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한 길만 보던 남편, 피시티 길 위에서 잠들다

[미 서부 종단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에세이⑤-1] 남편의 4300km 트레킹 도전기

등록 2019.07.20 11:47수정 2019.07.22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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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3대 트레일 중 가장 길고 험하다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이하 피시티) 4300km. 미국 LA 문화단체 '컬쳐앤소사이티' 기획으로 고난의 행군을 자처한 한국 하이커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 기자말

'아침 일찍 웬 전화지?'


지난해 4월 14일 토요일 아침 7시 20분. 휴대전화 벨소리에 잠에서 깼다. 한가로운 주말 따스한 볕이 창문을 통해 환하게 비추는 아침이었다. 거실로 나가 식탁에 있던 전화기를 들었다. 아침 일찍 어디지? '420-1024-XXXX' 낯선 숫자 조합, 국제전화였다. 광고전화인가 싶다가 혹시 몰라 통화 버튼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LA 영사관입니다… 혹시?"

희미한 목소리가 붙었다 떨어졌다 하더니 끊겼다. 곧바로 전화가 다시 울렸다.

"LA 영사관입니다. 박선칠씨 가족이신가요?"
"네, 그런데 무슨 일인가요?"
"남편이 사망하셨습니다."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왔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정신이 몽롱했다. 잠깐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식탁에 놓인 물을 한 잔 마셨다. 메모지와 펜을 가져와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몸이 떨려 벽에 등을 기댔다. 부들거리는 손으로 펜을 들고 전화를 받았다.


"왜요? 어떻게 사망을 해요? 사고를 당하셨나요?"
"심장마비 같습니다."

 

캘리포니아와 멕시코 국경지대인 캠포에서 피시티를 출발하는 남편. 하이커들과 단체사진 ⓒ 신선경

 
산봉우리만 보면 정상까지 가야 했던 남편

내 남편 박선칠. 1953년에 태어나 66년간 이 세상에 살다 갔다. 19살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남편은 10살 위인 학보사 간사였다. 남편은 나와 첫 대면에서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나도 3년 동안 학생기자를 하며 남편을 졸졸 따라다녔다. 늘 나에게 자상했다. 그러다 정이 들었고, 결혼을 했으며 아이를 낳았다. 누구나 겪는 갈등, 기쁨, 행복을 나누며 동반자로 37년을 '딱' 붙어 살았다.

등산을 좋아했던 남편은 눈 앞에 산봉우리가 보이면 꼭 정상까지 올라가야 했다. 사업도 한눈팔지 않고 한 길만 갔다. 세상을 떠나기 전 캠퍼스 저널과 대학문화신문, 공모전 전문 매거진을 발행했다.

지금이야 인쇄물이 많지만 30년 전만 해도 전국 대학마다 배포되는 우리 출판물에 기업들이 서로 광고를 하려고 했다.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고 사회로부터 칭찬받는 기업'을 사명으로 공모전 플랫폼 '씽굿' 등을 만들어 다양한 서비스를 했다.

장거리 도보여행에 빠진 남편

남편은 3년 전 가을 교회 목사의 설교를 듣다가 카미노 순례길을 알게 됐다. 스페인과 프랑스 접경지대에 있는 생장 피데포르를 출발해 예수의 제자였던 야곱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서쪽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향하는 약 800km에 이르는 프랑스 길이었다.

2017년 4월 4일부터 5월 15일까지 카미노 프랑스 순례길을 다녀온 남편은 그곳 북쪽 길을 가기 위해 공부를 했다. 해변을 따라 걷는 길이었다. 그리고 9월 21일 스페인 북쪽 해변을 따라 바욘에서 콤포 스텔라, 묵시아까지 970Km 북부 순례길을 완주했다.
  

카미노 북쪽 순례길을 걷던 남편 ⓒ 신선경

 
남편은 순례를 하기 전 해당 길에 대한 책과 다큐멘터리를 닥치는 대로 보고 읽었다. 실크로드 도보여행자이자 작가인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걷기 책 <나는 걷는다>와 <나는 걷는다 끝>, <떠나든 머물든>를 읽고 감동받았다. 레저를 위해 걷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려는 치열함이 자신과 닮았다고 했다.

남편의 순례길 닉네임은 '오 해피데이'였다. 남편은 길에서 만난 사람과 금방 친구가 되었고 사진을 같이 찍었으며 와인을 마시고 즐겁게 놀았다. 남편은 순례길 사진을 매일 나에게 보내주며 자신은 지금 행복하다고 말했다. 나도 마치 그와 걷고 있는 것 같았다. 행복했다. 

13kg 무게 메고, 제주도 한 바퀴 돌다

2년 전 겨울인 것 같다. 먼 길을 걷고 올 때마다 남편은 걸었던 거리만큼 가슴이 텅 비어 가는 것 같았다. 공허함을 느꼈다. 그리곤 어딘가 계속 찾아 걷고 싶어했다. 대학 관련 사업을 하던 남편은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 빠르게 변하는 매체에 적응하는 것을 벅차 하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KBS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순례>를 보게 됐다. 다큐멘터리는 미국 서부지역 멕시코 국경 캠포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4300Km를 걷는 피시티(Pacific Crest Trail∙피시티)를 다루고 있었다. 남편의 눈은 반짝였고 도전과 모험심은 가동되기 시작했다.  

남편은 결심이 생기면 늘 운동부터 시작했다. 북한산 둘레 길, 서울 집에서 양평 시골집까지 수 차례 걸으며 몸을 만들었다. 발에 물집도 잡히고 관절이 아파 고생도 했지만 컨디션을 조절해 점점 걷는 거리를 늘렸다. 배낭에 13kg 무게를 집어넣고 한 달간 제주도 해안선을 따라 한 바퀴 돌았다. 준비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피시티를 떠나기 위해 준비했던 하이킹 용품들 ⓒ 신선경

 
피시티 정보도 꼼꼼히 모았다. 미국에 3대 트레일인 아팔란치아 트레일, 콘티넨탈 디바이드 트레일, 피시티를 모두 종주한 같은 연배의 윤은중씨, 피시티 책 <나를 찾는 길>을 쓴 김광수 군, <PCT하이커 되기>를 쓴 김희남 군 등 여러 하이커를 만나 정보를 얻었다. 출발하기 전 예비 하이커들과 단체 카카오톡 방을 만들어 의견을 교환했다.

하지만 피시티는 스페인 순례길과 달랐다. 거리도 2530Km나 더 길었고 사막과 산림을 지나 눈이 덮인 산과 강을 건너야 했고 때로는 곰과 방울뱀도 피해야 한다. 짊어지고 가는 장비와 먹을 음식까지 최대한 줄여야 했다. 집안 거실에는 산악 장비들이 계속 쌓여 갔다.

떠나는 남편은 나에게 말했다. 이제 일에서 손을 조금 떼겠다고. 그동안 최선을 다했고 한 길로만 열심히 뛰어 왔다고. 그는 남은 생의 목표가 피시티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여보, 이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느끼고 싶어. 아직 보지 못한 자연을 보고 싶어. 하나님이 만드신 멋진 세계를 보는 것이 내 남은 생의 목표야."
 

피시티 출발 전 나와 함께 찍은 사진 ⓒ 신선경


-2편으로 이어집니다.
#신선경 #피시티 #PCT #PACIFIC CREST TRAIL #430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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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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