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궁금하다 "왜 일본 거를 사면 안 되는데?"

[그 엄마 육아 그 아빠 일기 121] 한일 무역전쟁과 역사교육

등록 2019.07.28 17:42수정 2019.07.2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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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렁한 일본 매장

지난 주말 가족과 함께 쇼핑몰을 갔다. 비가 계속해서 오락가락하는 굳은 날씨. 어디 멀리 나가기는 힘들고, 그렇다고 집에만 있기는 눈치 보이고. 어차피 아이들 방학을 맞아 장을 봐야하니 쇼핑몰을 가자는 아내의 말에 옳거니 따라나섰다. 쇼핑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또 쇼핑몰처럼 시간이 후딱 지나가는 곳도 없지 않은가.

오랜만에 도착한 쇼핑몰의 주차장은 만차였다. 처음으로 보는 풍경이었다. 올 때마다 항상 텅텅 빈 주차장이었는데. 모두 우리 같은 마음으로 나들이 아닌 나들이를 나왔을 테지. 아니나 다를까. 쇼핑몰은 진짜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가족 단위였다.
 

쇼핑몰의 무인양품 매장 ⓒ 이희동

 
어디를 가도 많은 사람들로 정신없는 쇼핑몰. 그 와중에서 유독 한산한 곳이 눈에 띄었으니 바로 유니클로와 무인양품 매장이었다. 언론에서 보도하는 대로 매장에는 손님들이 거의 없었다. 마네킹과 점원, 그리고 매장 앞에 큼지막이 붙어 있는 'sale' 안내판만 보일 뿐이었다.

괜히 가까이도 가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사진을 찍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한일 무역전쟁 때문에 유니클로가 텅텅 비었다며, 요즘 같은 분위기에 일본 제품은 사기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이는 마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제품들을 고르고 있는데 사람들이 수군 거렸다.

"야, 이 어묵 일본 거네."
"진짜? 그래도 이게 제일 맛있는데?"
"그래도 사지마. 요즘 같은 분위기에 일본산은 아니잖아."

 

멀리서 바라보는 유니클로 매장 ⓒ 이희동

 
한일 무역전쟁으로 인한 일본제품 불매운동. 그것은 정부가 사주한 것도 아니요, 불순한 단체들이 기획한 것도 아니다. 보수 언론과 자유한국당은 정부가 나서서 이 분위기를 조장한다고 거품을 물고 있지만, 이번 운동은 장삼이사들이 자발적으로 벌이고 있는 운동이다.

그리고 이번 운동의 시작은 2016년 겨울 촛불의 기억이다. 촛불시위로 대통령을 탄핵시켰던 경험은 우리에게 자신감과 서로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었고, 그 사회적 자본이 바탕이 되어 현재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누가 나서서 기획하지 않아도 우리가 힘을 합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역사는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왜 일본 거를 사면 안 되는데?"


푸드 코트에서 점심을 먹고 서점에 들어갔다. 좋다며 책을 둘러보는 아이들. 한 권씩 사준다고 하니 막내가 대뜸 요괴와 관련된 책을 들고 왔다. 7살 막내는 이제 공룡을 떼고 요괴, 괴물로 관심사를 옮기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동생이 골라온 책을 보던 9살 둘째가 한 마디 한다.

"어? 이거 일본 책 아냐?"
"아니야. 한글로 되어 있잖아."
"지은이가 일본 이름인데? 아빠, 이거 사도 괜찮아?"


막내는 울상이 되었다. 녀석도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어디서 본 듯한 모양이었다. 하긴. 뉴스를 틀면 계속해서 나오는 뉴스가 한일 무역전쟁과 관련된 기사이니.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형에게 항변했다.

"왜 일본 거를 사면 안 되는데?"
"요즘 일본이 우리나라한테 중요한 기계부품 수출 안 하잖아.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일본 여행 안 가고, 일본제품 안 사고. 우리나라가 발전하니까 일본이 그거 막으려고 그런 거라고 아빠가 그랬어."
"아냐. 내가 좋아하면 사도 돼. 그치 아빠?"


간절한 막내의 눈빛과 의기양양한 둘째의 눈빛.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책을 사도 괜찮다고 이야기했다. 둘째는 의아해하며 질문을 던졌다.

"왜? 아빠가 일본제품은 사면 안 된다며."
"아냐. 자기가 진짜 원하고, 그것 밖에 없으면 사야지. 일본 거 산다고 무조건 다 나쁜 건 아니야. 사람 따라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까. 오히려 일본 제품 사면 다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이 위험해. 게다가 이 책은 지은이는 일본인이지만 우리나라 책이잖아."


9살 둘째는 아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안 그래도 요즘 일제 강점기와 관련된 역사 만화책을 읽으며 일본과 관련하여 적개심을 키우고 있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아빠가 자신의 생각과 다른 말을 하니 뜻밖인 듯했다. 게다가 일본제품을 사지 말라고 하는 사람을 더 나쁘다고 하니 헷갈릴 수밖에.

일본인들과 일본 정치인
 

SALE을 붙어놓은 동네 유니클로 매장 ⓒ 이희동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까 나누었던 대화가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는지 둘째가 다시 공격적으로 질문을 해왔다.

"그럼 아빠는 일본 사람들이 좋아?"
"일본 사람들을 굳이 좋아할 필요도 없고 싫어할 필요도 없지. 다만 정치인들이 문제야. 그들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왔던 것을 사과하지 않고, 계속 우리를 얕보고 있으니까. 이번에 우리한테 수출 금지한 것도 그 정치인들이야."


아이에게 일본의 정치인과 국민들을 구별해서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접하는 대부분의 매체에서 일본은 그냥 일본이니까. 게다가 일본 사람들이 아베를 반대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비록 일본 참의원 선거 투표율이 50%에도 못 미쳤지만 어쨌든 아베 정권은 의석의 과반수를 넘기지 않았던가.

"그런데 아빠는 왜 일본 제품을 안 사?"
"일본 사람들이 미워서 안 사는 게 아니라, 이렇게 우리가 물건을 안 사고 여행을 안 가다 보면 일본 사람들이 자기 정치인들한테 불만을 터뜨릴 거 아냐. 그럼 일본 정치인들이 잘못했다고 깨닫게 될 거고, 다시 두 나라의 사이가 좋아지겠지. 그때까지 아빠는 일본제품을 안 살 거야."
"계속 사이가 나쁘면 어떡해?"
"글쎄. 조만간 해결되겠지."


아이에게는 교과서적인 대답을 했지만 나 역시 확신할 수 없었다. 과연 이렇게 우리가 불매운동을 한다고 해서 일본 국민들이 움직일까? 일본의 시민사회는 우리와 연대할 수 있을까? 나는 조만간 일본 맥주를 마실 수 있을까?

아직도 한일 간 무역전쟁은 진행 중이다. 소위 토착왜구들은 반일을 접고 이제라도 일본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훈계하지만 그것은 몰역사적인 주장일 뿐이다. 일본은 여전히 무례하고, 역사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이번 중·러의 영공 침범을 계기로 독도와 관련된 막말을 쏟아내고 있다. 우리가 아직도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해야 하는 이유다.
#한일 무역전쟁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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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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