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관객 7명, 3일째엔 매진... 대학로 전설의 시작

[종로의 기록, 우리동네 예술가] 가수 전인권 인터뷰 ①

등록 2019.07.18 08:21수정 2019.07.18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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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록의 대부, 전인권 ⓒ 종로문화재단

 
온몸에서 끓어오르는 한(恨)을 절절하게 녹여낸 독자적인 고음 샤우팅(shouting)은 이성의 논리를 넘어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롤러코스터처럼 굴곡이 심한 인생길을 걸어왔지만, 긍정의 힘으로 일어서고 또 일어서길 몇 차례. 이제는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한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세월이 흘러도 전혀 퇴색되지 않은 음색과 자신만의 감성을 오롯이 지켜낸 한국 록의 대표주자, 가수 전인권을 지난 5월 서울 삼청동에서 만났다.

1954년 서울시 종로구 도렴동에서 태어나 생후 8개월 무렵 삼청동으로 이사했다는 그는 그 이후 지금까지 60년이 넘도록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50년째 살고 있는 삼청동 가장 끝집 

"그때 삼청동은 그야말로 달동네였어요. 인디언들이 텐트 치고 옮겨 다니면서 살잖아요. 마치 그런 인디언 부락처럼 그렇게 사는 집이 30가구쯤 있어서 구청에서 단속 오면 싸우고 그랬지요. 우리 집은 그런 쪽은 아니었지만 동네에서 가장 끝집이었어요. 산에 가까이 있었죠."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강산의 변화가 대여섯 번은 족히 바뀌었을 법한 세월동안 삼청동 역시 옛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크게 변했다. 그렇지만 동네 안쪽에 자리한 그의 집은 큰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음악계가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는 와중에도 자신만의 음악적 색채와 신뢰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그의 모습과 묘하게 닮았다.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는 삼청동 ⓒ 종로문화재단

 
"삼청동이 개발돼서 사람들이 모이고 좋은 기운을 나눈다는 건 좋아요. 그렇지만 우리 집하고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예요. 뭔가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지금도 편의점 있는 곳까지 가려면 한참을 걸어 내려와야 하고요. 원래 내가 아무 데나 섞이거나 놀아나거나 그런 게 없어요. 집을 팔아볼까도 생각했는데 이 동네가 참 매력이 있어요.

특히 우리 집 느낌이 너무 좋아요. 여행 갔다가 집에 돌아간다 생각하면 싫잖아요. 그런데 나는 집에 간다고 하면 너무 좋아요. 우리 아버지도 삼청동은 물 맑고 공기 맑고 사람 맑다 그래서 삼청이라 하셨죠. 집에 제가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소나무가 그대로 있는데, 특히 새벽에 나가서 보면 정말 좋아요. 온통 까만데 뒤에 달이 떠 있고, 참 고즈넉하죠. 이런 기운들이 음악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죠."


그가 사랑하는 그의 집과 동네는 그에게 있어 주거 공간이면서 작업실 겸 연습실이다. 삼청공원을 돌며 운동을 하고, 소음과는 무관한 집에서 노래를 만들고, 산에 올라 노래를 부르는 게 그의 주요 일과다. 

"주변이 도시적이면 거기에 맞춰서 생활을 하고 목소리도 굴리고 그러겠지만, 여기 살다 보니까 그런 건 싫고 재미없어요. 집에서도 연습하고 산에 가서도 판소리 한두 곡은 꼼꼼하게 잘못되면 다시 하고 또 다시 하면서 연습을 하죠. 어떨 때는 내 자신이 노래 같아요."

그는 지금의 재동초등학교와 합쳐진 삼청국민학교 출신이다. 유년 시절을 삼청동에서 보내며 많은 추억을 쌓았고, 산을 비롯해 자연을 배경으로 한 음악들도 만들고 있다고 한다. 아직 발표할 생각은 없지만 어린 시절 추억을 담은 노래들도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 그 시절의 이야기들은 과연 어떤 노래로 탄생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어렸을 때 여기는 전부 다 산이고 가운데는 개천이고 중앙천도 있었죠.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넘쳐서 학교도 못 갔어요. 우리 어릴 때는 먹을 게 없었으니까 북악산에 보리수, 버찌, 아카시아 이런 것들이 어디 있는지 다 알았죠. 눈이 많이 내리면 지금 감사원 뒷길 언덕에서 대나무로 스키를 만들어서 작은형이랑 많이 탔고요. 열일곱 살 즈음엔 통기타가 유행해서 동네 어디에서나 다들 기타치고 노래하고 그랬던 모습이랑 동네 형들하고 여름이면 놀러가고 그러던 시절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무대 
 

대학로 공연의 돌풍을 이끌었던 가수 전인권 ⓒ 종로문화재단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독학이었어요. 학교도 열일곱 살 때 일찍 그만뒀고... 동네에 사부가 있었는데 그분이 제게 노래를 하라고 하셔서 그분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연습하다 보니 독특한 창법이 탄생하게 됐죠."

그는 1978년 따로 또 같이로 데뷔했다. 초창기에는 음악 감상실이나 통기타 업소에서 주로 노래를 하다가 1980년 밴드 활동을 처음 시작했고, 이후 1984년 들국화를 결성하며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당시 그와 최성원은 '한국의 비틀즈'로 불리기도 했다.

"제 음악은 대학로에서 시작했다고 봅니다. 대학로 공연 활성화에 공헌을 많이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죠. 지금은 없어진 충돌극장, 파랑새극장에서 처음 공연을 했는데, 첫날에는 관객이 우리 아버지까지 일곱 명뿐이었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소문이 나서 그 다음날 50명이 오더니 3일째는 자리가 없었죠."

그 시절에는 김민기, 조영남 등 지금은 내로라하는 훌륭한 음악인들이 너나할 것 없이 대학로에서 공연을 했다고 한다. 그 중 그의 공연은 스탠딩 콘서트의 원조라 할 만 하다.

"우리가 그 때, '한국말로 했는데 외국 노래 같다' 그거 하나로 굉장히 소문이 많이 났었고, 또 하나는 출연하라는 방송국이 많았는데 안 나가고 싸우고 그래서 하나의 전설이 된 거죠. 그때는 방송국에 총 든 군인들이 계단에 몇 명씩 있었고, 방송국에 들어가는데도 절차가 복잡했어요. 방송국의 힘이 굉장히 셌었죠. 그 당시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부 우리 음악을 듣고 비상구를 찾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3000석 공연을 하면 3000명이 오는 걸 못 봤어요. 3000석이면 5000명 이상이 공연장을 찾곤 했죠."

그는 힘 있는 고음 창법과 풍부한 성량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 전기 시설이 좋지 않았던 그 시절, 무반주에 마이크도 없이 오로지 관객과 함께했던 공연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남아있다.

"예전에 문화체육관(정동극장)에서 2500석에 4000명 정도가 왔는데 조명 켜고 음향 켜고 하다 보니 전력에 문제가 생겼죠. 그래서 음향도 마이크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행진'이라는 곡을 아무것도 없이 불렀어요. 그런데 관객들이 모두 행진을 듣고 따라 부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때 정말 굉장했죠. 요즘은 가수들도 마이크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지만, 예전에는 발성 때문에 다들 연구를 많이 했죠."

(*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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