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뒷골목 허름한 건물 2층... 내 인생을 바꾼 서점이 있었다

[대전, 그곳을 알고싶다] 창의서점의 추억

등록 2019.07.10 14:35수정 2019.07.10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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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작가회의에서는 '2019 대전방문의 해'를 기념하여 연속기고를 시작합니다. 대전의 볼거리와 즐길거리, 추억담을 독자들과 나누고 대전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누구에게나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게 하는 아련한 추억이 있게 마련이다. 첫사랑이 그러하고 처음으로 떠나본 여행지가 그러하고 태를 묻고 떠난 고향과 어머니가 그러하다. 내게도 더할 수 없이 소중한 그리움의 목록들이 있는데, 내 청춘을 붉게 물들였던 서점에 얽힌 추억은 그중 앞자리를 차지한다.

아, 이제는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생의 황금기인 청년기. 우리 세대의 보편적 현상인지 모르겠으나 당시의 나는 물질적 결핍과 더불어 정신적 빈곤에 몹시 시달려야 했다. 정신의 허기는 채울수록 더욱 허기진다는 점에서 물질적 결핍과는 근본적으로 그 성질과 양상이 다르다.


책을 허겁지겁 먹어치우던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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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나는 늘 지식에 굶주린 탓으로 강박에 휘둘려 허겁지겁 책을 먹어치우던 게걸스런 청년이었다. ⓒ unsplash





스무 살은 식욕 못지않게 지식욕도 왕성한 나이이다. 그 시절 나는 늘 지식에 굶주린 탓으로 강박에 휘둘려 허겁지겁 책을 먹어치우던 게걸스런 청년이었다. 책이라는 음식을 먹고 마시고 난 후에 찾아오는, 까닭모를 지적 우월감과 포만감은 떨쳐내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어느 책은 너무 딱딱해서 소화가 되지 않았고, 어느 책은 너무 당분이 많아서 생체 리듬을 깨기도 했지만 처음 나는 그것 때문에 책을 가려 읽는 편식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도서구매의 경험이 늘어갈수록 부지불식간 시나브로 편식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이 크게 문제될 리는 없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언제나 가난한 호주머니 사정이 지적 욕망을 함부로 허용하지 않았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배고플 때 더 자주 먹을거리가 눈에 띄듯이 돈이 없으니 사고 싶은 책의 목록이 늘어만 가는 형국이었다. 원하는 책들을 일일이 다 구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늘 나를 주눅 들게 하였던 것이다. 절대적 가난은 제도 밖의 교양을 위한 독서조차 사치로 만들었던 것.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은 대개 학교 도서관에 비치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선배들에게 어쩌다 한두 권 빌려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자연 무리를 해서 서점을 찾을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의 형편으로는 그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고 싶은 책을 구입하기 위하여 술값을 줄이고 점심을 굶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


내 기억에 굴절이 있겠으나, 당시 대전에는 중구의 '대흥서점'을 비롯하여 세 곳의 서점 정도가 성업 중이었다. 이들 서점은 제법 규모가 크긴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찾는 책들을 구비해 놓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나는 대전 중구 뒷골목의 영세 서점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창의서점'이 바로 그곳이었다. 학생운동 출신으로 감옥에 다녀와서 자신이 낸 서점을 거점으로 지역 사회운동을 활발하게 펼쳐나가던 주인은 키가 작았지만 몸이 다부졌고 눈매가 매서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순전히 경제적 이유로 그러했겠지만 번화가를 면해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서점을 찾아가려면 좁고 긴 골목을 돌아가야 했다. 찾아갈 때마다 예의 서점은 수줍은 듯 우련하게 조용히 손님을 맞았다. 허름한 건물 2층에 위치한 그곳을 방문할 때 층계에서 어쩌다 아는 얼굴이라도 만나게 되면 혈육을 만난 듯 반가웠다.

뿐만 아니라 생면부지의 얼굴들에게도 까닭 없이 친밀감이 들고는 하였는데, 그것은 뭔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의식 때문이었다. 우연한 만남 이상의 의미가 없었음에도 당시의 시대 상황이 방문자들에게 은밀한 결속의 연대감을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그곳은 당시 지식 패러다임을 주도하던 인문사회과학 서적 그리고 <씨알의 소리> <창작과비평> <문학과 지성> <다리> 등 비교적 진보적 이념을 지향하는 잡지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던 문제의 '서점'이었던 것이다.

