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발급하러 갔다 알게 된 아빠의 뜻밖의 과거

[나를 붙잡은 말들] 40년 전 "허허벌판 뚫고 사막에 배관 심는 일 했다"는 아빠

등록 2019.07.04 18:34수정 2019.07.04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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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나를 붙잡은 말들'은 프리랜스 아나운서 임희정씨가 쓰는 '노동으로 나를 길러내신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친구가 베트남에 같이 가자고 하는데 엄마랑 갔다 올까 한다."
 

일흔이 넘은 아빠는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일흔을 바라보는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이 비행기를 타본 것은 4년 전 가족 제주도 여행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베트남도 일본도 유럽여행도 다녀온 나는 항상 부모님을 모시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이 남겨둔 숙제이자 꼭 해드리고 싶은 일종의 효도 관문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통과해야 진짜 효녀가 될 것 같았다. 혼자 혹은 친구와 해외여행을 다닐 때마다 마음 한 모퉁이가 죄스러웠다.


하지만 그 마음은 잠시였을 뿐 내가 자식일 동안 매번 부모는 밀려났다. 엄마와 아빠는 항상 딸이 먼저였는데 자식은 언제나 자신이 먼저였다.

아빠에게 하지 못한 말
 

아빠의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 베트남에 가자고 하셨다. 모임에서 패키지 여행을 예약했는데 한 부부가 갑자기 못 가게 됐다며, 거의 공짜이니 몸만 오라고 했단다. 아빠는 나에게 전화해 허락을 구했다. 나는 항상 여행 갈 때 내 마음대로 떠났는데. 하긴 처음 해 보는 일에는 누군가의 부추김이 필요할 때도 있다.

"아빠, 잘 됐네! 엄마랑 다녀오세요! 내가 용돈 보내드릴게요. 언제 출발한대요?"
"내일모레 간다드라. 엄마랑 갔다 올까나?"


내일모레. 나는 순간 다음 대답을 잇지 못했다. 부모님의 여권이 없는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빠의 목소리가 조금 들떠 보였고 나는 그 들뜸을 가라앉게 하고 싶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여권 발급받으려면 며칠 걸리지? 놀러가는 것도 긴급 당일 여권 발급이 가능한가? 어떻게서든 이 여행을 가능하게 할 방법을 찾아 "네!"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빠. 생각해 보니 베트남 가려면 여권이 필요한데 그거 발급받으려면 4, 5일 정도 걸려요. 이번엔 날짜가 너무 촉박해서 못 갈 것 같아요."
"여권이 뭐냐?"
 

나는 아빠에게 여권에 대한 설명보다 베트남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었다.


'아빠. 베트남은 비행기를 타고 5시간이 조금 넘게 걸려요. 비행기 안에서 밥 주니까 도시락 안 싸가도 돼요. 많이 더운 나라니까 건강 조심하시고요. 제가 집 앞에서 사드린 쌀국수가 베트남 음식이에요. 맛있었죠? 꼭 맛보고 오세요. 아빠는 절경 보는 거 좋아하시니까 배를 타고 하롱베이도 다녀오시고요...'

이 긴 설명은 여권 앞에 모두 생략됐다. 나는 또 죄스러웠다. 해외여행 한 번 못 보내드린 것이. 여권 하나 미리 챙겨 만들어 드리지 못한 것이. 더 나은 자식이 못 된 것이 모두 죄송스러웠다.

며칠 후 부모님을 모시고 집 근처 사진관에 갔다. 올해 안에는 꼭 해외여행을 보내드려야지 다짐하며 여권 사진을 찍으러 갔다. 사진사에게 부모님 여권 사진을 찍으러 왔다고 말하니 딸이 효녀라며, 여름휴가 보내드리려고 하냐고 물었다. 아직 예매하지 않은 비행기 티켓을 손에 들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부모님 손에 꼭 쥐어 드리리라 마음먹었다.

정갈하게 머리를 빗고, 하얀 배경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경직된 표정으로 사진을 찍은 엄마와 아빠. 엄마는 이 사진으로 여행을 가는 거냐 묻고, 아빠는 이게 있어야 여행을 간다 대답했다. 나는 내가 돈을 많이 벌어야 두 분이 편하게 여행을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른두 살의 아빠와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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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찾아 시청에 갔다. 엄마와 아빠의 이름 영문철자를 찾아가며 여권발급신청서를 작성해 신분증을 제출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이어서 들려온 직원의 한 마디가 나는 너무나 놀라웠다.

