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게이머에게만 주어진 퀘스트: 성차별적 게임환경에 맞서기

[회원에세이- 게임 속 여성혐오를 고발한다 ②]

등록 2019.07.18 14:52수정 2019.07.18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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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isoft/theDIVISION2 ⓒ 한국여성민우회

  
(이전 기사: '보르시'부터 '혜지'까지... 나는 왜 게임을 좋아해서 고통받나)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그래픽으로 농장 경영과 문어발 연애를 동시에 진행하는 '스타듀 밸리' 게임을 좋아한다는 여성 동료가 "로리 님은 '이런' 게임 안 할 줄 알았어요. 완전 '진짜 게임'만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라고 말했다.

'진짜' 게임은 뭘까? 총을 들고 싸우는 게임? 빠른 컨트롤이 필요한 게임? 절대 터지지 않는 티타늄 멘탈로 다른 플레이어와 대결하는 온라인 대전 게임?

주말마다 나란히 놓인 컴퓨터 2대로 남편과 '스타듀 밸리' 멀티 플레이를 즐긴다는 이 동료는 왜 자기가 하는 게임은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한 걸까?

지금 나는 스마트폰으로 '캔디크러쉬'를 하면서 안 써지는 원고를 붙들고 있다. 차마 양심이 있어서 플레이스테이션을 켜지는 못했다. 게임을 즐기는 여성이자 조직에 속한 노동자인 나는 스스로 어느 정도 대표성을 띠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나 너희 못지 않아"라는 생각으로 총 쏘는 게임, 운전하고 공 차는 게임, '진짜 게임' 이야기를 많이 하고 다녔다. 그런 내가 손에서 놓지 못하는 '캔디크러쉬'는 진짜 게임일까, 아니면 가짜 게임일까? 여성이 좋아하는 게임은 '진짜'가 아닌 걸까? 왜?

 

농장 경영 게임이자 이상한 마을 사람 탐구생활인 ‘스타듀 밸리’(자유도가 높아서 재밌어요 ⓒStardew Valley ⓒ 한국여성민우회

 
같은 게이머 안에서 유독 여성을 향한 공격과 멸시, 희롱이 난무하는 이유로 흔히들 '머릿수가 적어서', '큰 고객이 아니라서'를 든다. 여성 게이머는 퍼즐, 아케이드, 귀여운 캐릭터가 요리하거나 춤추는 장르를 좋아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고, 모바일 게임을 더 선호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 뒤에 생략된 것은 아마 여성은 총싸움을 싫어하고, 고성능 그래픽 카드나 값비싼 게임기 구입을 꺼린다는 결론일 것이다. 하지만 여성 게이머가 전체의 반수에 가깝다는 것은 대다수 조사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사실이며, 많은 사람들이 눈 감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인구가 적어서? 아니, 충분히 많다. '캔디크러쉬'나 '스타듀밸리'같은 게임만 해서? 아니, 둘 다 연령과 성별을 떠나 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사용자를 보유한 빅히트 콘텐츠다. 문제는 장르도 아니고, 머릿수도 아니다.
 

ⓒLeague of Legends Korea(youtube) ⓒ 한국여성민우회

   

ⓒLeague of Legends Korea(youtube) ⓒ 한국여성민우회

 

현실에서도 하루가 다르게 성폭행, 불법촬영 사건이 이어지고 있지만, 게임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회에서는 직접 공격하고 데미지를 입히는 역할이 아닌 원거리 딜러, 서포터, 힐러 같은 캐릭터가 전투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는 점에서 수동적인 여성의 성역할로 치환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아시안 게임 시범종목으로도 선정됐던 '리그오브레전드' 한국 지사가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대표적인 서포터 캐릭터를 나열하면서 "이거 다 혜ㅈ(여성들이 선호하는 여성 서포터 캐릭터를 가리키는 멸칭)…?"라고 언급하는 영상을 내보냈다. 공식 게임사가 여성 게이머들이 실력과 선호를 자유롭게 펼치지 못하고 멸칭으로 무시당하는 환경 개선에 노력하기는커녕, 너무나 유해한 현재 상황을 조금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로 읽혔다.

