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 전에 쓰인 책, 지금은 좀 다릅니까?

[서른 넘어 읽는 고전]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등록 2019.08.05 08:04수정 2019.08.09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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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넘어 읽는 고전'은 30대를 통과하고 있는 한 독서인이 뒤늦게 문학 고전을 접하며 느낀 재미와 사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걸리버 여행기>를 읽었다.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어렸을 때 다들 한 번쯤 읽지 않았나? 걸리버가 항해 중 소인국에 표류하게 되고 그곳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다가 다시 거인국에서 역지사지의 경험을 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모험담을 담은 여행기를 쓰며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

어른이 된 후에야, 사실 <걸리버 여행기>는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엄청난 풍자와 조롱을 담고 있는 어마어마한 책이라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들었다. 하지만 이마 다 아는 내용이라 딱히 읽어볼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볼테르의 <미크로메가스>를 읽게 되었고, 그제서야 호기심이 발동해 <걸리버 여행기> 완역본을 찾아 읽게 된 것이다.

<미크로메가스>는 시리우스 별에 사는 시리우스인이 토성인과 함께 우주를 떠돌다가 우연히 지구를 발견하고 자신에 비하면 원소와 같이 작은 존재인 인간을 만난다. 인간들과 대화를 나누며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욕심과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내용을 담은 짧은 콩트이다. 이것은 여러모로 <걸리버 여행기>를 떠올리게 한다.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문학수첩(1992) ⓒ 문학수첩



<걸리버 여행기>는 1부 소인국 릴리퍼트 기행, 2부 거인국 브롭딩낵 기행, 3부 천공의 섬 라퓨타와 주변국 기행, 4부 말들의 나라 휴이넘 기행, 이렇게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와 2부는 동화에서 본 내용과 비슷하다. 물론 동화에는 영국을 향한 신랄한 독설과 풍자는 삭제되었지만.

1부에서 소인국 '릴리퍼트'의 궁중 오락 중 하나인 '줄타기'에 대한 묘사가 재미있다. 이 '줄타기'에 대한 묘사가 참으로 절묘하여 이것이 과연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 영국의 모습인지, 21세기 대한민국의 모습인지 분간이 안 될 지경이다. 
 
이 놀이는 작은 사람들의 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국왕의 신임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줄타기 연습을 하는데, 반드시 귀족 출신이거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만은 아니다. 사망이나 파면으로 공석이 생겼을 경우, 대여섯 명의 후보들이 줄 위에서 춤추며 국왕과 대신들을 즐겁게 하는 경쟁을 시작한다. 줄에서 떨어지지 않고 가장 높이 뛰어오르는 사람이 그 자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따금 대신들도 국왕의 명을 받아 줄타기를 보여줌으로써, 아직 자신들이 줄타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42쪽)

소인국 릴리퍼트에 이어 당도하게 된 거인국 '브롭딩낵'에서 걸리버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거인들 앞에서 재주를 부리고 쇼를 하는 광대가 된다. 소문을 듣고 그를 궁궐로 초대한 왕비의 환심을 산 걸리버는 그곳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영국 정부에 대한 왕의 질문에 성실히 답한다. 조국에 대한 걸리버의 장광설을 들은 왕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영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아주 놀랄 만한 찬사를 했습니다. 그대는 의원의 자격을 갖추는 데 있어 무지와 태만, 부도덕이 적절한 요소라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만들었을 당시에는 아주 좋았을 제도들이 그대의 나라에서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하다가 이제는 부패되어 완전히 희미해지거나 제멋대로 변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대의 말을 들으면서 알게 된 것인데, 어떤 지위에 오르는 데 가장 합당한 이가 그 지위를 갖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대의 이야기와 내 질문,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을 종합해 보았을 때, 그대의 민족 대부분이 세상의 표면에 기어 다니게 된 생물 중 가장 유해하고 밉살스러우며, 작은 벌레들의 모임인 것으로 나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167쪽)

이제부터는 동화에서 생략된, 소설 <걸리버 여행기>의 대미, 3부와 4부가 시작된다. 1부와 2부에서는 영국 정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주를 이루었다면, 3부와 4부에서는 인간에 대한 혐오가 강하게 드러난다. '소인'과 '거인'을 비롯해 '여자'와 '영국'까지 돌려 까던 저자가 자신의 동족인 인간에 대한 환멸과 경멸에 이르는 이 부분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하늘을 떠다니는 섬 '라퓨타'의 사람들은 '머리는 모두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눈도 하나는 깊숙이 틀어박혔으며, 다른 하나는 위로 올라가 있는' 진기한 모습과 차림새를 하고 있다.

궁정 사람들은 실용 기하학을 경멸하고, 항상 깊은 사색에 잠긴 채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오로지 '수학'과 '노래'만을 중시하는 라퓨타에 싫증을 느낀 걸리버는 그곳을 떠나 래가도의 거대한 아카데미를 방문해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우스꽝스러운 연구들을 관찰한다.

아카데미에서 이루어지는 연구들은 모두 이상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오이에서 태양 광선을 추출해 내는 연구원', '인간의 대변을 다시 원래의 음식으로 되돌리는 일을 하는 연구원', '얼음에 열을 가해 화약으로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 '정치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학교'를 둘러보며 좋지 않은 경험을 한 걸리버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여 다시 영국으로 돌아갈 궁리를 한다.

