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접었던 아내 회갑 여행을 다시 준비합니다

5년간의 투병 생활을 정리하며... 내게 힘이 되어준 아내의 세월

등록 2019.07.29 15:11수정 2019.07.29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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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2014년 12월 23일, 세 번째 혈변을 쏟고도 '단순한 치질이겠지' 하고 가볍게 여기며 혼자 병원에 갔다. 몇 가지 검사 끝에 보호자를 찾던 의사는 고개를 돌리며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간호사로부터 'rectal cancer'라는 소견서와 진료 결과를 담은 CD 한 장을 건네 받았다. 그 순간의 미묘한 심리적인 갈등과 공황 상태는 드라마 속에서 갑자기 암과 맞닥뜨린 주인공이 보여준 절망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2015년 1월 8일 화순 전남대병원에서 직장암 3기 b라는 확진을 받고, 1월 21일부터 방사선 치료 28회, 수술 전 항암 8회, 5월 6일 직장 전절제 수술, 회장루를 달고 살았던 5개월여의 기간에 다시 항암 20회, 10월의 장루 복원 수술, 11월의 탈장수술…. 세 번의 전신마취 수술로 인해 만신창이 된 몸과 마음, 거기에 재발과 전이의 위험성으로 인한 불안…. 모든 결과가 나의 허물 때문이라고 스스로 달랬지만 억울했던 감정까지 지울 수 있었을 것인가!

2015년 1월 8일 직장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와 수술로 인해 만신창이 된 몸과 마음, 거기에 재발과 전이의 위험성으로 인한 불안. ⓒ Pixabay

 
직장은 대장의 끝부분으로 항문과 연결되어 사람이 섭취한 음식의 찌꺼기를 저장하는 기관이고 항문은 배설을 담당하는 신체의 주요 기관이다. 그렇게 요긴한 직장을 아예 절제하고 항문을 겨우 살린 환자의 경우, 다른 암 환자들에 비해 변의 횟수가 잦으며 거기에 걸핏하면 변을 지리는 난처한 상황을 겪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나 역시 수술 후에도 2년 남짓, 통제 불가능한 배변 문제 때문에 성인용 기저귀와 생리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특히 방사선 치료와 항암이 겹치던 기간 중 최악의 날에는 배변 횟수가 얼추 50회를 넘기도 했다. 하루 대부분을 변기에 앉아 얼굴과 손발이 검게 타들어가던 나를 지켜보면서 진저리쳤던 기억은 지금 떠올려도 끔찍하다. 삶의 질을 이야기할 수 없었고 자존감조차 지키기 어려워 오랫동안 정신적인 미로(迷路)를 헤맸던 날들.

암은 장기 치료를 요하는 만성 질환이다. 그렇지만 수술이 끝나면 6개월에 한 번씩 상태를 점검하는 병원의 외래진료가 있을 뿐, 사실상 심신의 치료와 치유는 본인과 가족의 몫으로 남는다.


그런데 많은 환자들이 항암 기간은 물론 퇴원 후에도 식욕 자체가 사라져 평소에 먹었던 음식 냄새를 역겨워하고 심지어 보는 것을 꺼리며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도 좋다는 음식을 챙겨주는 아내의 성의조차 외면했던 끼니가 많았다. 단 시간에 체중은 10kg 이상 빠졌으며 몸과 마음은 기력과 의욕을 잃었다.

정말 암 환자는 암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굶어 죽는다는 말을 실감했던 시간이었다. 그래도 병에 쓰러지고 싶지는 않다는 일념으로 아내와 나는 책과 인터넷카페를 찾아 선배 경험자들이 남긴 글을 읽고 주의할 음식과 고쳐야 할 식습관을 참고하여 식사방법과 내용을 개선하려는 노력에 공을 들였다.

