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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 타는 60대 남녀, 이렇게 설레고 멋질 수가

[리뷰] 영화 <북클럽>, '정상의 사랑' 틀 넘어 다양한 이야기 담아

19.08.04 20:01최종업데이트19.08.04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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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20~30대 결혼하지 않은 남녀 간의 사랑만이 '정상'이라는 암묵적인 룰 속에서 그 외의 사랑은 비주류로 치부되거나 터부시되었던 건 아닐까. ⓒ Pixabay


나는 올해 49세 비혼 여성이다. 얼마 전 <혼자 살면 어때요? 좋으면 그만이지!>라는 책을 출간했다. 지금이야 비혼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져서 존중하는 목소리가 많아졌지만, 마흔을 넘긴 40대 비혼에 대해서는 여전히 시선이 살짝 복잡미묘하다. '아가씨'도 아니고 '아줌마'도 아니고, 애매하기 때문이다. 애매한 정체성 때문에 존재도 안개 같은지, 책을 내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잘 못 나가는) 40대 비혼 여성의 이야기는 처음"이라는 거였다.

생각해 보니, 중년 비혼 여성의 이야기 특히 '사랑 혹은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접하지 못했다. 얼마 전 책을 내고 오랜 만에 지인들을 만났을 때, 대부분의 기혼들이 나에게 한 말이 "그래도 너는 공식적으로 연애를 할 수 있잖아"였다. 이 나이에 싱글이라고 하면, 자유로운 연애가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정작 특권을 갖고 있는 자는 무덤덤하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 연애담을 주변에서는 많이 볼 수 없다. 알고 보면 나이든 비혼들이 꽤 많은데도 말이다. 일하면서 만난 이들 중 나보다 12살 정도 많은 한 비혼 여성은 내가 쓴 책을 보고는 이런 카톡을 보내왔다.

"난 자기 나이 땐 아직도 퍼펙한 왕자님을 기다리고 있었지. 자기는 일찍 철이 난 거예요. 지금이 제일 좋은 때니까 열심히 파이팅!"
 
'나, 왕자님을 구하기 위해 파이팅해야 하는 거야?' 그러다 그럼 '내가 공주님인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40대 비혼 공주도 신선하겠다 싶었다. 지금까지 어디에도 없던 캐릭터니까.

공주와 왕자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40대 비혼의 사랑 이야기가 어디에 존재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신사의 품격>은 잘 나가는 잘 생긴 남자들의 이야기라 거리가 있고, 40대 비혼 여성의 연애와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철 없는 이모로 가족들에게 민폐를 끼쳤던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 양희경씨가 연기한 엄순애 역 정도가 떠오를 뿐이다. 로맨스는커녕 아예 이야기의 소재조차 되지 못하는 주목받지 못하는 군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이미지로 잡히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왜 40~50대 비혼 중년 여성의 사랑 이야기는 없을까. 나이든 여성과 남성의 로맨스는 왜 눈에 띄지 않을까. 그런 의문이 들던 차에 영화 <북클럽> 개봉 소식을 듣고 얼른 극장으로 달려갔다. 나이 지긋한 여성들 4명이 있는 사진 위로 "사랑도, 연애도 세상은 여전히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뜻밖에 찾아온 두 번째 설렘"이라고 쓰여진 포스터 카피에 '어머, 이건 봐야 해' 하면서.
 
'60대 남녀의 썸'이라니, 멋지지 않은가
 

영화 <북클럽> 포스터 ⓒ 영화사 진진

 
<북클럽>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중년, 아니 노년의 사랑을 그린 영화다. 그런데도 재미있고 진솔하고, 게다가 섹시하다. 여기서 '그런데도'라는 접속사를 붙인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노년의 사랑이다 하면, 어쩐지 처연하거나 사랑보다는 돌봄의 이미지가 더 강해서 재미있고 섹시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디어마이프렌드>에서 김혜자씨와 주현씨의 로맨스가 있었지만 거기에 '치매'라는 코드가 들어간 것만 해도 그렇다. 실제 미국의 노년들은 영화 같은 로맨스가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허구라 해도 이렇게 멋지고 재미만 있다면 뭐가 문제인가.
 
<북클럽>은 노인판 <섹스 앤 더 시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섹스 앤 더 시티>에서는 네 명의 친구들이 브런치 모임을 하는 한편, <북클럽>에서는 4명의 60대 여성, 다이앤, 비비안, 섀론, 캐롤이 한 달에 한 번 책모임을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탄한 결혼생활을 하다가 남편과 사별한 지 1년이 된 다이앤. 멀리 떨어져 사는 딸 둘은 혹시나 엄마를 거동이 불편한 노인 취급을 하며 늘 노심초사한다. 그래서 자기네가 사는 곳으로 엄마를 모시고 가려고 늘 기회만 엿보고 있다.

큰 호텔을 운영하는 비비안은 다른 친구들이 가는 결혼, 출산, 육아의 길을 걷지 않은 비혼이다. 대신 남성 편력이 심한 자유로운 영혼이다.
 