"아버님은 1979년도에 여권을 만드셨네요?"

여권이 없는 줄 알았던 아빠가, 해외여행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아빠가 여권을 만든 적이 있다니. 40년 전. 아빠는 어디를 다녀오셨던 걸까.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79년, 아빠의 나이 서른 둘. 아빠는 여권을 들고 비행기를 타고 어디를 갔던 것일까.

"아빠! 79년도에 해외 어디 갔었어?"
"응? 해외 안 갔는데... 79년? 아... 그때! 맞다! 그, 사우디 갔었다 사우디! 일하러!"


아빠는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사우디'라고 말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이름도 낯선 곳. 나도 그저 더운 나라 혹은 세계최대의 산유국이라고만 알고 있는 나라. 아빠는 그곳에 일을 하러, 서른 둘의 나이에 일을 하러 갔다.

"허허벌판 뚫고 사막에 배관 심는 일했지. 까마득한 옛날이다. 돈 벌라고 갔지. 일 년 반 있다가 너무 덥고 힘들어서 왔는데 그때 조금만 더 참고 일했으면 돈 많이 벌었을 것인디..."

1970년대. 한국의 건설산업이 중동 진출을 본격화했다던 그때. 아빠는 그때도 건설노동자였구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건설노동자였구나. 40년 전 이역만리 그 낯선 사막에 아빠는 배관을 심고 왔구나. 지금의 나보다도 어린 나이에 아빠는 돈을 벌러 사우디에 갔구나.

여권을 만들러 갔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아빠의 젊은 시절 노동이 나는 믿기지 않았고 믿을 수 없었다. 1979년 여름. 공사현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던 서른 두 살 아빠에게 누군가 말했겠지. 그곳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조금만 고생하면 돈 많이 벌어 돌아올 수 있다고.

그 희망으로 아빠는 누군가 만들어 준 여권을 들고 비행기를 타고 사우디에 가 사막 위에 발을 겨우 딛고 땀을 많이 흘렸을 것이다. 혹시 여기보다 아주 많이 더운 나라라고. 훨씬 더 많은 땀을 흘려야 한다고도 함께 알려주었을까?

그 시절 아빠에게 돈은 그런 것이었다. 나라도, 언어도, 더위도, 고생도 초월할 수 있는 것. 궁하고 부족해 삶에 맨 앞에 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 그것은 해외 출장도 파견도 아닌 생을 위한 여정 같은 것이었다. 흑백 텔레비전에서 나올 법한 옛날 뉴스 속에 우리 아빠가 있었다니.

이 까마득한 이야기가 4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아빠와 내 앞에 이렇게 새어 나오다니. 멀고 아득하더라도 어딘가 살짝 건드리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듯 훅 하고 피어오르는 게 옛 기억인가 보다. 40년 전 그 일이 '여권'이라는 한 단어로 인해, 4분만에 우리 앞에 펼쳐져 버렸다.

더는 아빠를 미뤄두지 않을게요

부모님의 여권을 신청하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부모의 시간들은 이렇게 종이 하나에도 스며들어 있구나. 내가 모르는 생의 이야기들은 얼마나 치열하고 억척스러웠을까. 사우디아라비아라는 나라 이름처럼 얼마나 길고 낯설고 가늠할 수 없었을까. 나는 과연 어떤 시간들을 통과해 길러진 것일까.

그것들을 생각하니 여행이라는 기회에서 부모를 한없이 미뤄두었던 내가 자꾸만 자꾸만 부끄러워졌다. 주름진 아빠와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빠, 베트남에 가요. 일본도 가고 유럽여행도 가요. 여권 챙겨서 엄마랑 같이 가요. 제가 모시고 갈게요. 돈도 열심히 모으고 계획도 짤게요. 이젠 미루지 않을게요. 그동안 너무 미뤘으니까 이젠 저보다 아빠와 엄마를 앞에 둘게요. 노력할게요.'

내가 내 손을 꼭 쥔 채로 다짐하고, 다짐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www.brunch.co.kr/hjl0520)에도 실립니다.
#아빠 #노동 #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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