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만철'은 왜 도서관을 운영했을까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철도도서관 ①

등록 2019.07.25 15:18수정 2019.07.25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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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9월 20일 운요호(雲揚號) 사건을 일으킨 일본은 이를 빌미로 1876년 2월 3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이른바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여 한반도 침략의 교두보를 마련한다.  

일제가 학술조사를 빌미로 조선에 철도국 측량팀을 파견한 것은 1892년 8월. 조선에 파견된 고노 다카노부(河野天瑞)를 비롯한 측량팀은 386km에 달하는 경부선 예정 노선의 측량과 답사를 2개월 만에 마치고 '보고서'를 제출했다.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터진 해가 1894년이고, 대한제국이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한 을사늑약 체결이 1905년임을 감안하면, 일제가 '조선 철도' 부설에 얼마나 빨리 관심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일제는 한반도와 대륙 침략을 위한 핵심 인프라로 철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일찍부터 준비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며 한반도 지배에 한발 더 다가선 일제는 1898년 미국인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로부터 경인선 부설권을 사들였다. 1898년 공사를 시작으로 1899년 경인선 개통, 1905년 경부선 개통, 1906년 경의선 개통까지, 일제는 착공 8년 만에 한반도를 '종단'하는 철도노선을 '속도전'으로 완성했다. 

탈아입구를 위한 일제의 핵심 인프라, 철도
 

압록강철교1911년 압록강철교가 완공되면서 한반도와 만주의 철로가 연결됐다. 사진 오른편의 다리가 1911년 11월 완공된 옛 ‘압록강철교’(鴨綠江鐵橋)다. 단선 철교로 대형선박이 지날 수 있도록 중국 방향 네번째 교각이 90도 회전할 수 있는 다리였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으로 다리가 끊어지면서 지금은 ‘압록강단교’(鴨綠江斷橋)라고 불린다. 왼편에 있는 다리는 1943년 놓인 복선철교로 1990년부터 ‘조중우의교’(朝中友誼橋)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 Wikipedia

 
일본 내 최초의 철도였던 도쿄-요코하마 노선이 개통된 것이 1872년, 철도 국유화를 통해 8045킬로미터에 달하는 전국 철도망을 완성한 것이 1906년이다. 일본 본토의 도카이도선(東海道線 556.4km) 건설에 26년, 산요본선(山陽本線 528.1km) 건설에 18년이 걸린 걸 생각하면, 경부선(579.9km) 3년, 경의선(716.4km) 2년이라는 건설 기간은 일제가 얼마나 '속성'으로 한반도 종단 철도를 완성했는지 알 수 있다. 

속도를 높이기 위해 지형을 그대로 두고 철로를 놓았기 때문에 곡선 구간이 많았고, 속성 공사의 부작용으로 보수 공사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일제는 철도 공사장 부근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해서 혹독하게 핍박하며 공사를 강행했다.

1909년 일제는 대한제국 강제 병합을 앞두고 대한시설대강을 마련한다. ▲ 대한제국 지배를 위한 군대 주둔과 헌병, 경찰의 증강 ▲ 대한제국에 대한 외국의 교섭 상황 파악 ▲ 대한제국 철도를 일본 제국 철도원으로 이관하고 남만주철도와 연계를 통해 철도 발전 도모 ▲ 다수 일본인의 대한제국 이식 ▲ 대한제국 내 일본인 관리의 권한 확장을 통한 효율적 행정의 추구. 

한일병합을 앞두고 일제가 시행한 5대 정책 중 세 번째가 '철도'에 대한 내용이다. 철도 인프라 확보와 이를 통한 대륙 침략이 일제의 한반도 통치에서 얼마나 중요한 우선순위였는지 알 수 있다. 

1911년에는 압록강철교가 완성되면서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잇는 '철로'가 뚫렸다. 이때부터 도쿄에서 한반도를 거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경유, 유럽의 모스크바와 베를린, 파리까지 철도로 여행하는 게 가능해졌다. 분단 때문에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우리는 경성이나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유럽에 갈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이나 조선에서 유럽에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사쿠라(櫻)나 후지(富士), 나나렛샤(七列車) 같은 열차를 타고 시모노세키로 이동해서 연락선 나나빈(七便)을 타고 바다를 건너 부산으로 간 다음, 부산역에서 한반도를 종단하는 특급열차 히카리(光)를 타고 신징(新京)까지 간 후 703 열차를 타고 하얼빈에서 국제열차를 갈아타는 방법이었다. 기차로 일본에서 파리까지 가는 데 20일, 배로 가는 데 60일 정도 걸렸다고 하니 기차가 얼마나 빨리 동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했는지 알 수 있다. 

