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 쓴 손편지, 유서가 아니길 바랐다

[미 서부 종단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에세이 ④-1] 4300km 트레킹 도전기

등록 2019.07.16 07:28수정 2019.07.16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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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3대 트레일 중 가장 길고 험하다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이하 피시티) 4300km. 미국 LA 문화단체 '컬쳐앤소사이티' 기획으로 고난의 행군을 자처한 한국 하이커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 기자말
     
여행이 지루해졌다. 2년 전 11월 21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희망봉에 올랐다. 거센 바람이 모자를 날려버릴 듯 불었다. 한 손으로 모자를 누른 채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희망봉은 포르투갈 항해가 바르톨로뮤 디아즈가 인도양을 가는 길에 처음으로 발견한 땅이자 모험가들이 목적지에 무사히 갈 수 있기를 기도하는 곳이다.

남미에서 온 한 가족은 파도 소리를 들으며 숙연하게 기도를 했고,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세계여행을 하고 있다던 홍택이 형은 눈물을 흘렸다. "이야~ 멋지다…." 나도 덩달아 감탄사를 내뱉는다. 하지만, 별 감흥이 없다. 뻔한 줄거리 속 드라마의 한 에피소드가 지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왜 여기 있나. 만인의 랜드마크가 나에게는 무슨 의미일까?
      
세계 여행을 멈추고 길 위에 서다
 

If not now, Then when ? 가장 좋아하는 문구를 등에 새기고 이 길을 걷는게 작은 소망이었다. ⓒ 권현준


그때쯤인가 어느 세계여행자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미국 서부 4300km를 종단하는 피시티(PCT∙Pacific Crest Trail)를 알게 됐다. 스토커처럼 피시티 하이커 종주자의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팔로우해 사진을 찾아봤다. 그들의 짧은 감상을 읽는 것만해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눈물도 찔끔 났다. 'PCT'... '4300km'가 멈추지 않는 팽이처럼, 여행하는 내내 가슴을 맴돌았다.


지난해 1월 4일, 아르헨티나 모레노 빙하 앞에 섰다. 억겁의 시간이 얼어붙은 얼음 장벽이다. 그런데 또, 그것은 나에게 별다른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때 결심했다. 피시티다. 나는 걸어야 한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움직여야 하는 운명을 가진 사람처럼.

베트남을 시작으로 인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하고 유럽을 떠나려는 찰나, 계획을 멈추고 피시티에 도전하기 위해 한국으로 바로 귀국했다. 피시티는 4~6개월 걸리는 장거리 하이킹이기 때문에 6개월 관광 여행 비자인 B1/B2 비자를 준비해야 했다.

5월 7일 로스앤젤레스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국에 도착해 아웃도어용품점에 들러 부족한 장비를 샀다. 피시티 출발지점인 멕시코 접경 도시 캠포(Campo)로 가기 위해 샌디에이고에 있는 한인 민박집에 짐을 풀었다. 방은 정리돼 있지 않았다.

침대에 바퀴벌레 사체가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수건은 침대 주변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아, 너무 즉흥적으로 온 것 아닌가. 머리 속이 어지러웠다. 산에서 조난당해 죽지 않을까. 곰이 공격하면 죽은 척을 해야 하나. 부모님께 손 편지를 썼다. 유서가 아니길 바랐다.
 
"도전에 성공할지 실패할지 저도 모르겠어요.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이겨내겠습니다."
 
나름 장거리 도보여행에 자신이 있었다. 2014년 전남 해남 땅끝마을에서 파주 임진각까지 600km, 2015년 대한민국 전국 도보여행, 2017년 네팔 히말라야 토롱라 패스(5500m), 지난해에는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트래킹을 했다. 물리적인 고통 때문에 포기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5월 9일 오후 12시 34분 대장정을 시작했다.

40도 뙤약볕, 근육통에 혼자가 된 하이킹
  
낮 기온 40도 가까이 되는 캘리포니아 뙤약볕 아래 어깨는 맥없이 처졌다. 장딴지와 허벅지에는 알이 배기고 근육은 빨래 짜듯 죄어 왔다. 가방에는 바윗돌이 들어간 듯 천근만근 무거웠다. 어깨가 아파 배낭끈을 손으로 번갈아 부여잡고 허리를 숙이며 걸었다. 배낭 허리끈이 허리와 골반을 쓸어 상처가 생겼다. 첫날 오후 5시가 안 돼 운행을 멈췄다. 운행 거리 고작 9.1km. 고난을 예고하고 있었다.


