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따 겁나 고생하셨구망" 노인들이 법원서 현수막 든 사연

[제5공진호 재심 스토리 ⑤] 무죄 선고에도 그들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

등록 2019.07.18 07:17수정 2020.01.14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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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5월 조업중 납북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북한에서 귀환한 어부들이 있습니다. 귀환하자마자 간첩으로 몰린 이들은 이후 온갖 고초를 겪으며 50년을 전과자로 살았습니다. '지금여기에'와 '원곡법률사무소'를 만나 어렵게 재심을 신청한 끝에 지난 7월 11일 군산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이들의 한많은 사연을 소개합니다.[편집자말]

7월 11일 군산지원 201호 13:40 선고공판. 50년 만의 재심 재판 결과가 선고될 이날 이 자리에 제5공진호 조작간첩 피해자 남정길씨와 유가족 수 명이 모였다. 재판 시작 30분 전부터 자리한 피해자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까지 제5공진호 재심의 변호를 맡아온 서창효 변호사(원곡법률사무소)는 피해자들을 다독이며 이날 재판의 내용을 설명했다.

"아시는 것처럼 재심 재판이 열렸다는 것 자체가 재심 사유가 인정된 것인 만큼 큰 의미가 있는 거고요. 그만큼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같이 차분히 기다리시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복도를 가득 메웠다. 특히 고문 후유증 탓에 생긴 뇌출혈로 거동이 불편한 남정길씨는 연신 무릎을 매만졌다. 이날의 선고 때문이었을까. 요 며칠 내내 그는 자리에 누워 있어야 했다고 한다. 취재차 전날 남정길씨를 만나러 왔다는 KBS 기자는 피해자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인터뷰를 할 수 없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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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한 마음으로 선고 공판을 기다리는 제5공진호 피해자(2019.7.11) ⓒ 지금여기에


몇 분의 시간이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반백년 만의 재심 판결을 앞둔 피해자들에게는 몇 십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201호의 법정 문이 열리고 잠시 후 재판부가 입장하며 운명적인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뭐라는 거예요?"

판사의 호명에 따라 남정길씨와 이미 고인이 된 피해자들의 유가족이 재판정 안으로 들어와 자리했다. 간단한 신원 확인 후 판사는 속사포처럼 판결문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법정에 자리한 젊은 사람들조차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속도의 빠르기였다. 그렇지만 몇 가지 단어들은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수사과정은 헌법과 법이 정한 절차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피고인에 대한 경찰의 수사는 영장 없이 진행된 바 영장주의에 위배되며 불법구금 및 방대한 가혹행위 등이 인정됩니다. 뿐만 아니라 증거수집 역시 영장 없이 진행되었음이 인정됩니다."

그 순간 변호사와 자리에서 방청하고 있는 활동가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희색이 떠올랐으나, 남정길씨와 피해자들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잘 들리지 않는 판사의 말에 집중했다. 재판정에 자리한 사람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판사는 남은 판결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자백의 임의성에 다툼이 있을 때에는 피고인이 그 임의성을 의심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되는 구체적인 사실을 입증할 것이 아니고, 검사가 그 임의성에 대한 의문점을 해소하는 입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검사는 이를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남정길 등의 자백은 불법구금 등으로 인해 임의성이 없고, 검사 작성 피의자신문조서 역시 심리적 압박 상태에서 작성된 것으로 역시 임의성이 없다고 보입니다."
(임의성이 없는 자백이란, 고문 협박 등에 의한 진술이나 허위 진술 등을 뜻함 - 편집자 주)

잠시 숨을 고른 판사는 다음 말을 마지막으로 긴 판결문 읽기를 끝냈다.

"판결하겠습니다. 남정길 외 각 피고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검사 측의 이의가 없으면 일주일 뒤에 선고가 확정된다는 말을 뒤로 하고 재판이 끝났다는 말에 남정길씨와 피해자들은 종종 걸음으로 법정을 나왔다. 옆에서 변호사가 무죄가 나왔다고 말을 했지만 여전히 피해자들은 별반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나 하는 마음으로 서둘러 법정을 나오니 유가족 한 명이 변호사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래서 뭐라는 거예요?"

다른 유가족들도 덩달아 판사 목소리가 너무 작고 말이 빨라 뭔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며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말에 변호사는 환하게 웃으며 "무죄 받으셨습니다"라고 답했다. 그제야 피해자들은 서로 얼싸안고 큰 목소리로 환호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도 떳떳...하게 살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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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 선고 후 만세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피해자 가족들 ⓒ 지금여기에

 
법정을 나온 피해자들은 저마다 속에 쌓인 이야기를 하며 함께한 변호사와 시민단체 '지금여기에'에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남정길씨는 말이 불편한 와중에도 이렇게 이야기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이제...우리도 떳떳...하게 살 수 있...으니까."

연신 눈물을 흘리며 그는 어눌한 어투로 심경을 이어갔다.

"제가... 납북되었다... 돌아와서... 한 번... 끌려가... 그 고초를 당하고 3년 뒤에 또... 끌려가서 고통을... 받고(남정길씨는 두 번의 고초를 당했다. 두번째 끌려간 사건에 관해서도 재심을 진행하려고 한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말이... 안 나와요. 한 번은... 교도소에 있던... 다른 재소자들이... 제 이야기를... 듣고... 당신 같은... 사건은 항소해도... 소용없다고... 말하는데 그 뒤에도... 어디 하소연... 할 곳도 없고... 죽은 것처럼 살았습니다."

흐느낌과 억울함이 한 번에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 다른 유가족들이 말을 이어받았다.

"안 당해 본 사람은 몰라요. 그 고생을 말로 어떻게 전하겠어. 그래도 이제는 잘될 일만 남았으니 다행이야. 서창덕씨도 살아서 오늘 재판을 봤어야 하는데."

서창덕씨는 몇 년 전 납북어부 사건으로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으나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조작간첩 피해자다. 서창덕씨와 제5공진호 사건 말고도 수없이 많은 납북어부 사건들이 재심 문턱을 넘지 못한 채 세월 속에 잊히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 괴롭혔던 수사관들 천벌 받아야 해. 남궁길영. 내가 아직도 그 이름을 기억한다니까. 사람 허리를 절단 내고 괴롭히고. 죽어도 잊지 못해."

진실은 밝혀졌으나 그들의 삶을 파괴하고 고통으로 내몬 이들의 사과는 여전히 없다. 이를 위해 과거사 법의 재개정 및 고문폭력 등의 국가폭력을 사회적 폭력으로 보고 해결하려는 정부의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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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 선고 직후 찍은 기념사진 ⓒ 지금여기에

 
"선생님들, 기념 사진 찍으시고 이 현수막 가져가시면 어떨까요?"
"당연하지. 이거 가져가서 일주일 뒤에 마을에 걸어놓을 거예요. 이제 우리도 떳떳하잖아!"


이들의 재심을 지원한 시민단체 '지금여기에'는 이날 있을 판결이 무죄로 나오길 바라며 무죄 축하 현수막을 뽑아왔다. 무죄가 나와서 다행이지 안 나왔으면 어쩔 뻔 했느냐는 변호사와 피해자들의 농담에 반드시 무죄가 나올 거라 생각했다는 활동가의 넉살을 뒤로 하고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마을 선유도로 향했다.
#조작간첩 #제5공진호 #재심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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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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