일제는 1914년에 호남 곡창 지대를 지나는 호남선과 북부 광공업 지대를 잇는 경원선을 부설했고, 1919년 말에는 총연장 2197킬로미터에 달하는 한반도 철도망을 완성했다. 

일제는 한반도 북부 지역을 병참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조선철도 12년 계획>(1927-1938)을 따로 수립했다. 이에 따라 1933년 도문선(웅기-동광진), 1937년 혜산선(성진-혜산)과 동해북부선(안변-고성), 1939년 만포선(순천-만포진), 1941년 평원선(평양-원산)이 차례로 완공되었다. 1910년 1095km였던 한반도 철도망은 1938년 5083.9km, 1945년에는 6406.7km로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이렇게 완성된 한반도 철도망은 일제의 자본, 상품, 군대, 과잉인구를 실어 나르고 원료, 식량, 노동력을 수탈하는 '대동맥'의 역할을 한다. 일본 농업 이민의 특징 중 하나가 일본인을 철로 주변에 정착시켰다는 점이다. '식민'(植民)이라는 용어 자체가 사람을 심는다는 의미인데, 일제가 조선에 부설한 철도망은 일본 본토의 과잉 인구와 식량 문제, 경제 위기 해결에 큰 기여를 했다.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의 일원이 되겠다는 '탈아입구'(脱亜入欧)를 위한 일제의 핵심 인프라는 그렇게 완성됐다. 

일제의 3대 식민통치 기구, 만철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다롄 본사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일제는 포츠머스회담을 통해 ‘남만주철도’ 경영권을 러시아로부터 넘겨 받는다. 남만주철도 운영과 만주 경영을 위해 일제가 세운 회사가 바로 ‘만철’이다. 만철은 다롄에 본사를 뒀다. ⓒ Wikipedia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907년 러시아로부터 남만주철도 경영권을 넘겨받는다. 일제가 설립한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 이하 '만철')는 남만주철도의 운영을 위한 특수회사로 대륙 침략의 전진 기지 역할을 했다. 

만철은 1906년 6월 7일 천황 칙령으로 설립한 회사로 만주에서 일본의 식민지 개척과 경영을 대행하고 정보 수집과 선전 작업을 통해 군사 활동까지 지원하는 '식민회사'였다. 만철의 자본금은 2억 엔, 당시 일본 최대 회사였다. 초대 만철 총재는 민정장관으로 타이완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고토 신페이(後藤新平)다. 만철은 1907년 4월 도쿄에서 다롄(大連)으로 본사를 옮겨 업무를 시작했다.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가 쓴 <만철>에 따르면 만철은 일개 회사가 아니다. 조선총독부, 타이완총독부와 함께 '일제의 3대 식민 통치기구'로 꼽힌 조직이다. 주변 국가와 갈등을 줄이기 위해 '회사' 형태를 띠긴 했지만 만주를 전략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통치기구'나 다름이 없었다. 

만철은 일제 강점기 조선 철도에도 직접 관여했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일제는 조선총독부에 '철도국'을 신설한다. 그리고 1917년 7월 31일부터 한반도의 철도 운영권을 만철에 넘긴다. 만철은 1917년부터 1925년까지 7년 8개월 동안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 철도망을 위탁받아 운영했다. 조선과 만주의 철도망을 유기적으로 통합해서 일본 제국 내 철도 인프라를 효율적으로 운용하려는 의도였다.

만철을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중일전쟁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으로부터 시작하는데, 만주사변으로 알려진 류타오후(柳條湖) 사건이 일어난 현장이 바로 만철의 펑톈(奉天) 철로였다. 철도 운송뿐 아니라 철강, 석탄을 중심으로 문어발식으로 뻗어간 만철 계열사는 일본식 '자이바츠'(財閥, 재벌)의 원형을 형성했고, 일제가 '무적'이라고 자랑했던 '관동군'은 철도와 부속 시설을 지키기 위해 만든 만철 철도수비대를 모태로 창설됐다. 