미 서부 장거리 도보여행은 한국 국토대장정과 급이 다르다. 아스팔트 평지를 걷는 한국과 달리 피시티는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해 걸어야 한다. 물 수급에 대한 불안감도 견뎌야 한다. 한국에서는 편의점에 가서 물을 사 먹어도 되지만, 이곳은 휴대전화도 안 터지고 주변에 상점 자체가 없다. 겨우 도착한 물 수급 장소에는 소금쟁이가 떠다니고 벌레가 빠져 죽어 있는 등 오염된 경우도 있었다.

피시티 종주는 2년간 세계일주를 함께한 친구 2명과 시작했다. 아프리카와 남미 여행을 하며 위험했던 순간들을 함께 이겨낸 동지들이었다. 하지만 보름 만에 이별 시간이 다가왔다. 우리는 걷는 속도가 달랐다. 회복 속도도 같지 않았다. 상대방 운행 리듬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 서로 알고 있었다. 의논 끝에 헤어지기로 했다. 며칠 휴식을 하면 서로 만날 수 있을 정도 거리를 두고 걷기로 했다.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이후에도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난 날은 많지 않았다.
  

처음이자 마지막 단체사진 세계일주를 같이했던 친구들과 멕시코 국경에서 ⓒ 권현준

 
팔할은 혼자 걸었다. 한인 하이커끼리 뭉쳐 텐트에서 밥을 먹고 모닥불을 피우는 모습을 볼 때면 '옆에 껴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한인 피시티 하이커들이 모여 있는 카카오톡 단체방에는 서로 으쌰으쌰 하며 여행하는 사진이 올라 왔다. 그것을 볼 때마다 미치도록 외로웠다. 하지만 나는 한국 문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싶었다. 휴대전화 메모장에 일기를 쓰며 외로움을 견뎠다.

모두 버려야, 걸을 수 있다, 산다
     

흔한 피시티의 일몰 풍경 힘든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 권현준

 
출발한 지 한 달이 지나고, 험난한 산세가 펼쳐진 중부 캘리포니아 시에라 구간을 지날 때쯤 나도 모르게 몸이 장거리 하이커의 것으로 바뀌고 있었다.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새벽 4시 반이면 눈이 떠졌다. 다리 근육도 '딴딴'하게 모양이 잡혔다. 휴대전화가 꺼져 길을 잃어도 불안하지 않았다. 이 방향이면 맞겠지 하는 촉이 생겼다. 이때부터 하루하루 행복했다.

운행 33일째, 1130km를 걸어 사막 구간 끝이자 시에라 구간 시작점, 케네디 메도우즈(Kennedy Medadows)에 도착했다. 여러 외국인 하이커를 만났다. 일본에서 클라이밍 강사를 했다던 30대 후반 노부는 일본 전통 삿갓 모자를 쓰고 사무라이 문신 토시를 입고 걸었다. 수염과 머리카락이 얼굴을 완전히 덮고 있어 에스키모 같았던 알래스카 출신 제레미도 만났다.

그런데, 그들은 나보다 일주일 가량 늦게 출발했지만 나를 따라잡았다. 비결이 뭘까? 무게였다. 맥주를 마시며 친해진 베테랑 외국인 하이커들에게 내 가방을 점검해 달라고 부탁했다. 불필요한 것들을 거침없이 빼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배낭 레인커버와 우비 등 비를 막는 장비와 바람막이, 내복 등 보온성 옷들이었다. 비가 오지 않고 밤에도 따듯한 사막에서는 필요 없는 것들이다. 두 번째는 많은 양의 음식이었다. 세 번째는 텐트 자체였다. 마지막으로 친구들은 말했다.

"너, 배낭에 든 짐보다 마음 속에 가득찬 욕심부터 버려." 
 

욕심을 버린자 모든 것을 버리고 난 후 ⓒ 권현준


필수품목은 자체 제작했다. 미국 세탁소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일회용 비닐봉지로 우비와 레인커버를 만들었다. 야영지에서는 텐트 대신 비닐돗자리와 매트리스를 깔고 침낭에서 잤다.

밥도 적게 먹었다. 마을에서 남미식 전병인 토르티야에 초코릿 잼인 누텔라를 발라 랩으로 싸서 다녔다. 잼 통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즐겨먹던 참치와 스팸도 버렸다. 식사량 자체를 줄였다.

청결도 버렸다. 하이킹을 할 때 입고 있는 옷과 양말 2켤레, 경량 패딩 빼고 모든 옷을 최종 목적지로 보냈다.

배낭 무게가 4kg 정도 줄었다. 가벼워진 가방 덕분에 매일 40km를 걸을 수 있었다.

- 2편으로 이어집니다.
#권현준 #피시티 #PCT #PACIFIC CREST TRAIL #430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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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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