영국으로 가는 길에 '마법사의 나라', '죽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일본을 거쳐 걸리버는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지만, 이번에도 역시 운명의 부름을 받아 또다시 항해를 한다. 항해 도중 그는 열대성 열병으로 죽은 선원들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선원을 모집하는데, 알고 보니 이들은 모두 해적이었다. 그들은 걸리버를 어느 해안가에 버리고 떠난다. 그곳에서 그는 기묘한 모습을 한 동물들을 발견한다.
 
나는 여행을 하면서 그렇게 기분 나쁜 동물은 결코 본 적이 없었다. 또한 지금처럼 반감을 품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 동물에게서는 경멸과 혐오를 강하게 느꼈다. (285쪽)

그곳은 '휴이넘'이라는 말들의 나라였다. 걸리버가 봤던 혐오스러운 동물은 퇴화한 인간의 모습을 한 '야후'들로, 휴이넘의 지배 아래에서 노예처럼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걸리버는 음식에 대한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된다. 야후들이 먹는 고기가 역겹게 묘사된다. 그는 휴이넘이 먹는 귀리와 우유를 함께 먹으며 '채식'과 '저염식'에 눈 뜨게 된 듯하다.    
 
갈색 말은 야후의 우리에서 당나귀 고기를 한 조각 가져왔다. 고기의 냄새가 너무나 불쾌한 것이었으므로 나는 구역질이 나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갈색 말은 그 고기를 야후에게 던져 주었다. 야후는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294쪽)

나는 이 섬에서 머무르는 동안, 한 번도 병에 걸리지 않았다. 건강에 좋은 풀들을 모아서 끓이거나 빵과 함께 샐러드로 만들어 먹기도 했으며, 버터를 약간 만들고 유청을 마시기도 했다. 소금이 없어서 처음에는 매우 곤란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습관적으로 소금이 없어도 만족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우리가 소금을 많이 사용하는 것은 사치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다. 처음에는 술을 마시기 위한 촉진제에 불과했다. 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소금을 좋아하는 동물을 본 적이 없다. 이 나라를 떠나고 난 다음, 소금이 들어간 음식을 참으면서 먹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298쪽)

야후들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그의 인간에 대한 혐오는 더욱 커지고, 자신이 야후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에 환멸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걸리버가 보기에 휴이넘은 자신이 본 모든 존재 중에 가장 우수하고 바람직하다. 그들은 이런 이상적인 존재들 속에서 생활하는 것에 너무나도 큰 만족을 느낀 나머지, 영원히 이곳에 머물고 싶어 하지만 결국 휴이넘에게 추방당한다.
 
휴이넘의 나라에서 추방을 당한 후, 계속해서 야후들과 만나게 되었지만 나의 마음은 여전히 휴이넘의 뛰어난 덕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내가 바로 야후의 아버지였으며, 더러운 야후와 오랫동안 성교를 해왔다는 생각이 들자, 극도의 수치심과 두려움을 느꼈다. 아내는 나를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나는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기절했다. 그렇게 역겨운 동물과 오래도록 접촉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366쪽)

400쪽이 채 되지 않는 이 책을 끝까지 읽는 일이 수월치는 않았다. 내 생각에 이 책을 완독하는 데 가장 큰 방해 요소는 반복되는 항해 과정이다. 그 당시의 항해술이나 지리에 대해서 아무리 자세히 설명해도, 그런 것들을 내가 이해할 리 만무하며 사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저자도 '당시의 상항을 자세히 이야기해서 독자들을 괴롭힐 생각은 없다'고 여러 번 양해를 구했듯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항해 과정은 적당히 대충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또 이 책의 곳곳에서 드러나는 여성 혐오 발언들은 옥의 티. 상당히 불쾌했지만, 300년 전 이야기임을 감안해 살짝 째려보며 즈려밟고 넘어가는 것을 권한다.

지루한 항해 과정과 여성 혐오 표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아주 흥미로웠다. 당대 사회와 권력을 향한 신랄함과 풍자에 있어서는 이보다 더한 책을 찾기 힘들 정도다. 지금 읽어도 이 정도니, 당시에는 정말 목숨을 내놓고 썼을 것이다. 조너선 스위프트가 이 책에 대해 친구인 찰스 포드에게 쓴 편지의 내용을 보면 그의 불안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나는 여행기를 마무리하고 고치고 다시 쓰고 정서하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새로 보탠 것과 함께 모두 네 부분으로 완결을 보았습니다. 세상이 이 작품을 받아들일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인쇄업자가 감옥에 갇히는 것을 각오할 용기를 갖게 되면 출판해 볼 생각입니다. (385쪽)

매사에 불평불만인 '투덜이 스머프', 세상만사 삐딱하게 보는 비관론자, 인간을 혐오하는 염세주의자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는 이런 '투덜이 스머프', '프로 불편러'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이상한 걸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싫은 건 싫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악'을 깎아내고 다듬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그들의 목소리가 커질 때, 사람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인지하게 되고, 잘못을 인식하게 될 때 비로소 더 좋은 쪽을 향한 고민도 하게 되는 것이다.

300년 전에 쓰인 이 책을 읽으며, 그때에 비해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진저리가 나기도 하지만, 이런 '투덜이 스머프'들이 있는 한 인류에게도 희망은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부디 그들의 목소리가 지금보다 더욱 커지길! 이 세상의 모든 '프로 불편러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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