만철이 1934년 11월부터 운행한 특급 '아시아'는 바퀴 지름만 2미터가 넘는 거대한 증기기관차로, 다롄과 신징 구간 700km를 시속 100km 이상의 속도로 주파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른 특급열차 중 하나였다. 만철이 확보한 철도 기술력은 전후 일본의 고속열차 신칸센(新幹線)으로 이어져 '부활'한다.  

만철은 일제의 식민 통치기구를 넘어 '만주국과 전후 일본 경제 체제를 만들었다'는 평이 있을 정도로 일본의 제국 통치와 전후 질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이 일본 경제모델을 벤치마킹한 점을 고려하면, 만철은 우리가 몰랐던 한국 경제체제의 '원형'일 수 있다. 

만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만철 사업 분리와 닛산의 만주 진출을 통해 '만업'(만주중공업개발주식회사)의 탄생을 이끈 사람은 만주국 핵심 관료,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다. A급 전범임에도 석방된 기시 노부스케는 1957년 일본 총리 자리에 오른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쇼와(昭和)의 요괴'라 불린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다. 

전후 일본 경제체제를 만든 '만철'
 

만철 특급 아시아만철의 기술력을 상징했던 특급 ‘아시아’. 최고 속도는 130km에 달했다. 1934년 다롄과 신징 구간에 투입되었고, 1935년부터는 하얼빈까지 연장 운행했다. ⓒ Wikipedia

 
만철 부서 중 '조사부'는 만주와 몽고, 중국, 러시아, 동남아시아의 각종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보존·유통하는 거대한 정보기관이었고, 이를 위해 '도서관'도 운영했다. 1907년 4월 창설된 조사부의 초대 수장은 교토제국대학 오카마스 산타로(岡松參太郞) 교수로, 그는 만철에 동양 제일의 도서관을 세우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만철이 운영한 대표적인 도서관으로는 다롄도서관(1907년 10월 개관), 펑톈도서관(1920년 4월 개관), 하얼빈(哈爾濱)도서관(1923년 6월 개관)이 있다. 다롄도서관은 동아시아에 대한 학술 종합 도서관, 펑톈도서관은 교통 전문 도서관, 하얼빈도서관은 북만주와 북방 전문 도서관을 각각 지향했다. 

만철이 도쿄지사에 1908년 설치한 '동아경제조사국'도 전 세계 각지에 대해 폭넓은 정보를 수집했는데, 1937년 시점에 만철 동아경제조사국이 소장한 화한서 장서량만 해도 45만 권에 이르렀다고 한다. 초대 총재 고토 신페이가 표명한 '문장적 무비'(文裝的武備)라는 표현을 상기할 때 만철의 도서관은 만주와 대륙 침략의 '첨병'이나 다름없었다.

만철이 운영한 도서관은 어느 정도 수준이었을까. 1920년 제15회 전국도서관대회는 만선(滿鮮)대회라는 이름으로 다롄에서 열렸는데, 이때 참석한 일본 본토의 도서관 관계자도 만철이 운영하는 다롄도서관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본토 도서관보다 만철 도서관을 '한 수 위'로 평가한 걸 보면 말이다. 

이들 도서관 외에 만철이 건설한 철로 주변과 부속지에 일본인이 사는 거주지가 생겼고, 일본인 거주지에는 학교 도서실이나 거주민이 비용을 부담하는 연선(沿線) 도서관이 있었다. 만철이 관리하던 연선 도서관은 1937년 12월 1일부터 만주국에 속하게 된다. 

그 자체로 거대한 '도서관'이었던 만철 조사부
 

만철 초대 총재 고토 신페이고토 신페이는 타이완 총독이었던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에게 발탁되어 총독부 민정국장을 역임했다. 타이완총독부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고토는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만주 지배 전략을 고심하던 고다마로부터 제안을 받고 만철 초대 총재로 취임했다. ⓒ Wikipedia

 
만철이 건립한 도서관과 별개로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중일전쟁을 치르면서 만주, 중국, 동남아시아 점령지에서 귀중한 문헌과 자료를 약탈해서 이를 보관하기 위한 서고와 도서관을 짓기도 했다. 1932년 6월 문을 연 만주국립펑톈도서관도 그중 하나다. 일제는 펑톈 궁전에 있던 사고전서, 청조실록 같은 20만 건의 청나라 문헌을 접수해서 도서관을 만들었다. 

