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이력서에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황 대표가 생각난다

오는 17일부터 블라인드 채용법 시행... 기업 채용 문화 공정하게 바꾸는 계기 돼야

등록 2019.07.11 08:04수정 2019.07.11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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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직 과정은 누구에게나 긴장되는 일이다. 그만큼 절실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 unsplash


오랜만에 친구와 통화했다. 둘 다 구직 중이라 일자리 얘기를 한창 했다. 얘기는 자연스레 한탄으로 흘렀다. 서울 땅에서 우리가 과연 먹고 살 수 있을지, 일자리를 구하기는 얼마나 힘든지. 그러던 중 친구가 황당한 경험을 얘기했다.

"OO극장은 자사 이력서 양식이 따로 있는데, 엄마, 아빠 직업까지 적으라는 거야."

귀가 번쩍 뜨이는 그 말에 당장 채용공고를 찾아봤다. 친구 말대로 버젓이 가족관계를 적는 항목이 있었다. 가족의 생년월일, 직장명, 동거 여부가 극장 매표소에서 일하는 데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부모님 직업이 고객을 대하는 내 태도에 영향을 끼친다는 말인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사 양식이라는 입사 지원서에는 종교, 결혼 여부, 장애 여부를 묻는 항목도 있었다.

'종교는 왜 적어야 하지? 종교가 다르면 뽑지 않는다는 건가?' 구직자 입장에서 무수한 자기 검열이 작동했다. 장애 여부, 결혼 여부도 마찬가지다. 장애가 있으면? 결혼을 하면? 무슨 불이익이 있는 건 아닌지. 적으려니 꺼림칙하고, 비워두려니 찝찝하다. 공란으로 두면 탈락의 빌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사람인'에서 인사담당자 397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개인 신상 항목을 채우지 않으면 무조건 탈락시키거나 감점 처리한다고 10명 중 4명이 답했다.

내친김에 이력서에 가족관계를 쓰는 회사가 많은지 찾아보던 중, 놀랍게도 '가족관계 항목'을 어떻게 채우면 되는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글들을 많이 발견했다. 그만큼 당연히 써야 하는 항목이었던 것이다. 더 놀라운 건 올 3월에 이를 금지하는 법안이 이미 통과되었다는 사실이다.
 

기본인적사항에 장애, 결혼, 종교 항목이 있다 ⓒ 우민정


블라인드 채용법 시행을 앞두고 있지만

블라인드 채용법(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제4조의 3, 제17조 2항)은 직무와 무관한 내용을 구직자에게 요구하지 않도록 하는 법이다. 이른바 편견 없는 채용. 따라서 서류심사나 면접 때 가족관계, 나이, 출신학교, 성별, 혼인 여부 등 업무 외적인 내용을 물어선 안 된다. 이를 어길 시 최대 500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지난 3월에 일부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고, 오는 17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더 지켜봐야겠지만, 시행 예고에도 불구하고 아직 버젓이 업무 외적인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기업이 많다. 출신학교는 묻지 않지만, 최종 학교 소재지를 묻는 등 꼼수도 등장했다. 사실 법적 규제는 한계가 있다. 서류는 책임을 물을 증거라도 남겠지만, 면접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감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결국 가족관계나 혼인 여부를 묻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채용 문화로 자리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가족의 직업을 묻는 항목을 보니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떠올랐다. 얼마 전 그는 대학 강연에서 스펙 없이 대기업에 취업했다며 아들 자랑을 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부모 직업이 곧 '스펙'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그만큼 고용 차별이 일상적이고 견고하다는 방증이다.

이 이야기를 하니 역시 구직 중인 다른 친구가 말했다. "나도 가족관계 써냈는데?" 그간 나는 용케도 피해갔구나 싶었다. 심지어 가족의 학력과 근무처를 기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가족관계 항목을 쓸 때 어땠냐고 물으니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사실 나는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정상 가족'이어서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지. 근데 불편하지 않다는 건 결국 내가 다수자라는 말 아닐까."

친구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그 양식은 다양한 이유로 가족관계란을 채울 수 없는 사람을 배제했다. 게다가 그 항목이 어떤 필터로 작동할지 구직자인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 가리면 뭘 보고 사람 뽑으라는 거냐." "깜깜이 채용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출신대학·전공을 모르니 물어볼 것이 없어 달랑 7~8분 면접을 끝냈다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이 목소리는 오히려 그동안 기업이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을 뽑아왔는지 보여준다.

블라인드 채용법이 가리는 건 그 사람의 실력이 아니다. 그 사람이 가진 사회적 지위와 배경이다. 부모님 직업은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부디 기업들이 블라인드 채용법 시행을 '적합한 인재'를 공정하게 뽑는 실력을 기르는 계기로 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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