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식비 만원, 극단적 소비의 이유

[최소한의 소비 20] 행복은 '다운사이징'에도 있다

등록 2019.07.12 09:01수정 2019.07.12 09:01
4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주말, 만 원짜리 마트 상품권 한 장을 달랑 들고 대형마트로 갔다. '이걸 사야 절약'인 듯한 탐나는 상품들이 즐비한 (그러나 결국 예쁜 쓰레기가 되는) 대형마트에서 겨우 '한 장'으로 맞서는 중이다.


길에서 만 원을 주웠다던가, 만 원의 행복 방송을 찍는다던가 등, 특별한 사연이 있어 적은 돈을 들고 간 건 아니다. 4인 가족인 우리집은 5월 중순부터 하루 식비를 만 원으로 제한하고 있다. 

그날도 필요한 것은 우유, 탄산수, 그리고 벽에 걸 고리뿐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빵을 먹고 싶다고 했다. 필수품 사이에 사치품이 끼어들었다. 자연히 만 원 살림에 제동이 걸렸다.

"만 원 안에 되면 사고, 안 되면 참자."
"왜?"
"디저트는 집에 치즈도, 푸딩도, 과자도 있는데, 빵을 또 살 필요는 없잖아."


티격태격 했지만 다행히 벽에 걸 고리는 1500원이었다. 예상보다 저렴했다. 덕분에 30% 세일하는 크로와상을 사고도 거스름돈 300원을 남겼다. 운이 좋아 이번에는 무탈히 쇼핑을 마쳤다.
 

대형마트에서의 쇼핑, 필요한 물건만 산다. ⓒ pixabay

 
하지만 '먹고 싶은 건 사먹자'는 남편과 '딱 예산만큼만' 지출해야 한다는 나는 시시때때로 부딪쳤다. 우리는 빵뿐만 아니라 고기, 때로는 맥주와 와인, 다른 날에는 블루베리를 두고 논쟁했다. 30대 남성의 왕성한 식욕을 꺾을 도리가 없을 때는 지갑을 열었다. 때로는 절약해야 마음 편하다는 내 고집이 확고한 날, 남편은 집었던 요거트를 내려놓기도 했다.

남편 입장에선 빵 한 조각 사먹을 때도 동의를 구하게 되는, 참으로 불편하고 이해불능 아내다. 빚을 진 것도 아니고, 생활비가 모자란 것도 아니다. 남편은 고작 빵이 먹고 싶을 뿐인데, 난 왜 이렇게 극단적으로 절약하는 걸까?


남편에게 내세우는 이유는 '절약 훈련'이다. 절약 훈련은 적은 돈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한 연습이다. 소비 충동에 길들여지면, 돈이 떨어질 즈음 인생은 불행해질 것이다. 한우도 사 먹어야 하고, 해외 여행도 가야 즐거울 수 있다면, 돈이 없을 때 당황스럽지 않을까? 그러니 돈 덜 쓰고도 만족스럽게 사는 법을 익혀, 우리 삶이 돈에 발목 잡히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런데 말하지 않았던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이 은밀한 사연은 남들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비롯됐다. 처음부터 큰 집, 고급 차, 넉넉한 옷, 가득 찬 냉장고에 대한 계획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남들보다 더 잘 살고 싶어 맹렬하게 달려왔다. 그 시작은 학교였다. 

돈에 발목 잡히지 않으려는 삶의 시작

중학생 때부터 1년에 네 번 성적표에는 등수가 찍혔다. 몇 명 중 몇 등이란 단순하기 짝이 없는 정보였지만, 경쟁은 공부를 촉진하는 강력한 자극제였다. 공부를 좋아하긴 했지만, 순수한 흥미 이상으로 몰입했다. 

앎의 기쁨보다 승리의 기쁨, 때로는 열패감으로 맹렬히 교과서와 문제지를 파고 들었다. 그렇게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거친 후 성적표를 받아들면, 등수는 항상 한 자리 숫자였다. '나는 이겼다!' 자기 만족 이상의 희열을 느꼈다.

그 결과 원하던 대학교도 1등으로 입학하고, 졸업생 대표로 졸업했다. 그런데 그렇게 원하던 '상위 서열'이었건만, 하나도 멋있지 않았다. 10대의 기억은 오직 책뿐이고, 청춘 또한 학점의 노예였다. 오랜 기간 준비해서 얻어낸 뉴질랜드 교환학생 기회도, 결국 취업에 유리한 토익 공부를 한다며 포기했다. 진짜 영어 공부를 하기보다 성적표를 위한 공부. 딱 그만큼의 인간이었다, 나는.

남자 친구와 데이트 시간마저 시험과 과제에 집착하며 종종거렸다. 그와 사귄 지 100일, 1000일을 기념하던 날에도 4시간 동안 열람실 의자에 앉혀 놓았다. '시험기간에 무슨 데이트야? 같이 공부하자'라고 하면서. 단호한 여자친구 옆에서 딱딱한 열람실 의자를 견디지 못한 그는 결국 전기뱀장어처럼 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그랬던 그는 요즘 하루 만 원 안에서 빵을 먹고 싶어 몸부림친다).