중일전쟁이 본격화된 1937년 이후에는 중국과 동남아시아 일본군 점령지에서 귀중 문헌과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일본 본토로 약탈했다. 이를 위해 일제는 '점령지구도서문헌접수위원회'를 따로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연합국 사령부(GHQ)는 일제가 약탈한 도서의 반환을 추진했다. 일제 강점기 전부터 일제가 조선에서 약탈한 도서는 우리에게 제대로 반환되지 않았고, 얼마나 약탈해서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만철에서 흥미로운 조직은 '조사부'인데 만철의 '두뇌'이자 방대한 '도서관'이기도 했다. 만주와 대륙에서 일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방대한 조사와 정보 수집을 한 부서가 조사부다. 1942년부터 1943년까지 직원 44명이 관동군에 검거되면서 조사부의 업무가 사실상 끝나지만, 한때 만철 조사부는 2천3백 명이 넘는 인원을 자랑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시점에 직원 수만 40만 명에 육박한 '만철'은 어떻게 되었을까. 1945년 8월 9일 0시 소련군은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만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8월 20일 소련군은 창춘 관동군 사령부를 점령하고 만주 각지에 있던 만철과 만업의 광공업 시설을 접수해서 소련으로 반출했다. 중국과 소련은 만철을 공동 경영하기로 했고, 1945년 9월 22일 중국창춘철도(中長鐵道) 대표로 소련군 카르긴(Kalgin) 중장이 부임하면서 만철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었다. 

만철이 세운 철도도서관 
 

경성부수재도(京城府水災圖)을축년 대홍수 발생 후 작성된 <경성부수재도>. 폭우와 홍수로 침수 피해를 입은 지역을 표시했다. ‘파란색’으로 표시한 지역이 침수된 곳인데, 용산역과 용산 철도 기지는 모두 침수 피해 지역이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1917년 7월 31일 만철은 철도국의 직제를 폐지하고 경성부(지금의 서울)에 경성관리국을 설치하고 조선 철도의 운영을 시작했다. 1917년 10월 초대 경성철도관리국장으로 취임한 사람은 만철 이사 구보 요조(久保要藏)다. 그는 조선 철도 경영에서 얻은 이익금으로 학교와 도서관 건립을 추진했다. 이 방침에 따라 1919년 4월 1일에는 용산에 '경성철도학교'를 세우고, 1920년 7월 21일 철도학교 옆에 66평 규모의 '만철경성도서관'을 개관했다. 만철이라는 회사가 건립했으나 사실상 일제가 경성에 설립한 첫 도서관이라 할 수 있다. 

1940년 4월 2일 <동아일보>는 "근대 도서관의 효시"라는 제목으로 철도도서관을 조명하는 기사를 냈다. 윤익선의 경성도서관이 1920년 11월 5일 개관했고, 이범승의 경성도서관이 1921년 9월 10일, 경성부립도서관이 1922년 10월 1일 문을 열었으니, 경성으로 국한하면 1920년 7월 21일 문을 연 철도도서관이 '근대 도서관의 효시'인 셈이다.

1925년 4월 1일 만철에 위탁했던 한반도 철도 운영권이 조선총독부로 다시 넘어오게 됨에 따라 '만철경성도서관'은 조선총독부 철도국 직속의 '철도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1925년 4월 3일 총독부는 진무천황제일(神武天皇祭日)을 맞아 조선총독부도서관의 문을 열었는데, 철도도서관도 비슷한 시기에 총독부 소속으로 바뀐 것이다. 한 해 뒤인 1926년 5월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이 개관한 걸 감안하면,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는 도서관이 모두 문화통치기인 1925년 전후 문을 열었거나 총독부 소속으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으로 소속이 바뀐 1925년 여름, 7월 9일부터 11일까지 그리고 7월 15일부터 18일까지 경성에 753mm의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서울에 한 해 내리는 빗물의 절반에 해당하는 비가 불과 열흘 사이에 쏟아진 것이다. '을축년 대홍수'로 알려진 폭우와 이로 인한 홍수로 경성에서만 404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홍수의 여파로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인 한강 인도교와 한강 철교도 모두 끊겼다. 재산상의 피해도 컸는데, 을축년 대홍수로 인한 피해액은 1925년 조선총독부 전체 예산의 60%에 달했다. 