'밀리시타'라는 모바일 게임은 최근 한국판을 내면서 #페미시타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 캐릭터 소갯말이 '내 얼굴만 보지 말고 일하러 가자'로 번역됐는데, '내 가슴 그만 쳐다보고'라는 원문을 고쳤다고 페미니즘에 굴복(?)했다는 비난을 받은 것이다. 결국 밀리시타 측은 원문대로 '얼굴'을 '가슴'으로 고쳐 내보냈다.
 

한국어판에서 바람직한 번역 품질을 선보였다 번복한 ‘밀리시타’. ⓒMillionlive-Theaterdays ⓒ 한국여성민우회

 
하지만 일본판 게임을 열심히 하던 여성 게이머들은 참고 있지만은 않았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번역에 동의하지 않는 여성 게이머들은 일본 제작사, 한국 운영사, 게임물 관리 위원회, 공식 카페 등에 열심히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게임 환경, 그리고 게임을 둘러싼 인식이 여성에게 매우 적대적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선택한 여성 비율이 절반에 가깝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일명 '컴퓨터 게임', '오락 게임'은 여성에게, 소녀에게 적합한 놀잇감으로 주어진 적이 없었다. 게임기를 선물 받는 대상은 보통 남자 어린이지, 소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빠나 남동생 옆에서 가끔 조이스틱을 넘겨받은 소녀는 온라인 게임에서 여성이라는 성별을 밝히는 즉시 혐오와 성희롱의 대상이 된다. 심지어 고난과 역경을 딛고 무언가를 쟁취하고 조금씩 성장해가면서 마침내 악을 물리치는 게임 서사에서도 흔히 여성은 남성 용사가 구원해야 할 대상이나 승리의 보상으로 취급됐다.
 

유비소프트의 디비전 2. 좋아하는 게임이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여성의 포션은 늘 한 자리 ⓒUbisoft/theDIVISION2 ⓒ 한국여성민우회

 
현재 게임 공간, 특히 온라인 게임은 여성 게이머가 게임 자체를 즐겁게 할 수 있는 환경이 결코 아니다. 결국, 게임에 내재된 편견과 성차별은 게임을 만드는 회사, 플레이하는 사람, 이를 받아들이는 사회를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게임 세계의 여성 혐오와 대상화 문제는 여성 게이머의 수나 영향력이 적어서가 아니라, 게임사와 개발자, 운영자, 게이머들이 여성에 적대적이며 그 자신이 여성혐오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게임 개발사에 끊임 없이 시정을 요구하고, 여성을 상품화하는 스토리나 편향적인 운영에 반대하는 것은 마치 여성 게이머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퀘스트 같다. 채팅이나 음성 로그를 첨부파일에 넣고 신고하고, 게시판에 항의 글을 쓰다 보면, 내가 때려부숴야 하는 '나쁜놈'들이 게임 속의 거대 악인지, 게임하면서 마주치는 혐오 발언과 멸시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현실을 잊으려고 떠난 가상 세계 속에서조차 여성 혐오에 맞서 싸우는 전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 게이머는 세상의 절반이고, 게임 속 주인공의 절반을 대표하며, 결국 불평등한 게임 환경을 바꿀 절반이 될 것이다. 끝내 승리할 것을 믿으며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 속 용사처럼, 하나 하나 퀘스트를 풀어가는 여성 게이머들은 혼자가 아니며, 결국 이런 환경을 바꾸고 말 것이다.

[글/ 로리(회원) @allegrory  페미니스트, 승냥이, 노동자, 범생타입 쾌락주의자]
#여성혐오 #게임 #민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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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회는 1987년 태어나 세상의 색깔들이 다채롭다는 것, 사람들의 생각들이 다양하다는 것, 그 사실이 만들어내는 두근두근한 가능성을 안고, 차별 없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세상을 향해 걸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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