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느리게 해서 다 불편하잖아" 이 말이 가져온 후폭풍

[쓸고 닦으면 보이는 세상 5] '천천히' 일할 권리

등록 2019.07.09 09:14수정 2019.07.17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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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제외한 여자 미화원 네 분은 모두 나보다 열 살 정도 나이가 많다. 그래도 호칭은 '언니'다. 처음 일을 배우기 위해 언니들을 따라다닐 때 그분들은 내게 말을 별로 해주지 않았다. 모든 것을 몸으로 보여주면서 가끔 몇 마디를 덧붙였다.


쓰레기통 비우기는 왜 마지막이 아니라 처음에 해야 하는지, 변기보다 세면대를 먼저 닦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청소를 해나가는 동선은 왜 그렇게 정해졌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아마 그분들도 처음 아트센터에 왔을 때 그렇게 배웠을 것이다. 모두들 그렇게 해왔고, 해온 방식을 그대로 따랐으니, 신입인 나도 그대로만 하면 된다고 가르쳐준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조용히 가르쳐준 규칙은 상당히 세밀하고 단단했다. 일에 관해 굳어진 규칙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일과 상관없이 개인의 취향으로 선택하거나 그때 그때의 사정에 따라 조금씩 변경할 수 있는 사항들도 모두 당연한 듯 일체화 되어 있다는 게 놀라웠다.

"네가 일을 느리게 해서 다 불편해 하잖아"
 

내가 맡은 구역의 청소를 7시에서 10시까지 끝내려면 정신없이 몰아쳐야 된다. ⓒ Pixabay


일 시작 전에는 따뜻한 커피나 차를 마시기, 전기밥솥의 취사 버튼은 절대 미리 눌러서는 안 되며 반드시 정해진 시각에 누르기, 점심 식사 후 15분을 앉아 있다가 낮잠을 자기, 낮잠 잘 때 전등은 끄지만 텔레비전은 켜놓기, 낮잠 후에는 커피를 한 잔씩 마시기, 오후 일과가 끝난 후 휴식시간에는 눕지 않기, 반드시 퇴근 5분 전에 동시에 일어나 옷을 갈아입기 등등 더 많은 예가 있으나 이쯤에서 줄인다.

물론 강압적이진 않았으나 언니들의 태도는 마치 미화원이라면 모두들 이래야 마땅하다는 식이었다. 가장 곤란한 점은 일을 '빨리' 해야 한다는 규칙이었다. 나는 일의 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여러 번 지적을 당했다.


특히 K언니는 힘이 좋고 일 욕심이 많은 베테랑 청소 경력자여서 내가 일하는 방식을 곱게 보지 않았다. 나는 꼼꼼하고 차분하게 일을 하고 싶었다. 문지르거나 닦는 동작을 급하게 하다보면 인대나 관절이 상한다.

유리를 빠르게 닦다가 어깨를 삐끗한 적이 몇 번 있었고, 성급하게 닦으면 놓치는 부분도 생기기에 나는 청소할 때 모든 동작을 침착하고 차분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나의 그런 동작은 언니들의 눈에 거슬렸다. 이제까지 그들이 보아왔고 해왔던 미화원들의 몸동작과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일을 빨리 해야 하는 타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협동 작업의 경우 내 속도가 느리면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해야 하므로 피해를 줄 수 있다. 하지만 각자 청소 구역이 나뉘어져 있고 업무시간도 정해져 있는데, 그 시간 안에 내 구역을 내게 맞는 속도대로 찬찬히 청소해 나가는 게 왜 문제가 되는지 알 수 없었다.

회사에서 정해 놓은 점심시간은 11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 한 시간이고 그 외에 다른 '룰'은 없다. 하지만 여자 미화원끼리는 10시 전에 오전 일을 끝내고 일제히 미화방에 내려와 점심식사 전 30분 동안 텔레비전을 보며 쉬다가 10시 30분이 되면 정확히 밥상을 차려서 먹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이러한 룰을 누구에게도 의무사항으로 들은 적이 없다. 언니들은 모두 말없이 몸으로 보여주면서 너도 그대로만 따르라는 뜻을 전달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맡은 구역의 청소를 7시에서 10시까지 끝내려면 정신없이 몰아쳐야 된다.

먼저 여기 저기 놓인 쓰레기통들을 비우고 정리한다. 전시물과 출입문과 벽체를 합쳐서 15짝 정도의 유리를 안팎으로 문질러 닦는다. 출입문 바닥을 청소한다. 아트센터에서 가장 넓은 로비와 로비로 통하는 계단 두 군데를 밀대로 밀고 대걸레로 닦는다.

로비에 놓인 의자의 먼지를 털어준다. 로비를 둘러싼 벽체의 창틀 아래와 위를 모두 닦으며 먼지와 벌레를 제거한다. 화장실을 칸칸이 확인하며 쓰레기를 버리고 화장지를 갈아주고 단정하게 정리한다.