어찌나 홍수 피해가 컸던지 을축년 대홍수로 인한 경성부 피해 상황을 '경성부수재도'(京城府水災圖)라는 지도로 따로 제작할 정도였다. 이 지도를 보면 용산역 일대와 용산 철도 기지가 모두 '침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철도도서관도 이때 홍수 피해를 크게 입었다. <시대일보> 1925년 7월 26일자는 2면 기사에서 철도도서관이 홍수로 침수되어 당분간 도서관 운영이 중단됨을 보도하고 있다. 

당시 6만 권에 육박하던 철도도서관 장서 중 1만 610권의 책이 침수된 걸로 알려져 있다. 1924년 말 5만 8984권이던 철도도서관 장서량은 1925년 말 5만 6525권으로 2459권 감소하는데, 홍수 피해로 훼손되어 폐기한 장서 때문일 것이다. 당시 도서관도 흔치 않았지만 철도도서관은 '대재난'인 을축년 대홍수를 직접 겪고 이를 극복한 유일한 도서관이다. 

철도도서관은 1927년 11월 43평 규모 2층 건물을 증축하고 1931년 3월 126평의 서고를 추가로 늘렸다. 1940년 3월에는 연면적 464평 규모로 도서관 건물을 증축했다. 1943년 12월 1일 조선총독부가 철도·해운·항공·세관의 업무를 통합한 '교통국'을 출범시키면서 철도도서관은 '교통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철도도서관은 일제 강점기 광화문 앞에 있던 '체신도서관'과 함께 조선총독부 행정기구가 독자적인 건물을 두고 운영했던 양대 도서관 중 하나다. 조선총독부가 식민 통치에 있어서 '철도'와 '통신'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체신도서관은 1932년부터 조선시대 삼군부와 예조 자리, 즉 지금의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던 도서관이다. 

식민지 조선의 3대 도서관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1925년 을축년 대홍수를 겪은 후 세운 기념비. 송파근린공원에 있으며 1926년 6월 20일 세웠다. 기념비를 세워 기억할 정도로 송파와 잠실 지역도 을축년 대홍수의 피해가 컸다. 기념비 여기저기에 한국전쟁 때 탄흔이 남아 있다.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는 ‘암행어사 이건창 영세불망비’와 나란히 서 있다. ⓒ 백창민

 
개관 초기 철도도서관은 '만철'이라는 회사가 운영하는 사립도서관이었지만, 조선총독부 직속으로 바뀌면서 운영 재원을 국가로부터 조달하는 '국립도서관'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일제는 1917년 조선총독부 예산이 10억 원일 때 그중 절반의 예산을 철도에 쏟아부었다. 조선 식민통치에서 '철도'의 중요성과 기능은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철도를 '조선통치의 국책'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지금은 도로와 항공, 해운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철도가 교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었지만, 일제 강점기 도로와 자동차, 항공과 비행기, 해운과 선박의 수준을 생각해보면, '철도'가 물자와 사람의 수송, 병참과 통치 인프라로 얼마나 큰 위상을 차지했는지 알 수 있다. 

장서량과 운영 면에서 조선총독부도서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철도도서관을 일제 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3대 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데, 개관 초기 가장 많은 예산을 사용한 곳은 '철도도서관'이었다.

철도도서관에서 중요한 인물은 하야시 세이치(林靖一)다. 일본 국회도서관의 고바야시 마사키(小林昌樹)의 연구에 따르면, 하야시는 1913년 조선총독부 철도국 고원으로 시작해 초대 경성철도관리국장인 구보 요조의 눈에 띄어 도서실에 배속되었다. 1919년 하야시는 도서관 개관 임무를 맡아 도쿄제국대학에서 도서관학을 공부하고, 일본 본토의 도서관을 견학한 후 돌아와 1920년 만철경성도서관을 개관했다. 1922년에는 스물일곱의 나이로 정식 관장에 취임했다. 