자극적인 음식 등을 주의하며, 소식(小食)하고 제철 유기농채소와 과일을 먹고, 붉은 육고기보다는 해조류와 생선을 많이 섭취하고 그것들을 오랫동안 천천히 씹는 습관을 생활화하려는 기본에 충실했다. 그러면서 끊임없는 도전과 반복적인 시험을 통해 나에게 맞지 않는 식품을 찾아냈는데, 특이하게도 많은 환자들에게 좋다는 우유 등 유제품이 내 몸에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체득한 것도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완치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환자의 면역력을 기르는 절제와 균형 잡힌 식단을 유지하는 일이 중요한데, 까탈을 부리는 내 곁에서 매 끼니 음식의 종류와 양을 조절하고 영양의 균형을 잡아준 이가 아내였다. 현재까지도 아내는 계절에 따른 과일과 채소와 생선을 식탁에 올리는 등 식단 관리에 소홀함이 없으며, 여전히 세 끼니 식사에 따른 반찬은 두 사람이 한 끼에 먹을 양만 새로 만들어 식탁에 올리고, 혹시 남는 음식은 다시 냉장고에 넣지 않는다(이 글을 읽는 분들도 가족의 배려와 응원 없이 환자의 노력만으로 완치에 이르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암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몸을 움직이는 운동은 필수적인 과제이며 의무사항이다. 나 역시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누운 자세로 팔과 다리 올려 흔들기, 몸 비틀기 등으로 가볍게 몸을 깨우고, 족욕기와 좌욕기의 도움을 받았고, 다른 환우들이 소개하는 운동법도 따라했다. 많은 의사와 환우들도 권하는 운동이지만 개인의 경험으로도 각종 후유증을 극복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운동은 걷기였다고 본다.

걷기는 부담이 크지 않은 유산소 운동으로 일차적으로 몸의 면역력과 근력을 높이며 항문의 괄약근을 강화하여 변의 횟수와 상태를 조절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또한 걷는 동안 내면적인 반성과 성찰의 기회가 되어 마음의 화를 진정시키는 효과도 컸다. 그래서 지금도 매일 1시간 이상 마을 주변의 낮은 산길을 걷거나 아니면 숙지원을 몇 바퀴 돌고 있다.

또 암의 발병 원인 중 하나가 개인이 받는 스트레스라는 지적에 공감한다. 하지만 마음을 비우자고 하면서도 일상의 잔잔한 욕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겠나. 그래도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그저 매사에 조심하고 경계하면서, 텃밭의 각종 채소 돌보기와 정원의 꽃들과 눈 맞추는 일 자체를 수행의 과정으로 여기며 나를 다스리고 있다.

정작 암이 언제 발병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암을 발견하고 확진 판정을 받은 지 4년 6개월을 넘겼다. 지금도 배변 횟수는 하루 평균 6회 정도로 많은 편이기에 아직 장거리 외출이 부담스러운 점이 있지만, 끈질기게 몸을 옥죄던 항문의 통증과 번번이 나를 위축시켰던 변 지림 현상은 극복하였다. 또 우울증 등 정신적인 후유증에서 벗어났으며, 손과 발의 저림 등 육체적인 후유증도 많이 나아졌다. 가벼운 외출이나 텃밭 일 등 일상적인 생활에는 불편함이 없게 된 것이다.

지난 7월 8일 각종 검사 후, 1주일이 지난 7월 15일에 결과를 알아보는 외래진료에서 이상 소견이 없다는 말을 듣고 마지막 내시경 검사 등을 예약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아왔다.

일반적으로 암은 확진 판정 후 만 5년간 의료보험 공단에 등록되는 중증환자로 인정받으며 보험료도 20분의 1정도만 부담하는 혜택을 받게 된다. 그 기간 내에 재발이나 전이가 없으면 일단 완치로 판정한다. 판정 후에는 1년 혹은 2년마다 검사와 외래진료를 통해 평생 동안 관리를 받게 되는데 보험료 혜택이 사라지게 되는 아쉬움이 있다.

어째서 5년을 완치 판정의 기한으로 하는지는 아직도 정확하게 모른다. 일설에는 환자의 기록을 보전하는 기간이 5년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법으로 정한 기간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더라도 완치 판정을 받는다는 사실은 어두운 터널을 불안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 그리고 심리적으로 위안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기다려지는 일이고 또 기쁜 일이 아닌가 한다. 나 역시 지금처럼 꾸준하게 음식조절과 운동을 지속한다면 법적으로 중증환자 등록 기간이 끝나는 12월 말쯤 완치 판정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다시 마음의 지도를 그립니다
 

예정대로였다면 2015년 3월 30일, 아내와 나는 스페인을 향한 비행기에 올랐겠지만 아쉽게도 우리의 여행은 기약 없는 기다림의 자락에 묻어야 했다. ⓒ Pixabay

 
지금도 나는 화장실에서 아침부터 화장실 문고리를 잡고 몸부림을 쳤던 2015년 3월 10일 아침의 일을 가슴 아릿한 미안함으로 기억한다. 그 날 아내의 회갑이었음에도 축하한다는 꽃다발은커녕 민망스런 실수로 뒤치다꺼거리만 떠넘겼으니…!