획일적 반공 체제의 국민교육형을 이수한 세대답게 단선적 맹목적 사고로 일관되게 살아왔던 우리는 문제의 서점에서 구입한 문제의 책들을 통해 전혀 새로운, 제도 밖의 진리를 접하면서 세계 인식의 눈을 떠갔다. 그것은 실로 경이와 충격 그 자체였다. 바야흐로 새로운 인간형이 태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의 부활이었다. 책의 감염력은 젊은 세대일수록 더욱 강하다. 책 속에는 얼마나 강한 바이러스가 살고 있는지.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로 살던 그 시절은 충분히 가치 있고 아름다웠다.

나는 책의 신실한 신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책은 생의 이정표였고, 삶의 거점이었고, 시대의 밤길을 걷는 자에게 지혜의 등불이었으며, 미래를 가늠케 해주는 생의 지도가 되어주기도 했으니 이처럼 위대한 스승이 또 어디 있었으랴. 당시에 읽은 책들은 모두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던 광도 높은 별자리였다. 별을 보고 걷는 밤길이 전혀 두렵지 않고, 외려 원인모를 자부와 황홀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책은 내 현재와 미래의 나침판이었다. 감히 나는 말한다. 오늘의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당시에 읽은 책들이었다고.

눈치 빠른 독자는 벌써 감지했을 것이다, 내 목소리에 다소 과장과 호들갑이 실려 있다는 것을. 아름다운 날들을, 그것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그런, 상실의 날들을 추억하다 보면 언제나 그렇듯 이성보다는 감성의 지배를 받게 된다. 온통 붉고 푸르던 그 시절을 떠올리다보니 돌연 청년으로 되돌아간 듯 몸속 피돌기가 빠르게 돌고 덩달아 목청이 높아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 들뜬 감정을 진정시키고 솔직하게 고백하기로 하자. 당시에 나는 흥미와 재미보다는 의무와 당위로써 사회과학과 인문과학 서적들 예컨대 <해방전후사의 인식> <8억 인과의 대화> <마르크스 경제학> <쿠바 혁명의 해부> <열린 사회와 적들> <페다고지> >이성과 혁명> 등을 무작위로 순서나 체계 없이 접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내용이 제대로 소화될 리 만무였다. 그 책들은 너무 거창한 세계와 진리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지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인내하며 그것들을 읽어나갔다. '독서백편의자현'란 공자 말에 기대어 거듭 읽기를 반복하는 동안 조금씩 문리가 터 그 내용들이 슬그머니 몸 안쪽으로 스미는 실감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더 자주 손이 가고 눈에 밟히는 책들은 따로 있었다. 논리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문학 책들이었다. 당시 읽었던 도서 목록들을 순서 없이 나열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이병주의 <지리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김원일의 <골짜기>, 김성동의 <오막살이 집 한 채>, 윤흥길의 <장마>, 전상국의 <동행> 등을 비롯한 당시 유명 출판사에서 간행 되던 소설들.

김수영, 고은, 신경림, 황동규, 김지하, 정희성, 이시영, 황지우, 이성복 등을 비롯한 민음사, 창비사 문지사가 펴낸 시인들의 시집들.

백낙청, 염무웅, 김현, 김주연 등의 평론집.

나는 이밖에도 월부로 구입한, 삼성출판사 간행의 <세계문학전집>과 <제3세대 작가선집> 등을 두서없이 편력해 나갔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독서 경험은 나의 문학 수업이 되고 말았지만 당시에는 시인이나 작가가 되겠다든가 하는 개념 없이 오로지 지적 충동에 이끌려 책 속에 빠져 지내게 된 것이다.

