 이 사회에 쓸모가 남아 있음을 확인해서 행복한 거였다. 게다가 그 일과 사회적 쓸모는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더 그랬다.
#신체검사 #재취업 #나이오십 #쓸모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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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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