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가득한 세상에서 가까스로 지켜낸 '희망'

[신간] 권성훈 시집 '밤은 밤을 열면서'

등록 2019.07.31 09:13수정 2019.07.31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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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권성훈(49)은 싱거운 말은 물론 진지한 이야기까지 우스개처럼 하는 사람이다. 얼굴엔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가 내내 떠나지 않는다. 별다른 고민이 없는 중년으로 느껴질 수 있는 어법과 표정.

하지만, 정신의 고통과 육체의 고뇌 없이 생산되는 시는 없는 법. 얼핏 가벼워 보이는 권성훈의 제스처와 말투는 '철저한 위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최근에야 하게 됐다. 그를 만난 지 10여 년 만이다. 시인이자 중앙대 교수인 이승하가 권성훈과 그의 시를 평가한 다음의 문장을 읽은 이후다.

"우리 시의 유구한 전통에서 단절된 것이 있다면 해학성 혹은 골계미다… 권성훈의 시는 끊어진 맥을 되살려내면서 유쾌한 해학, 건강한 골계미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한다. 그의 시는 재미에 그치지 않고 인간을 반성케 한다."
 

권성훈 신작 시집 <밤은 밤을 열면서>. ⓒ 실천문학사

 
<밤은 밤을 열면서>(실천문학사)는 최근 출간된 권성훈의 신작 시집. 지천명을 목전에 둔 시인은 그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과는 전혀 다른 '시어(詩語)'를 보여줌으로써 그의 우스개와 미소가 '위장'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거기서 가장 먼저 읽히는 건 '죽음의 냄새'다. 지독한. 이런 것이다.

새끼를 키우려고 새끼를 내다 팔던 할머니
지하 골방에 죽음이 다녀갔다
개를 기르던 노인이
노인을 기르던 개가 들어 있다
홀로 두고 발길 돌리기 안타까웠는지
두 장 빛바랜 엽서처럼 붙어
서로를 애처롭게 만지고 있다….
- 위의 책 중 '골방 엽서' 부분.


이른바 동반 고독사(孤獨死)다. 곁을 지켜주던 개가 노파의 유일한 말동무였을 터. 말을 할 수 없는 개였기에 끝끝내 부재했을 소통. 둘은 끌어안고 함께 죽었다. 악취 비산하는 좁은 방을 권성훈 이렇게 묘사한다.

"한 생애를 지리고 나온 부패한 사연이 지독한 흉터로 인쇄된 증표 같이 굳어져 떨어지지 않는다."

시집에서 풍겨오는 우울과 환멸의 냄새 하지만...
 

죽음의 냄새 가득한 세상에서 희망을 읽어내는 시인 권성훈. ⓒ 실천문학사


죽음의 향기는 시집 곳곳에 잠복했다가 불쑥불쑥 나타난다. 책장을 넘기기가 저어될 지경이다. 권성훈의 어디에 이런 '어두움'과 '그늘'이 숨어 있었던 걸까? '남은 이유'라는 제목을 단 시 역시 사라짐과 소멸을 노래하고 있다. 읽어보자.

한여름 설렁탕집에서 마지막 밥알을 건져 올리는데
맞은편 노인이 뚝배기같이 금이 간 정오에 무릎을 꿇고 있다
평생 농사일로 검게 탄 눈을 껌뻑이다가
장마 전선에도 쑥쑥 자란 암소 한 마리 팔아 와서
사고 쳐 징역 간 손주 녀석 한 번만 살려 달라 애원한다….


자신의 전 재산일 것이 분명한 소를 팔아 감옥에 있는 손자와 합의해 달라며 피해자에게 매달리는 할아버지. 시의 어디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아버지'와 '어머니'. 이 건조하고 냉혹한 '부모의 부재'는 죽음보다 더 서럽다.

죽음 같은 삶, 혹은 죽음보다 못한 삶을 이어가는 게 비단 '개와 죽은 할머니' 그리고 '소를 팔아 손자 구하려는 노인'만일까?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느끼는 자들에게 세상이란 '죄 없이 갇힌 감옥'과 다를 바 없다. 시인은 '느끼는 인간'이다. 권성훈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휘청대며 겨우겨우 건너가는 세상을 이렇게 그려낸다. 아프다.

구르는 것은 흔들린다
바닥을 끌고 다닌 뒤꿈치 해진 온도를
덜커덩 내려놓는다
돌다가 멈춘 얼굴 없는 감정들
한쪽 발을 내밀며 풀리는 근육같이
어느 쪽으로 기운다고 해도 괜찮아….
- 위의 책 중 '바퀴의 환승' 부분.


'구르고' '흔들리다가' 결국엔 '덜커덩' 내려앉는 허술한 삶. 하지만, 왼편이건 오른편이건 한정 없이 기울어도 '괜찮다'고 한다. 이는 분명 시인이 독자들에게 전하는 위로일 터.

그래도 '희망'은 있다

동료시인 이수명은 <밤은 밤을 열면서>를 읽고 "권성훈은 누군가의 통점(痛點·고통스러운 부위)을 헤아리고 살피는 쪽에 서 있다"며 "그의 시들 역시 통점 안에서 쓰이고 읽힌다"고 간파했다. 동의한다.

권성훈은 남의 통점을 자신의 아픈 곳처럼 따스하게 쓰다듬을 수 있는 사람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죽음 가득한 세상'에서 다음과 같은 '희망의 메시지'를 진흙 속에 숨긴 보석처럼 시집에 묻어놓을 까닭이 없지 않겠는가.

잘라내도 목숨 건 수평으로 마중 나온다
밀어내도 달아나지 않는 밀물같이
버려도 구겨진 웃음을 매달고 있다….
- 위의 책 중 '휴지에게 사랑을 배울 때' 부분.


보잘 것 없는 '휴지'에서도 죽음을 이길 희망과 사랑을 발견해낸 권성훈은 19년 전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해 <유씨 목공소> <폭력적 타자와 분열하는 주체들> <현대시조의 도그마 너머> 등을 썼다. 현재는 경기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밤은 밤을 열면서

권성훈 (지은이),
실천문학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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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등의 저자. 경북매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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