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11%만을 위한 고등학교, 89%는 '투명인간'

[아이들은 나의 스승 166] 학종과 수능의 '기 싸움' 결과는?

등록 2019.07.08 17:50수정 2019.07.08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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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4일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6월 모의평가가 실시된 대구 경북고등학교에서 수험생들이 시험을 치르고 있다. ⓒ 연합뉴스

 
무슨 시험이든 상대와의 비교는 불가피하고, 비교는 필연적으로 경쟁심을 유발한다. 이는 승자독식의 우리 사회에서 거의 본능처럼 작용한다. 초등학생 아이들부터 지능지수 검사는 말할 것도 없고, 진로와 관련된 흥미 적성 검사조차 수치를 비교하는 판국이니 더 말해서 무엇 할까.

지난 6월 초에 치른 전국연합 모의평가 결과가 나왔고, 고등학교마다 성적을 분석하느라 분주하다. 성적 분석이라고 해봐야 대개 영역별 1~2등급 비율을 정리해 전국 평균치와 대조해 보거나, 인근 학교와 비교하는 게 전부다. 전국 평균보다 월등히 높아도 인근 학교보다 낮으면 비상이 걸린다.

등급이나 점수는 소용 없고 순위와 서열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6월 모의평가 성적이 곧 수능 성적이라는 속설 탓인지, 고3 교실은 학생도, 교사도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다. 뒤이어 치러지는 교내 기말고사는 어디까지나 내신 관리용일 뿐이어서 수능에 '올인'하는 아이들에겐 큰 의미가 없다.

교육부가 각 대학에 정시 모집 비율을 30%까지 확대하라고 권고한 뒤 가장 큰 혼란에 빠진 곳은 정작 대학이 아니라 고등학교였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몰라 난감한 처지다. 대학은 자율성을 침해한다고, 시민단체에서는 수능을 외려 절대평가로 바꿔야 한다고 거세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지금껏 수시가 대세라고 여겼는데, 교육부의 정시 확대 발표로 갑작스럽게 급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역시나 우리 교육은 '백년지대계'는커녕 '삼년지대계'도 못 된다는 조롱이 뒤따랐다. '을'의 처지인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부종합전형(학종)과 수능, 두 마리 토끼를 어떻게든 함께 잡아야 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게 됐다.

하긴 이든 저든 '100:0'이 아니라면, 학교의 입장에선 양자택일할 수 없는 문제다. 학교마다 학종과 수능을 양 끝으로 하는 수직 선상에서 어디쯤 서야 할지 눈치껏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 교육부뿐만 아니라 대학에서도 '양다리를 걸친' 전형 기준이 많아 어느 한쪽에 '올인'하는 건 흡사 도박에 가깝다.

예컨대, 'SKY'를 비롯한 서울 소재 명문대 진학을 염두에 둔 1~2등급 최상위권 아이들에겐 수능은 해마다 '복병'이다. 학종의 비중이 높아 내신은 물론, 교외 활동까지 꼼꼼히 챙겨야 하는 데다 까다로운 수능 최저등급 기준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학교생활은 차라리 '전쟁'이다.


학종과 수능은 서로 다른 유형의 학생을 길러낸다

온전히 그들에게만 맡겨서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다. 학교마다 최상위권 아이들을 음으로 양으로 '배려'하는 것은 그래서다. 노골적으로 그들끼리 동아리를 편성하게 한 뒤 별도의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생활기록부까지 관리해주는 학교가 적지 않다는 건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주지하다시피, 대학입시의 전형 요소로서 학종과 수능은 철저히 길항관계다. 학종을 성실히 챙길수록 수능 준비에 소홀할 수밖에 없고, 반대로 수능 점수에 연연하다 보면 학종 대비가 부실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더욱이 학종과 수능은 필연적으로 서로 다른 유형의 학생을 길러낸다.

학종을 위해서는 동아리 활동은 물론, 수업조차 활동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 각자의 학업 역량과 특징을 정확히 간파해낼 수 있고, 하다못해 활동 내용이라도 생활기록부에 기재할 수 있다. 기존의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강의식 수업 방식으로는 학종 대비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수능을 대비하자면 강의식 수업만 한 게 없다. 수능은 기출 문제들을 얼마나 많이 반복해서 풀어보았는가가 성패를 좌우한다. 아무리 과거 학력고사 때와는 문제의 유형이 크게 달라졌다고 해도, 수능을 준비하는 데 반복적인 문제 풀이를 능가하는 공부법은, 단언컨대, 없다. 이는 기실 학종이 도입된 배경이기도 하다.

