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놈의 수사관, 이름은 남궁길영"

[제5공진호 재심 이야기①] "전과자 자식이라는 꼬리만이라도 떼어줬으면"

등록 2019.07.13 19:47수정 2019.07.13 19:47
10
25,000
1968년 5월 조업중 납북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북한에서 귀환한 어부들이 있습니다. 귀환하자마자 간첩으로 몰린 이들은 이후 온갖 고초를 겪으며 50년을 전과자로 살았습니다. '지금여기에'와 '원곡법률사무소'를 만나 어렵게 재심을 신청한 끝에 지난 7월 11일 군산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이들의 한많은 사연을 소개합니다.[편집자말]
2018년 4월 3일, 벚꽃 가득한 군산 은파호수공원을 지나면서 군산이 참 아름다운 도시라는 생각을 했다. 많은 적산가옥과 동국사, 그대문화거리와 해망동 선창가, 여행을 온다면 오롯하고 한적하게 둘러볼 아름다운 도시다.

그러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나는 흐드러진 벚꽃을 뒤로 하고 '정다운병원'에 차를 세웠다. 이날 만나기로 한 피해자가 이곳 3층에 입원해 있다. 3층에 있는 병실 입구 이름표에 '남정길'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들어갔다. 병실 안쪽 침대에 누워 있는 남정길씨가 보였다.

뇌경색 증상으로 입원했다는 그는 겨우 스스로 일어섰다. 특히 말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혀와 입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인사를 드리자 말은 하지 않았지만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에서 충분히 반가움을 드러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a

입원중인 병원에서 처음 만난 남정길씨 ⓒ 지금여기에

 
"아이고 오셨어요? 언제 오셨대?"

마침 화장실에 다녀왔다는 남정길씨의 아내가 병실로 돌아왔다. 인사를 드리며 미리 사온 음료수를 전해드리며 무슨 사연으로 연락했는지 물어봤다.

"우리 남편이랑 저랑 저 군산 앞에 선유도라는 섬에 살거든요. 지금이야 새만금 방파제를 놔서 육지처럼 왔다 갔다 하지만 예전에야 배 없이는 못 다니는 섬이었당께요. 섬에서 뭐해 먹고 살 게 있나요? 그저 바다만 보고 일하는 거지. 섬에서 태어나면 십중팔구 바닷일을 하는 거죠."

아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남편은 고개를 한없이 끄덕였다.

"어릴 때부터 배를 탔어요. 몇 살 때부터 탔을랑가?"

아내가 남편을 쳐다보자 남편은 손가락 열 개를 펴 보였다.

"저 섬에는 우리같이 억울한 사람들 겁나게 많아요"

집안이 가난한 것이 죄가 되었다. 가난하지만 않았어도 10살짜리 어린 꼬마가 목선 배를 타고 밥 짓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배를 타지 않았다면 연평도에서 북한배에 납치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한으로 귀환했을 때 군산경찰서에서 집에도 가 보지 못하고 갇혀 있다가 경찰서도 아닌 여관방에서 죽도록 맞으며 고문을 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빨갱이, 납북귀환어부, 전과자라는 딱지를 안고 살지 않아도 되었을 터이다.

"억울하죠. 우리 양반 평생 바다만 바라보고 사는 양반인데 뭔 간첩을 하겄어요? 말도 아니죠. 선유도 가 봐요. 우리 같이 억울한 사람들이 겁나게 많아부러요."

그날 남정길씨와의 긴 대화는 불가능했다. 다만 그의 말을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아내가 천천히 통역하듯 대화를 이어주어 납북 후 귀환한 뒤 그가 지금까지 살면서 겪은 억울한 일을 들을 수 있었다.

"18살 때 벌어진 일이에요. 1968년 5월 29일경 북한경비정에 납치되었다가 10월 30일 돌아왔어요. 귀환한 뒤 인천항에 잠깐 들렀다가 바로 군산경찰서로 내려와 조사를 받았지요. 제일 처음 여관에서 며칠 조사를 하데요. 여관방 하나에 한 명씩 가둬놓고 형사 1명이 감시를 했어요. 거기서 한 3주 조사받는데 어느 날 수사관 한 놈이 그러는 거예요.

'북한에서 지령, 접선 받고 온 놈들이니 죽여도 좋다. 입을 열 때까지 고문해라.'

아, 그 놈이 형사반장이라는 놈인데 그날부터 의자에 손발 꽁꽁 묶여서 몽둥이로 기절할 때까지 맞았어요. 정신을 잃고 깨어나면 머리는 온통 물로 흠뻑 젖어 있어요. 그런 날이 한 20일 반복되다가 교도소로 갔지요."


남정길씨는 여기까지 설명하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물을 마시고는 진정했다. 가쁜 숨은 몸이 아파서이기도 하나 그날을 기억하는 피해자의 고통스러운 기억 탓이리라.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남궁길영 수사관이에요. 고의로 월선 했느냐, 간첩교육 뭘 받았느냐 물어 봐서 그런 것 없다고 하면 온몸을 묶고 때리고 물고문을 했는데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물을 얼굴에 막 부어요. 나중에 그 수사관 이름이 남궁길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검사 앞에서 조사를 받을 때도 아, 그 놈이 거기 같이 앉아 있는 거예요. 날 고문한 놈이 옆에 있는데 무서워서 어떻게 진실을 말해요. 못하죠."

