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미군정에 '좌파 시위' 계획 알려준 여운형, 왜?

'미군정 방첩대 문서'가 보여주는 해방정국 3년 서울의 풍경

등록 2019.07.29 20:43수정 2019.07.29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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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 창당식에서의 여운형 선생. 서거 2달 전의 모습이다. ⓒ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해방 정국에서 좌우합작을 추진하다가 암살 당한 정객 여운형이 1946년 10월 미군정 방첩대(CIC)에 좌파 세력의 시위 계획을 알려준 정황이 드러났다.

이 같은 정황은 서울역사편찬원이 최근 펴낸 '국역 미군정 방첩대 서울 문서'(아래 '서울 문서')에 실린 3건의 보고서를 통해 29일 확인됐다.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라는 약칭으로 유명한 미군정 방첩대(아래 CIC)는 1946년 2월부터 1948년 말까지 서울을 비롯해 38선 이남의 13개 도시에 지부를 둔 정보기관이었다.

미군정과 좌파가 처음으로 정면충돌한 1946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관련자들을 체포한 것도, 훗날의 진보당 당수 조봉암이 전향을 선언하기 직전 그를 잡아둔 것도 CIC였다. CIC가 남긴 방대한 자료는 1995년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 '미군정 정보자료집 – 시민소요·여론조사보고서'라는 이름의 영인본으로 나왔는데, 서울역사편찬원은 이중에서 서울과 관련된 문서들을 발췌해 한글로 번역했다.

'시위 및 테러 관계 보고', '첩보 보고', '일반 사건 관련 보고', '여론조사' 등으로 나뉜 CIC 보고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해방정국 정객들의 이야기다.

해방 이후 정객들은 1953년 휴전으로 남북 분단이 확정되기까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탁류를 헤쳐가야 했다.

김원봉·이극로·홍명희는 독립운동의 공적에도 불구하고 북한정권 고위직을 맡은 전력으로 인해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고, 해방 후 암살당한 정객 1호로 꼽히는 현준혁은 죽은 날짜조차 불명확할 정도로 행적이 묘연하다.

미군정 하의 수도경찰청장으로서 좌익세력 와해에 누구보다 앞장섰고, 훗날 국무총리가 됐던 장택상은 장녀 부부가 월북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다. 1950년 북한군의 남침 와중에 미처 피하지 못하고 '서울 잔류'를 택했던 국회의원 다수는 그해 7월 25일 '북한을 지지한다'는 성명에 이름을 올려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호형호제' 하던 중도우파의 대표정객 김규식은 안재홍, 원세훈, 조소앙 의원 등과 함께 납북돼서 쓸쓸한 최후를 마쳤다.

한국전쟁 직전 암살된 남한의 정객 4명(김구 여운형 송진우 장덕수)중 김구만 '임시정부 주석'이라는 대표성을 인정받아 그나마 대접을 받을 뿐, 송진우와 장덕수는 '동아일보-한민당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혀 연구조차 제대로 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여운형이 CIC에 준 정보는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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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미군정 방첩대 서울 문서’의 표지(번역: 이세영, 황윤희) ⓒ 서울역사편찬원

 
여운형에 대한 평가는 "인민공화국을 만들어 한반도를 공산화하려던 인물"과 "좌우합작으로 분단을 막아보려던 지도자" 등 극과 극이다. 전자의 평가는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에 진주하기 전 조선공산당과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었던 1945년의 행적 때문에 나온 것이고, 후자는 1946년 들어 우파의 김규식·원세훈, 좌파의 김원봉·이강국·허헌 등을 규합해 좌우합작위원회를 운영했던 시도에서 나온다.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15분 혜화동 사거리에서 여운형이 괴한의 총격으로 사망하고, 좌우합작이 파탄 난 후에는 좌우 양쪽으로부터 '기회주의자'라는 혹평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번에 번역된 '서울 문서'는 1946년 10월 20, 21일 여운형의 행적을 담고 있다.

이틀 동안 여운형은 CIC 사무실에서 10월 22일 서울에서 벌어질 '시민 소요'(CIC의 표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되어있다.

여운형이 CIC에 알려준 정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0월 22일 조선민주청년동맹 구성원들과 서울대 학생들이 주도하는 시민 소요가 서울에서 벌어질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서울의 4, 5곳에서 벌어질 계획이다. 이 정보가 꽤 정확한 것 같다."(1차 보고서)

"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리는 조선올림픽대회(전국체전) 참가자 일부가 22일 아침 청계천을 따라 남대문통의 다리와 동쪽의 관수교 사이에 집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지정된 장소에서 모인 다음 시위대는 북쪽으로 행진하여 화신백화점을 지나서 안국동으로 돌 것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행진 대열은 중앙청으로 향할 것이다."(2차 보고서)

"부정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예정된 시위가 취소됐다는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조선민주청년동맹원이 전한 바로는 22일 시위는 남대문 근처, 동대문 인근 모처, 서대문 지역 그리고 서울 중심부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한다."(3차 보고서)


여운형은 복수의 정보원을 '19일 저녁 방문한 서울중학교 학생', '21일 방문한 조선인민당 재무부장 이임수의 아들(서울대학생)'이라고 밝혔다. CIC는 이 정보와 관련해 정보제공자 여운형에 대해서는 B등급('통상 신뢰할 수 있음'), 정보 자체에 대해서는 3등급('사실일 수 있음')을 각각 부여했다.