결국 모의평가 결과를 받아들고 성적 향상 방안을 마련하는 건 그야말로 '답정너'다. 구관이 명관, 과거의 문제 풀이 수업 방식으로 회귀하면 된다. 정규 수업이든, 방과 후 수업이든 죄다 국영수 위주로 편성하고 기출 문제의 유형을 머리에 욱여넣으면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

그러자면, 학기 중 소풍이나 체육대회, 수학여행과 체험학습 등도 삼가야 한다. 긴 여름방학은 말할 것도 없고, 주말 이틀간 쉬는 것조차 수능 대비에 방해가 된다. 자칫 공부의 리듬을 깰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과 학습 외에 연중 그 어떤 교외 활동도 하지 않는 학교가 적지 않다.

수능을 위해서라면 모둠을 꾸려 협동 학습을 시키고, 프로젝트 과제를 내주는 건 아이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다. 그럴 시간에 기출문제 한 개라도 더 풀어보는 게 수능에 훨씬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시나브로 교과서는 다시 문제집으로 대체되고, 교육방송 EBS는 '저렴한 사교육 방송'으로 각인되면 교실 수업을 대체하게 될 것이다.

돌고 돌아 다시 10여 년 전으로 회귀할 것 같은 분위기

이른바 '학종 시대'를 준비하며 애면글면하던 교사들도 하나둘 서서히 과거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눈치다. 나이 지긋한 중견 교사들은 물론, 임용된 지 얼마 안 된 젊은 교사들조차, 불신이 팽배한 교육 현실에서 '주관식' 학종은 '객관식' 수능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문제 풀이 수업으로 회귀할 거라는 이야기다.

수능은 학종의 '전제 조건'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학종에서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일단 수능 성적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대학마다 수능 성적이 좋은 학교의 생활기록부를 더 신뢰한다는 것이다. 애초 반비례할 수밖에 없는 학종과 수능을 대체재가 아닌 보완재로 간주하며 학교와 아이들을 옥죄고 있다.

입학사정관제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대학 입시 전형의 변화가 돌고 돌아 다시 10여 년 전으로 회귀할 것 같은 분위기다. 온존한 학벌 구조와 대학 입시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은 되레 선다형 수능 시험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다. 컴퓨터가 아닌 사람이 채점하면 못 믿겠다는 건데, 그로 인해 미래에 어떤 인재가 길러지는가는 관심 밖이다.

6월 모의평가 결과에 낙담한 학교 관리자는 교과협의회를 열도록 채근했다. 과목별 교사들이 한데 모여 성적 향상을 위한 방안을 모색했지만,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교외 활동을 대폭 축소해 수능 과목의 시수를 늘리고, 1학년 때부터 수능 대비 문제 풀이에 '올인'하면 된다는 푸념만 잔뜩 늘어놓았을 뿐이다.

교사들은 수능 성적을 올리려거든 학종에 연연하지 말고, 학종의 취지에 공감하거든 수능 성적에 일희일비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거칠게 말해서, 학종과 수능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주문이다. 학교 관리자도 총대를 메기 버거웠는지, '학종 대비를 위한 생활기록부 관리에도 최선을 다해야 하고, 수능 성적 향상을 위한 대비에도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사실상 하나 마나 한 이야기다.

한 아이는 요즘처럼 학종과 수능의 기 싸움이 계속되면 '머지않아 학교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대학 입시에서 학종과 수능 전형 비율에 따라 마치 문·이과 구분처럼 전국의 인문계고등학교가 '학종형' 고등학교와 '수능형' 고등학교로 나뉘게 될 거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자사고의 경우엔, 이미 '학종형'과 '수능형'으로 구분돼 있다면서.

사족 하나. 학종과 수능의 실랑이가 계속되는 가운데, 정작 3등급 이하인 아이들은 통째로 배제되고 있다. 상위 11%까지가 2등급이니, 하위 89%에 해당하는 대다수의 아이들은 학교 간 성적 비교에서 항상 논외다. 말하자면, 열 명 중 아홉은 성적에 관한 한 학교마다 '투명인간'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종이니 수능이니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다.
#학생부종합전형 #수능 #6월 모의평가 #대학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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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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