그런 시절이었다. 법은 있으나 시민을 위해 기능하지는 않는 그런 시대였다. 법은 가난한 자에게 눈 감은 그런 시대였다. 사회안전망이라는 법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어부들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어부들은 사회안전망 밖에 사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재판을 받으려고 법정에 들어서는데 방청석에 남궁길영이 하고 고문할 때 같이 있던 수사관 놈들 3명이 같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 제 생각에 '아, 이거 부인하면 저놈들한테 또 당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판사가 뭘 물어보더라도 그저 '네네'하고 말았지요."
 
a

피해자 가족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선유도 ⓒ 지금여기에


"징역 살고 나와 2년도 못 살고 죽은 남편"

남정길씨와 대화를 마친 후 남씨 부부가 준 전화번호와 주소를 가지고 그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선유도로 향했다. 군산에서 선유도까지 새만금 방파제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이제는 선유도가 섬이라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단지 좌우로 망망한 바다가 펼쳐져 있어 바다 위를 달리고 있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그곳이 육지와 동떨어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남씨 부부가 알려준 선유도 옥돌해수욕장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보니 바로 바다 건너에 손에 잡힐 듯 '앞삼섬'이 보였다. 그곳에서 만나기로 한 제5공진호 선원 가족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로 만나기로 한 피해자의 아내들은 아침 일찍 마을 어촌계에서 바지락 채집을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 옥돌해수욕장 주변을 걸었다. 아름다운 모래 해변 앞으로 베트남 하롱베이에 있는 섬처럼 생긴 바위들이 늘어선 이국적 풍경이었다.

바닷길을 거닐고 있는데 피해자 가족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작업이 모두 끝나 집에 도착해 있다는 것이다. 집이라 봐야 해수욕장에서 걸어서 5분 내에 도착하는 가까운 곳이었다. 제5공진호를 함께 타고 납북되었다가 귀환한 고 남계상씨의 집이었다. 남계상씨의 처 조수자씨와 고 박남주씨의 처 전영이씨가 함께 있었다.

"어떻게 같이 계세요? 가까운데 사시나 봐요?" 하고 물으니 조수자씨는 "워낙에 박남주 집이랑 앞뒷집으로 평소에 가깝게 지내요. 친하게 지내니까 남편이랑 박남주 씨랑 배도 같이 타지 않았겠어요?"라고 한다.

전영이씨 "남편 박남주는 기관장이라고 해서 더 많이 맞고 징역도 더 많이 살았다니께요. 그래서 그 후유증으로 징역살이 나와서 2년도 못 살고 죽어 버렸단 게요. 남편 죽을 때 내 나이가 36이었어요. 청상과부가 되어 버린 거지."

조수자씨 "남편이 납북되었다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리를 이장한테 들었어요. 그런데 도대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거예요. 군산 바닥을 미친년처럼 막 찾아 다녀 봐도 남편이 어딨는지 알지를 못하겠는 걸. 그러다가 어느 날 이장을 통해 군산 어느 여관으로 남편 면회 오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여기 박남주 처랑 둘이서 짐 간단히 싸서 여관으로 찾아갔지요. 가보니 여관에서 조사받고 있더만요. 여관에서 얼마나 고생하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요. 내가 알던 얼굴이 아니었어요. 얼굴 살도 다 빠지고 뼈만 앙상하고 그러데요."

그렇게 바라던 남편이 교도소에서 나왔지만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항상 경찰이 따라다니고 취직도 어려워졌다. 아이들 역시 연좌제의 영향인지 좋은 곳 취직은 꿈도 꾸지 못했다. 모두가 남편의 전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a

선유도에서 만난 고 남계상의 아내와 고 박남주의 아내에게서 사건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 지금여기에

 
전영이씨는 재심을 시작하는 심정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런 세상을 50년 넘게 생계 유지도 제대로 못 하며 죽지 못해 모질게 살아 왔네요. 살고도 싶지 않은 세월을 살았네요. 애들이 살아야 하니까 살았지 안 그랬으면 벌써 세상 인연 끊고 저세상으로 갔을 거예요. 막상 시작하려고 하니 우리 마음도 괴롭네요. 기왕에 시작하는 거 아이들 전과자 자식이라는 꼬리만이라도 떼어줬으면 하네요."

국가보안법 전과자의 꼬리표를 떼는 일 간단치 않다. 그러나 잘못된 꼬리표는 반드시 떼어야 하는 것이 정의다.
댓글10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주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국가폭력피해자를 지원하는 "지금여기에"라는 단체에서 일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AD

AD

인기기사

  1. 1 '저유소 화재' 풍등 날린 외국인 노동자 "한국은 내게 좋은 나라"
  2. 2 "나 같으면 당장 뺀다" 성형외과 의사가 분개한 이유
  3. 3 일본 역사교과서 속 위안부... 한국인들 이상한 사람 됐다
  4. 4 "동생 안 내놓으면 니가 죽는다" 공포의 서북청년회
  5. 5 "홍콩 창피" '송환법 지지' 중국 아이돌 향한 따가운 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