거울을 말끔히 닦고 세면대 7개와 변기 20개를 일일이 세제를 묻혀 스펀지로 문질러 닦은 다음 다시 마른 걸레로 물기 없이 마무리한다. 화장실 바닥은 밀어서 먼지를 제거하고 물걸레로 닦는다. 물론 막힌 변기가 있으면 뚫어주고 때때로 물비누도 보충해 준다.

이 모든 일을 3시간 내에 한 사람이 하려면 정말 미친 사람처럼 움직이거나 아니면 대충 해야 한다. 나는 대충 하기도 싫었고 미친 사람처럼 몰아치기도 싫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차분히 점검하면서 해야 할 일은 정확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점심시간만 맞추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언니들은 30분 늦게 내려오는 내가 불편하다고 했다. K언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일을 느리게 하기 때문에 언니들이 다 불편해 하잖아. 너 그런 식으로 하면 어딜 가도 왕따 당한다. 여기는 여기의 룰이 있어."

오전근무를 10시에 끝내기로 한 것은 어떻게 룰이 되었을까? 근무시간이 넉넉한데도 일을 몰아서 빨리 해놓고 쉬어야 한다는 룰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과연 그 룰은 미화원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모두의 의견을 수렴하여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면 과거에 말빨이 셌던 어떤 분이 하자는 대로 따르면서 그냥 굳어진 것일까? 한 언니는 오전 일과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올 때마다 힘들어서 기진맥진한다. 세게 빨리 닦느라고 어깨가 아프다고 하소연 한다. 또 다른 언니는 전에 같이 일하던 다른 미화원을 회상하며 이런 얘기를 했다.

"나 그 언니랑 같이 일할 때 힘들어 죽는 줄 알았잖아. 그 언니는 바닥이 깨끗한데도 꼭 밀고 닦으라는 거야. 그 언니 따라 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내 마음을 답답하게 만드는 이런 태도는 어쩌면 언니들이 살면서 터득한 나름의 지혜였는지 모른다. 말이 안 통하는 남편, 꼬장꼬장한 시어머니, 직장의 경직된 상사들, 여기저기서 당하게 되는 갑질을 겪으면서 그저 문제만 일으키지 않고 넘어가는 법을 배워온 것 같다. 그러니 소위 기가 세고 카리스마가 있는 누군가가 '이렇게 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면 그대로 따라하는 데에 익숙해진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나도 언니들에게 지적을 당하고 나니 극장 내부 청소와 같은 공동 작업을 할 때에는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혹시나 속도에서 뒤처질까 조바심을 내게 되었다. 자연스레 경쟁심이 생겼다. 언니들보다 일을 더 많이 더 빨리 해내겠다는 강박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경쟁은 일의 본질을 흐린다. 극장에 들어오는 관객들에게 먼지 없는 객석과 말끔한 바닥을 선사하겠다는 서비스 정신 같은 건 들어설 틈이 없다. 그저 나의 걸레질이 스쳐간 객석 수가 가장 많아야 한다는 압박뿐이다. '쟤 또 저렇게 느려 터졌네'라는 소리는 절대 듣고 싶지 않았다.

많은 노동자들이 속도에 쫓겨 일을 하다가 사고를 당하고 죽음을 당한다. 공사기간을 단축하고, 두 명이 할 일을 한 명이 하다 보니 시간에 쫓기고 과중한 작업량에 치여 다치고 쓰러지고 죽는다.

빠른 노동은 사람을 아프게 하고 세상을 병들게 한다
 

'내가 왜 무조건 빨리 해야 되지? 난 천천히 일할 권리가 있어'라고 스스로를 격려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Pixabay

 
산업혁명 이후 노동의 속도는 생산량과 직결되어 높이 평가되어 왔다. 빠르게 일한다는 건 숙련되었다는 뜻이고 일 잘한다는 말과 동의어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패러다임을 가져올 때도 되지 않았을까? 빠른 속도는 사람을 아프게 하고 세상을 병들게 한다. 빨리 해서 좋은 건 아무리 생각해도 화장실에서 큰 볼일 보는 것밖엔 없는 것 같다.

상대를 배려한다면 결코 '빨리 빨리' 하라고 다그칠 수 없다. 길이 막혀 늦는다는 친구에게 '서두르지 말고 조심해서 와'라고 말할 때, 걸음마가 서툰 아기에게 '천천히 가자'라고 말할 때, 함께 밥상에 앉은 사람에게 '천천히 많이 먹어'라고 말할 때, 그건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다. '천천히'는 단연코 사랑의 언어다.

이 사랑의 언어를 나는 언니들이 언니들 자신에게 먼저 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왜 무조건 빨리 해야 되지? 난 천천히 일할 권리가 있어'라고 스스로를 격려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육십 대 언니들이 막내인 나를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서 '일이 느리니 빨리 해라'는 지적을 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이제까지 그런 식으로 해왔으니 누구나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 것뿐이다. 주어진 대로, 시키는 대로, 정해진 대로 따랐을 뿐이다.

속도를 찬양하는 이 미친 세상의 믿음에 대해 따지거나 질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순종은 미덕인가 악덕인가.
#속도가 아니라 방향 #빨리빨리 #미화원 #천천히 #사랑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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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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