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 문 앞에 있던 그 남자

가난한 여성이 치러야 하는 안전 비용

등록 2019.07.11 16:22수정 2019.07.11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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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에 산 지 두 달째다. 헉 소리 나는 원룸 월세와 보증금을 감당할 여력이 없던 나는 발품을 팔아 수중에 있는 돈으로 구할 수 있는 가장 값싼 고시원을 구했다. 여성 전용일 것, 최대한 적은 비용일 것. 전자는 나름의 최소한의 안전 장치였고 후자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방의 크기나 쾌적함 따위는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지인들은 "어떻게 거길 살아, 괜찮아?" 라고 걱정했지만 내가 "응, 여성 전용이야' 라고 대답하니 조금 안심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고시원이나 기숙사 같이 남녀가 함께 거주하는 공간일 때 여성이 듣게 되는 "괜찮아?" 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다.

안전, 보안, 남성의 침입... 그러나 여성 전용이라고 해서 위험이 사라진 건 아니다. 여대 화장실에 남성이 숨어있었다는 기사, 여성 기숙사에 침입한 남성의 이야기, 여성 전용 공간, 아니 여성이라는 성(姓)을 침범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남성들의 행각을 들을 때마다 매일 듣는 것인데도 소름이 돋고 가슴이 콱 막힌다. 남성들에겐 그저 '변태' '또라이'의 일탈일지 모르지만 여성인 내게 그것은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일상이니까. 오늘 아침 있었던 일처럼 말이다. 

머리를 말리려고 방문을 열었다. 현관문 바로 앞에 있던 중년 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덜컥 겁이 났다. '여긴 여성 전용인데!' 속말은 유명무실했다. 내가 사는 고시원은 환기와 냉방을 위해 종종 현관문을 열어놓는데 그 사이 그 남성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현관문을 열면 여성들이 살고 있는 수많은 방이 일렬 종대로 늘어서 있고 현관문과 방문 사이엔 어떠한 보안장치나 안전장치도 없다 '저 남자는 누구지' 순진한 물음이 아니라 머리털이 바짝 서는 경계심이 일었다. 남성이 물었다. "관리인 어디 계세요?" "몰라요. 전화해보세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황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남성은 그저 관리인에게 볼 일이 있어 고시원에 왔다가 문이 열려 있어 들어온 것 뿐이겠지만, 그래 그럴 수도 있지만 내가 만일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았다면? 심장이 덜컹했다 속옷이 여기저기 널린 내 좁은 방이 그에게 보였을까봐 걱정됐다. 나말고도 여기 사는 여성 대부분이 '여성전용'이라는 허술한 이름을 믿고 편한 복장으로 다닌다. 나도 그렇고.

차라리 옷을 갖춰입고 있던 내가 그 남성과 대면해서 다행이라 해야 할까. 내 표정도 신경쓰였다. 불쾌하고 두려운 마음에 살짝 찡그린 표정으로 쌀쌀맞게 대답했는데 남성이 내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 앙심을 품으면 어떡하지. 내 방 번호를 기억하고 있다가 현관문이 열렸을 때를 틈타 해코지라도 하는 게 아닐까. 고시원이 이렇게 허술한 곳임을 알았으니 행여 나쁜 마음이라도 먹는 건 아닐까.

누군가는 내 상상을 피해망상이라고 비웃거나 세상에 그런 이상한 남성은 일부일 뿐이라며 달랠 수도 있다. '너도 페미니스트니?' 라고 되물으며 예민한 사람 취급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운이 좋아' 오늘 하루 무사했고,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이들에게 망상은 현실이고 일상이다. 조금 더 비싼 곳으로, 높은 층으로, 보안이 확실한 곳으로 방을 정하지 않은 게 후회된다. 성별에 따라 차등 적용되는 안전 비용이라니. 가난한 여성은 안전에 더 비싼 값을 치러야 하고, 그렇지 않았을 때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된다. 그 두려움의 무게를, 고작 문고리 하나로 버텨내야 한다는 게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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