높은 성적이라 화려해 보이지만, 돌이켜보면 그 세월은 아름답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죽이는 것보다야 나을 수 있겠지만, 그정도 열정과 의지라면 더 즐거운 도전들을 해 볼 법도 했다. 공부하는 기계, 승부욕의 화신. 지기 싫어하는 내 마음은, 오직 성적으로만 나를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낮은 자존감의 상징이었다.
  
황유미 작가의 소설, <피구왕 서영>에는 현지와 윤정이 나온다. 현지의 부모님은 모두 의사고, 잘 생긴 오빠도 있다. 그리고 54평대의 아파트인 현지네에서는 여유의 냄새가 난다.

고용된 가사 도우미가 하교한 현지와 친구들에게 갓 구은 과자를 내고, 아이들은 넓게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따끈한 과자를 나눠 먹던 11살 아이들 머릿속에 서열이 나뉜다. 겉보기엔 편안해 보이지만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었다.

반면, 윤정이는 낡은 주택에 산다. 자기 주관이 강하고 부당한 일에 굽히는 일이 없어 현지네 무리에게 공공연한 따돌림을 당한다. 하지만 주인공 서영이는 윤정이의 집에서 숲의 향기를 맡는다.

윤정이의 방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헌책방에서 공수해 온 낡은 책으로 가득했다. 이 공간에서 두 아이는 '누가 더 잘 사는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할 틈도 없이 책 수다를 떨며 웃는다.
 
오래된 책에서 나는 나무 냄새 때문인지 윤정의 방에서는 숲의 향기가 났다. 현지네 집에서 맡은 여유의 냄새와는 다른 종류의 좋은 냄새였다. 현지네 집에서 맡은 냄새가 편안하지만 열등감을 자극한다면, 윤정의 방에서 나는 숲의 향기는 어딘가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아 무방비로 마음을 내려놓게 되는 그런 냄새였다.
- <피구왕 서영> 중, 황유미 지음.
   
행복은 '다운사이징'에도 있다

학교를 졸업했지만, 여전히 학생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가 많다. 나는 차종(車種)에 해박한 편이다. 여름 휴가철만 되면 내가 살고 있는 강원도 동해시에는 외제차들이 물밀듯 넘쳐난다. 차의 크기와 뒷태만 봐도 외제차 이름을 줄줄 읊는다. 엔진 구동계에 관심도 없으면서 왜일까? 난 도로 위에서조차, 뭐가 '더' 좋은 차인지 등수를 매기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절약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고급 대형 외제차와 신축 브랜드 34평 아파트에 입주하고 싶어서였다. 부지런히 돈을 모아 가진 것들을 업그레이드 하는 게 유일한 정답인 줄 알았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먼 훗날 넉넉하게 살기 위해 현재의 살림을 줄여야 했다. 그래야 저축할 돈이 생기니까 말이다.

불필요한 물건을 비운 후 사치품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삶은 점점 단순해졌다. 화려한 미래를 위해 시작했건만, 오히려 큰 돈 안 드는 현재의 삶이 만족스러워졌다.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업그레이드'뿐만 아니라 '다운사이징'에도 있음을 깨달아갔다.

​일상 곳곳에서 승패를 가르며 살았던 탓일까. 내면에는 소설 속 윤정이를 동경했다. 열등감을 자극하는 여유의 냄새보다, 경쟁으로부터 무장해제 되는 숲 향기 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절약하다보니 남들보다 더 나은 물건을 갖추지 못했지만, 경쟁심은 점점 줄어갔다. 소탈한 친구들도 하나, 둘 생겼다. 사치를 경계하고, 매주 누가 더 절약했는지를 자랑삼아 이야기한다.
   
4인 가족 하루 식비 만 원. 때때로 치밀어 오르는 승부욕을 '만 원'이란 절제된 환경으로 잠재워 왔다. 이 돈은 빵을 먹냐 안 먹냐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체면 치레를 위한 소비를 막을 수 있는 최후 방어선이었다. 

7월부터 우리 집 식비는 다시 하루 1만5000원으로 돌아왔다. 검약한 생활로 물건에 대한 과잉 승부욕을 막으려고 했으나, 남편 속도에 맞춰가며 천천히 절약하려 한다.

이제야 조금씩 숲향기 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은데, 또다시 소비로, 물건으로, 때로는 지위로, 스스로를 증명하려 들까봐 두렵다. 그럴수록 가계부를 쓰고 마음을 정돈하며, 소박한 일상을 블로그에 기록한다. 아직은 몹시 미약한 숲향기를 잃지 않기 위해.
 

큰 돈 들지 않아도 충분할 수 있는 일상을 고민한다. 숲향기에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다. ⓒ 최다혜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https://blog.naver.com/dahyun0421)에도 실립니다.
#최소한의소비 #피구왕서영 #검소한삶 #경쟁 #황유미
댓글4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책 읽고, 글 쓰고, 사랑합니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세상을 꿈 꿉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단독] 윤석열 장모 "100억 잔고증명 위조, 또 있다" 법정 증언
  4. 4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5. 5 김종인 "윤 대통령 경제에 문외한...민생 파탄나면 정권은 붕괴"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