또 나는 창자가 끊기는 아픔과 절망의 늪에서 헤매던 무렵, 잔디밭을 매던 일손을 잠시 멈추고 왼손의 묵주를 천천히 돌리며 성호를 긋던 아내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오늘도 매 끼니 따뜻한 음식과 제철 과일을 식탁에 올리는 정성, 또 각종 효소를 담그고 전통 식초의 씨앗을 키우는 등 치유의 식탁을 준비하는 아내의 기원이 잔디밭 기도의 연장선임을 모르지 않는다.

1979년 결혼, 시부모와 시동생들 틈에서 신혼을 모르고 살았던 10년. 1989년 해직된 남편은 전교조와 사회단체에서 일하다가 특수공무집행방해, 집시법 등으로 실형 선고를 받았고, 사면 복권이 안 되어 다른 해직 교사들보다 복직이 5년이나 늦어지는 바람에 아내는 또다시 10년 세월을 시어머니를 모시고 두 아들을 키우는 숨은 가장이 되었다.

한 번도 화창한 날의 꽃이 되지 못하고 힘겹게 살아온 아내, 그 아내도 1996년 봄,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후유증이 심해 결국 정년도 채우지도 못하고 중도에 교직 생활을 접어야 했던 아픔이 있었다.

사실 우리가 시골에 터를 잡아 숙지원이라는 작은 정원을 조성하고 그곳에 아담한 집을 지어 옮긴 이면에는 아내의 건강 회복이라는 염원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꽃을 좋아하는 아내는 씨앗의 발아와 성장 그리고 고유한 색과 모양과 향기를 가진 꽃들의 신비한 모습을 이야기하면서 차츰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아내는 햇볕을 등에 받으며 잔디밭의 풀을 매는 일도 즐거움이라고 여기며 웃었는데… 하얗게 센 머리, 주름 진 얼굴… 지금 아내의 모습에는 모진 세월의 흔적이 깊다.

인생에서 5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며, 특히 60대의 5년은 아주 귀하고 품위를 지키며 여유있게 자신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시간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아내와 나는 가까운 나라는 물론 유럽 여러 나라도 두루 다녀왔다. 아마 예정대로였다면 2015년 3월 30일, 아내와 나는 스페인을 향한 비행기에 올랐겠지만 아쉽게도 우리의 여행은 기약 없는 기다림의 자락에 묻어야 했다.

이후 장루라는 인공항문을 달았던 시간도 길었고, 장루를 복원하였으나 잦은 화장실 출입, 오랫동안 성인용 기저귀에 의지하였던 불편 때문에 병원의 검사와 외래진료 외에 일상의 외출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자존감의 상실로 헤맸던 나 때문에 그 세월 아내는 편하게 대문 밖 외출조차 못 했다.

지금도 사람의 의지와 믿음만으로 기원하는 모든 바람을 이루기 어렵다는 불안과 현재의 나이와 몸의 상태로는 자칫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폐가 될 수도 있다는 걱정 등의 우려를 떨칠 수 없음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렇지만 4년을 무사히 넘기고 완치 판정을 향한 마지막 검사를 남겨둔 요즈음 지난 5년을 담담하게 회상하면서 다시 출발 목전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먼 나라 여행을 계획한다. 그리고 오래된 성당의 종탑이 있는 곳, 또 태고의 자연 속에서 경건한 노을을 볼 수 있는 곳을 검색하며 마음의 지도를 그린다. 가장 먼저 인고의 세월을 견뎌주고 나에게 힘을 준 아내의 5년 세월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예약(豫約)의 사전적인 의미는 상대방과 장래의 시점에서 무엇을 하자는 약속이다. 상대의 전제나 조건에 따라 강압이나 강제가 되는 예약도 없지 않겠으나, 일반적으로 예약은 실현 가능하다는 믿음을 전제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선한 약속일 것이다.

아직도 장거리 여행을 위해서는 몇 가지 후유증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남았기에 당장 예약이 자유롭지 못한 처지임을 안다. 그래서 이런 글이 너무 앞서가는 것 아닌가 하는 조심성도 없지 않다. 그래도 인생이란 선택과 예약으로 연결되는 기나긴 과정이라고 생각하면서 의미 있는 기다림을 접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다음 카페 대직방 에도 실립니다.
#5년 세월 회상 #완치판정 #마음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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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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