책 그리고 그 서점

책에 대한 중독성과 더불어 장소가 부여하는 중독성도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나는 예의 창의서점을 통해 깊이 깨닫게 되었다. 굳이 살 책이 없어도 시내에 나가게 되면 그곳은 반드시 들려야 하는 경유지가 되고 만 것이다. 간혹 고질적 병폐가 되어버린 이러한 습관을 거르게 되는 날은 마치 귀중한 물건을 잃고 온 것처럼 무언가 알 수 없는 심리적 결락감을 느끼게 되었으니 내가 어느 정도 그곳에 빠져 있었는지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리라.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그곳 창의서점은 주로 일반 고객보다는 단골들을 상대로 책을 파는 곳이라서 그곳을 들락거리는 동안 자연 모르는 이와도 안면을 트게 되고 그것으로 인연을 갖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이러한 인연을 핑계로 차를 나누기도 하고 술자리를 펼치게 되기까지 하였다.

당시 대전 충남 지역을 중심으로 펴낸 무크지 <삶의 문학> 동인들은 모두 이 서점의 단골들이었다. 그들은 문학을 통해 사회 변혁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창의서점은 생활의 아지트나 다름없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곳은 일차 약속 장소가 되었고 접선의 장소가 되었다.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나라 안팎의 비밀한 정보나 소문을 우리는 주로 그곳에서 주고받았다. 그곳은 유비통신의 거점이었다. 일의 유무를 떠나 그곳을 찾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 시절 그 서점은 내게 인상적인 일화 한 토막을 선물로 안겨주기도 하였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은 망년우(세월을 잊은 친구 사이)로 지내는 현기영 선생님의 존함 석자를 최초로 만난 곳도 '창의서점'이었다. 그때 내 나이 스물셋,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뒤 다소 서먹해진 캠퍼스에 막 적응하려던 시기였다. 용돈을 털어 산 잡지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 그리고 문단 안팎으로 비상한 주목의 대상이었던 문제의 소설집 <순이 삼촌>을 사들고 하숙집으로 오던 날은 마치 세상을 다 얻은 듯 어떤 성취감이 가슴을 뻐근하게 하였다. 그 시절엔 작은 것에도 쉽게 감동하고는 하였던 시기였던 것이다.

정신의 허기가 그 책을 급하게 읽도록 하였다. 허겁지겁 목마른 놈 물마시듯 그 책을 다 읽었을 때는 그 책을 만난 지 채 일곱 시간도 지나지 않은 저녁 아홉 시였다. 숨이 턱 막히고 온몸에 솜털이 이는 전율이 찾아왔다.

표지 날개에 실린 작가의 다소 우울하고 고뇌에 찬 스냅 사진을 몇 번이고 거듭 다시 보고는 하였다. 특히 그 소설집의 표제작인 <순이 삼촌>을 읽고 나서는 괜스레 가슴 우물에 돌멩이처럼 단단한 눈물 덩어리가 가득 차올라 목으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껴야 했다. 갑자기 하숙집이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곧장 술집으로 내달려갔다. 거기서 우연히 만난 같은 학번과 선생의 작품을 놓고 갑론을박하였다. 영문학도였던 그 친구도 얼마 전 읽었다면서 어지간히 흥분해 있었다.

나는 선생의 문제작 <순이 삼촌>을 통해 무지몽매로부터 눈을 뜨게 되었고 세상을 판독이 아닌, 독해의 차원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우리 근현대사의 역사적 비극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적어도 책만큼은 아날로그 세대의 감성을 가지고 만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점에서 직접 신간을 고르고 값을 치르는 행위 자체가 이미 독서 행위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에 대한 경외감이 없다면 책의 영양가는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시간에 쫓기며 편리만을 취하는 현대인에게는 서점에 들러 책을 구매하는 행위가 귀찮고 번잡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공력을 들여 만든 책을 너무 쉽게 대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광속의 시대, 너도 나도 빠르게 살면서 빠르게 취하고 빠르게 버린다. 하지만 아무리 무한 속도의 무한 경쟁 시대라 할지라도 느리게 취해야 할 것들은 있다. 독서가 꼭 교환과 실용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독서를 통해 세계와 인간 이해에 대한 통찰의 계기를 갖기 위해서는 일상의 주행 속도에서 벗어나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그 행위를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직접 서점을 방문하여 고른 책에 더 애정이 가는 것은 너무도 뻔한 이치가 아닌가.
  
이재무 : 1983년 ≪삶의 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슬픔은 어깨로 운다> 외 10권, 시선집 <오래된 농담> 외 2권, 산문집 <집착으로부터의 도피> 외 2권, 시평집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등이 있음.
#대전 #대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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