여운형이 알려준 정보대로 22일 정오 무렵 탑골공원 등에서 미군정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일부는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의 집으로 몰려갔는데, 누군가 쏜 권총에 하녀가 부상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과 수도청은 조선민주청년동맹 조직원 18명을 검거하는 등 시위를 신속하게 진압했다.

여운형이 CIC에 알려준 정보가 미군정과 경찰의 시위 진압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됐는지는 알 수 없다.

'박헌영과 나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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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민족지도자(왼쪽부터 몽양 여운형, 도산 안창호, 고당 조만식. 1936년) ⓒ 몽양기념사업회

 
당시는 19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노조가 시작한 좌파 노조연합체 전평의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경북 전역으로 확산된 경찰과 시민의 유혈 충돌로 인해 시국이 뒤숭숭했다. 성난 군중을 이끌고 구미경찰서를 습격했다가 3일 뒤 경찰에 사살당한 좌파 인사중에는 훗날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의 형 박상희도 있었다. 여운형의 정보가 없더라도 미군정과 경찰은 TK 지역을 몰아친 유혈 사태의 먹구름이 서울로 몰려올 가능성에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눈여겨볼 부분은 이 시기 여운형의 '선택'이다. 여운형은 1945년 건준-인민공화국 활동 때문에 우파에서 공산주의자로 의심하던 인물이었다. '10월 사태' 직전까지 네 차례나 북한 지역을 방문해 최고권력자 김일성의 의중을 떠본 행보는 그에 대한 우파의 의구심을 더욱 깊게 했다.

1946년 8월 3일에는 박헌영에게 자신의 인민당과 조선공산당을 합당하자고 제안했지만, 박헌영은 북한으로 피신한 뒤 미군정과의 정면대결 노선을 공고히 했다.

독립 정부 수립 문제를 좌파와는 다른 방식으로 풀어보려던 여운형으로서는 미군정에 '박헌영과 나는 다르다'는 메시지를 전해야 했고, 주한미군사령관 하지는 좌우합작 지지 성명(4차례 발표)으로 화답했다.

서울 시위를 진압한 다음 날(10월 23일) 미군정이 여운형·김규식이 이끄는 좌우합작위원회와 조미공동소요대책위(아래 조미공동위)를 만들어 12월 10일까지 '10월 사태'의 수습과 진상 규명을 27회 논의한 것도 여운형과 미군정 사이에 감돌던 '훈풍'을 짐작게 한다.

조미공동위는 10월 25일 "악의적인 파괴, 살인 그리고 방화는 모두 악질적 범죄이자 재앙이다. 생업에 충실하면서 인내심을 갖고 침착하라"며 미군정에 힘을 실어주는 성명도 발표했다.

조미공동위는 친일파가 득세하는 경찰 행정에 대한 책임을 물어 조병옥 경무부장의 파면을 요구했지만, 조병옥의 반발로 유야무야된다. 오히려 조미공동위에서 '조병옥 책임론'을 제기했던 최능진 경무국 수사부장이 좌천되고, 최능진은 한국전쟁 와중(1951년 2월 11일)에 총살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다.

'서울 문서'에는 한반도 단일 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 재개를 앞두고 방한한 미국 기자들을 위한 연회장(1947년 2월 13일 창덕궁)에서 기생을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만취 상태에서 서로 얼굴을 붉히는 정객들의 모습을 가감 없이 담은 비망록도 있다.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1945년 9월 9일 이후에도 조선인들이 자체적으로 꾸린 '보안대' 또는 '치안대' 조직이 서울 시내 일본인들의 재산을 빼앗는 등 '응징'을 가하는 모습은 최근의 한일 관계와 관련해 묘한 상상을 하게 한다.

또 '서울 문서'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1935년 고등계 형사로 활동한 정도로 간략하게 기술된 백형권의 당시 임무가 단파라디오를 소지한 조선인을 고발하는 것이었고, 해방 후에는 용산 철도공작창 파업(1947년 3월 22일)을 진압하는 철도경찰청장의 지위에 올랐다는 사실도 담겨 있다. .

최근 논란이 된 김원봉이 바로 이 용산 파업에 연루돼 체포된 좌파 인사 2076명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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