하야시는 일본식 개가제의 시조로 평가받는 인물인데, 1923년 이용자가 책을 서가에 자유롭게 접근하되 열람을 위해서는 대출을 거치는 '안전개가'(安全開架)제를 도입했다. 조선뿐 아니라 태평양전쟁 발발 전 일본 본토와 식민지 도서관 중 '개가제'를 성공적으로 도입한 유일한 사례였다. 하야시는 1942년 후루노 다케오(古野健雄)가 후임 관장으로 부임할 때까지 22년 동안 철도도서관을 실질적으로 이끈 인물이다. 조선에 머문 일본인 중 '도서관장'으로 가장 길게 일한 사람 역시 하야시다. 

하야시는 도서 정리와 보관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썼고, 저술과 도서관 경영에서 탁월함을 인정받아 1941년과 1943년 일본도서관협회 총재상을 수상했다. 일본 도서관 역사상 도협 총재상을 두 번 수상한 사례는 하야시가 유일하다고 한다. 하야시는 조선교육회가 개최한 도서관 강습회에서도 단골 강사였다. 

일본 제국 안에서도 손꼽힌 철도도서관 장서
 

철도도서관과 조선총독부도서관오른쪽 사진이 철도도서관이고 왼쪽이 조선총독부도서관이다. 1925년 시점에 도서관을 촬영한 사진으로, 철도도서관은 경성철도학교와 나란히 자리했다. ‘철도도서관’으로 이름이 바뀌기 전에 촬영한 사진인지 출입구 오른쪽에 ‘만철경성도서관’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 서울역사박물관

 
철도도서관은 책을 얼마나 가지고 있었을까?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따르면 1930년에 철도도서관은 8만 5140권의 장서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10만 권을 훌쩍 넘긴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과 10만 1501권을 소장한 조선총독부도서관에 이어, 조선에서 장서가 세 번째로 많은 도서관이었다. 대학도서관인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을 제외하고 1930년 조선 전체 도서관이 소장한 장서가 31만 5244권임을 감안할 때 철도도서관은 조선 도서관 장서의 27%를 가지고 있었다. 

1930년 시점에 조선에 있는 관공립도서관 중 장서 1만 권을 넘게 소장한 도서관은 단 6개뿐이었다. 장서량 순으로 열거해보면 조선총독부도서관(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 10만 1501권, 철도도서관 8만 5140권, 경성부립도서관(지금의 남산도서관) 2만 8983권,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지금의 종로도서관) 1만 5355권, 부산부립도서관(지금의 부산시립시민도서관) 1만 1776권, 평양부립도서관(지금의 북한 인민대학습당) 1만 506권 순이다. 

조선총독부도서관과 철도도서관 장서를 합하면 18만 6641권으로 조선 도서관 장서의 59%, 경성부에 있던 4개 도서관 장서를 합하면 23만 979권으로 73%, 장서 1만 권 이상 6개 도서관이 가진 장서를 합치면 25만 3270권으로 80%를 차지했다.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실린 전체 도서관 수가 50개임을 고려할 때 나머지 44개 도서관이 가진 장서를 모두 합쳐도 6만 1974권으로 20%에 불과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은 도서관 수도 절대적으로 부족했지만 장서 역시 특정 도서관에 '편중'되어, 대도시가 아닌 지역에서는 근대 문화시설인 도서관을 향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1938년 일본 본토와 식민지를 포함해 장서 10만 권 이상을 가진 38개 도서관 중 철도도서관은 14만 5727권을 소장해서 일본 제국 내 장서량 24위를 기록했다. 대학도서관을 제외하면 관공립도서관 중에는 9번째로 책이 많았다. 

만철이 세운 여러 도서관 중에 당시 장서가 가장 많았던 곳은 21만 2876권을 소장한 다롄도서관인데, 철도도서관은 다롄도서관에 이어 두 번째로 장서가 많은 만철 계열 도서관이었다. 15만 4475권을 소장한 타이완총독부도서관과 비교해도 철도도서관은 8748권이 적을 뿐 상당한 장서량을 자랑했다. 철도도서관의 장서는 1945년 해방 시점에는 23만 5193권에 달했다.

(* 2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는 격주로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철도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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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사람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동물, 책을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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