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부나 팔렸는데, 작가로서 기쁘지만 씁쓸했던 이유

[리뷰] 민서영 글·그림 '썅년의 미학 플러스'

등록 2019.07.23 16:30수정 2019.07.23 16:35
0
원고료로 응원
여름이다. 가뜩이나 더운데 가슴까지 압박해야 하는 계절. 내게 여름은 브라의 계절이고 숨막히는 날들이다. 봄, 가을, 겨울은 브라를 탈출하고 자유를 만끽했지만, 여름만큼은 아직 용기를 내지 못한 탓에. 사실 노브라가 가장 절실한 건 여름일텐데 말이다. 

생각은 이미 골백번 노브라인데, 소심함이 발목을 잡는다. 외출할 때는 물론 택배를 받는 몇 초의 시간 때문에 브라를 집어들고 만다. 용기를 냈던 어느 날은, 여성 연예인의 노브라가 화제가 된 것을 보고 기함을 했다. 이게 이렇게 화제가 되어야 하는 일이란 말인가. 

누구 눈에도 띄고 싶지 않은 나는 지레 겁을 먹고 또 브라를 집어든다. 그녀가 연예인이라서 뉴스를 장식했지만, 그것이 오직 그녀에게만 가해지는 시선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오직 여자라는 이유로 화장을 강요당하고 복장을 간섭받아 온 긴 세월을 잊을 리가. 이 여름, 과연 나는 브라를 벗을 수 있을까. 
 

<썅년의 미학 플러스> 책표지 ⓒ 위즈덤하우스

 
민서영이 쓰고 그린 <썅년의 미학>이 <썅년의 미학 플러스>가 되어 돌아왔다. 여전히 속 시원한 그녀다.
 
"애초에 왜 사람들은 브라가 기본 착장이라고 여기는 걸까? 왜 노-브라냐고. 원래 브라가 없는, 생찌찌가 기본 아니냔 말이야. 오히려 예스-브라라고 해야지 맞는 것 아닌가. 에라이, 내 찌찌랑 눈이나 마주쳐라."(p27)

때로는 거친 말도 불사하는 속시원한 그녀지만, 그녀 역시 애초부터 페미니스트였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세상의 잘못된 것을 눈치채지 못한 적도 있고, 성적 농담을 일삼는 남성들의 세계에 속하고 싶었던 적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권력으로 보였고 실제로 거기엔 권력이 있었으므로. 

그러나 그게 쿨한 게 아님을, 그들에게 동조해봤자 기껏해야 가해자가 될 뿐이고, 그래봐야 여전히 자신은 평가당하는 대상일 뿐이라는 자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번에도 목소리를 높인다. 

전작에서 그랬듯, 목표는 분명하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에두르지 않고 정확히 말하는 것. 결코 좌시하지 않는 것. 또한, 괜한 자기 혐오에 빠지지 않을 것. 그건 잘못한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하니까. 
 
"그래, 앞으로도 아주 피곤하게 굴어서 너희가 얼마나 창피한 인간인지 알려주도록 하마."(p127)

이 말에, 모두가 긴장할 필요는 없을 듯 보인다. 당신에게 죄가 없다면 말이다. 성별과 무관하게 우리 모두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으며 동지가 될 수 있다. 

저자의 말이 조금 거칠게 느껴질지라도, 그녀 말마따나 끝까지 읽어볼 것을 권한다. 불필요한 전선 형성은 없다. 단지 잘못된 것을 아는 사람과 잘못된 것을 알지만 기필코 유지하고 싶은 사람을 구분할 뿐이다. 잘못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저자의 말에, 나 역시 동의한다.

저자는 가부장제 질서에 지극히 익숙했던 아버지의 변화된 모습을 말한다. 성희롱성 발언이나 성차별적 농담에, '요즘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큰일난다'는 말로 그들의 말을 일축해 버린다고. 그 덕분에 주변 사람들의 행동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는 말엔, 내가 환호성을 지르고 싶을 정도다.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는 데에는 페미니즘이라는 개념도, "딸 보기 쪽팔리지 않냐" 같은 격한 언쟁도 필요 없었다. 그저 같은 남자가 말하는, "너는 지금 매우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다"는 말이면 충분했다.
(중략) 여성들의 마이크를 빼앗지 않고, 남성들의 목소리를 차단해달라. 내 전 남자 친구가 바뀌었듯이, 그리고 나의 아버지가 바뀌었듯이, 당신들도 바뀔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남자들이여, 천하의 썅놈이 되어라."(pp222-225)

그녀는 이번 책을 정말 출간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페미니즘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성차별이라는 개념이 낡고 고루해져서 더이상 이런 책이 필요없는 세상이 금방 올 줄 알았다고. 그러나 <썅년의 미학>이 1년이 넘게 서점의 매대를 차지하는 걸 보고, 작가로서 기쁘지만 여성으로서 씁쓸했다는 것이다. 

독자로서의 나도 비슷한 마음을 품는다. 또 페미니즘인가, 하며 심드렁하게 굴면서도 나도 모르게 이 책들에 다시 손을 뻗게 되는 이유다. 세상은 아직 바뀌지 않았고 우리에겐 여전히 할 말이 많기 때문에. 책은 이렇게 끝난다. 나로선 더이상 보탤 말이 없다.
 
"아직까지는 더 많은 이야기가 나와야 할 때인가 봅니다. (중략)
 그리고 자신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는 수많은 여성을 응원합니다."(p230)
#썅년의 미학 플러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니, 소파가 왜 강가에... 섬진강 갔다 놀랐습니다
  2. 2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3. 3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4. 4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5. 5 '김건희 비선' 의혹, 왜 자꾸 나오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