영화 <북클럽> 스틸 컷 ⓒ 영화사 진진

 
비비안만큼 좋은 스펙을 자랑하는 사람이 섀론이다. 무려 연방법원 판사다. 법정에 선 그녀는 '엄근진(엄격, 근엄, 진지)'이고, 친구들과 만날 때도 제일 점잖은 축에 속한다. 단지, 자신과 이혼한 뒤 딸 뻘 되는 여자와 약혼한 전 남편 톰이 계속 신경이 쓰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캐롤은 자신의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는 셰프다. 남편 브루스와의 사이가 달달한 '잉꼬부부'였는데, 브루스가 은퇴하면서 이들의 관계에도 위기가 찾아온다.
 
이렇게 연애사, 가정사, 인생사가 저마다 다른 네 명이 모여서 책모임을 하는데, 어느 날 비비안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라는 책을 선정하면서 각자의 상황에 맞게 자극을 받는다. 그리고 마법처럼 이들도 사랑과 얽히게 된다.
 
이들의 로맨스는 기존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을 따른다. 먼저 다이앤은 딸들이 사는 애리조나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 남성을 만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그가 비행기 기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데이트를 시작한다. 비비안은 우연히 호텔에 묵게 된 40년 전 '썸남' 아서를 만난다. 60이 넘어 만난 그들은 다시 밀당하며 썸을 탄다. 60대 남녀의 썸이라니, 멋지다. '엄근진' 섀론은 책에 자극받아서 데이트 어플에 자신의 프로필을 올리고 적극적으로 파트너를 찾아 나선다.
 

영화 <북클럽> 스틸 컷 ⓒ 영화사 진진

 
이들은 친구의 첫 데이트를 응원하면서 옷을 골라주기도 하는데 그런 모습이 마치 소녀들처럼 귀엽다. 60대 중후반인데도 이런 설정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과연 '나이 든 사람의 로맨스'는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일까?

결국 이들의 사랑은 우여곡절을 통해 이루어진다. 다이앤은 자신을 돌봐야 할 노인네 취급하는 딸들의 속박에 대해 "엄마는 점점 늙고 있지만 엄마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사랑을 선택하고, 비비안도 썸남 아서와 맺어진다. 캐롤은 남편과의 오해과 갈등을 풀고 다시 전과 같은 달달함을 회복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람은 섀론이다. 마음먹고 데이트 어플을 통해 데이트를 하기 시작했는데, 나오는 사람들은 그저 그렇다. 썩 끌리지 않는 상대를 만난 자리에서 하필 남편과 그의 젊은 약혼녀를 만나자 섀론은 어플에서 자신의 프로필을 숨겨 버린다. 프로필과 함께 사랑에 대한 그녀의 도전도 전격 후퇴했다.

그 이후 아들의 약혼식장에 간 섀론은 쿨하게 아들의 결혼을 축하하고, 남편의 새 출발을 위해 건배한다. 그리고 "사랑은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본다"는 셰익스피어의 명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눈을 멀게 하는 것도, 전쟁도 아니에요. 누가 의미를 줄 때까진 그냥 단어일 뿐이죠." 그리고 그녀는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데이트 어플에 접속한다. 사랑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자기 자신이라는 말은 결국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선언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이 든 사람들의 로맨스는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일까. 주변을 돌아보면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은 가족, 친구들, 지인들이 있다. 자유로운 영혼까지는 아니지만 내게 카톡을 보내온 60대 비혼 여성도 있고, 이혼해서 혼자 대학생 딸을 키우고 있는 친구도 있고, 사별한 지인도 있다. 그들 중에는 혼자 잘 사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젊을 때 못지않게 열애를 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세상에는 사랑이 충만한데 왜 사랑 이야기는 일부의 전유물로만 소비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영화 <북클럽> 스틸 컷 ⓒ 영화사 진진

 
어쩌면 우리의 시각이 '정상의 사랑'에 너무 맞춰진 건 아닐까. 20~30대 결혼하지 않은 남녀 간의 사랑만이 '정상'이라는 암묵적인 룰 속에서 그 외의 사랑은 비주류로 치부되거나 터부시되었던 건 아닐까. 연애와 사랑의 이야기는 젊음이라는 나이, 남녀라는 성별 안에서만 아름답고 로맨틱할 수 있는 건 결코 아닌데도 말이다. 그나마 요즘에는 동성 간의 사랑도 다루고 있지만 여전히 조심스럽고, 어설프게 다루다가는 큰 저항을 받기 십상이다. 이렇듯 익숙하지 않은 것에 엄격하다 보니 대중매체에서 좀 더 다양한 사랑 이야기를 접하는 게 어려운 건가.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질문들이 계속 꼬리잡기를 했다.

살기 힘든 세상에 웬 사랑 타령이냐고 묻는다면, 노년의 유치하고 뻔한 로맨틱 코미디가 예상 외로 너무 멋지고 유쾌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의 존재 때문이다. 기형도 시인의 <쥐불놀이>라는 시에서 나온 표현처럼 우리는 모두 '사랑을 목발 삼아' 사는 존재이므로.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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