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이 친일할 수 밖에 없었다'는 거짓말

등록 2019.08.02 08:30수정 2019.08.05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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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 중 한 분은 정말 대단한 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국어책의 모든 내용을 어찌나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게 가르치시는지, 한 번 들은 것은 결코 잊혀지는 법이 없었다. 앞 시간까지 꾸벅꾸벅 졸다가도 국어 시간이 되면, 잠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따로 집에서 국어공부를 하지 않았어도, 모의 예비고사(그 당시는 예비고사가 있었다)에서 국어 점수는 언제나 따 놓은 당상이었다.

국어 선생님은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를 가르치면서 이 시에 나타난 아름다움은 '원숙미'라 알려주셨고, 시에 나타난 '내 누님'의 나이는 40대 중반의 중년여성일 것이라 말씀하셨다. 신기하게도 이런 설명은 모의 예비고사에 등장했고, 답을 맞추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국어 머리가 그닥 좋지 않았던 나로서는 왜 그 누님이 '40대 중반의 원숙한 여인'일까 많이 궁금했었다.

언젠가 그 국어 선생님은 '모든 문학 작품은 작가의 삶의 연장에서 비롯된다'고 말씀하시고는 그 예로 서머셋 모음을 들어 주셨다. 인간의 내면적 위선을 그린 작품 The Rain(비)은 자신을 길러준 목사 숙부의 집에서 살았던 경험이 밑바탕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의 걸작이랄 수 있는 The Summing Up은 의사에서 문필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그가 겪었던 삶의 여정이 그 뿌리를 이루고 있다는 것, 등등을 들어 주셨다.

서정주가 친일을 한 것을 알게 된 것은 제법 나중 일이었다. 어차피 나는 문학도가 아니었으므로 서정주에 대해 그닥 관심쓸 일도 많지 않았던 탓이었을 거다. 국어 선생님이 국화 옆에서가 우리나라에서 몇째 안가는 정말 잘 쓴 시라고 극찬을 하신 바도 있어서,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크게 실망을 하기도 했다.


친일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서슬이 퍼런 당시 일제 하에서, 친일을 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는 언제나 함께 따라오는 말이 있다. 당신이라면, 그 당시 끔찍했던 박해를 견디어내고 친일하지 않았을 것 같냐는 질문. 그 당시의 삶을 살아보지 못했던 우리는 어느 정도 이 대목에서 자기 성찰적으로 변신한다. 정말 내가 그 때 살았더라면? 변절하지 않았을 수 있었을까? 보통의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자기 자신을 향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명제이다.

그 다음으로 또 하나가 곁들여진다. 서정주의 친일은 안타깝지만, 그가 문학에 기여한 바는 인정해야 한다는 것. 아니 서정주 뿐만이 아니다. 이광수도, 최남선도, 그 누구도, 그 당시 그들이 한국 문학에 기여한 공로는 그들의 친일과는 별개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정주는 이런 주장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작가 중 한 명일 것이다.

하지만 나의 자기성찰적 의무는 2019년 7월 한 달 동안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럴 필요 자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친일은 결코 서슬이 퍼런 치하에서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강요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여실히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기묘하게도 이 증명은 친일을 하는 자들에 의해 증명되었다.

조선일보의 일본판에 실린 '한국은 무슨 낯짝으로 일본의 투자를 기대하나'라는 기사는 친일이 어떤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는지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친절한 설명서이다. 동시에 일제 강점기의 친일이 어떤 상황에서 벌어졌을지를 보여주는 설명서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친일을 했을지, 굳이 그 시대에 살아보지 않았어도, 바로 우리 눈앞에서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말하자면 삽화가 있는 설명서이다. 그 삽화에 시퍼렇다던 일본인의 서슬은 그려져 있지 않다.

이로써 내 마음속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으면서, 지워도 지워도 지워지지 않던 자기 성찰적인 고민은 이제 말끔해졌다. 그 때도 지금도, 친일은 상황의 문제가 아니었다. 친일은 어디까지나 자기 헌신적인 친일이었을 뿐, 결코 누구에게 요구를 받은 것도, 강요를 받은 것도 아니었던 것. 어느 누구도 중앙일보의 전영기에게 '대법관들이 잘못 끼운 첫 단추'라는 글을 쓰도록 강요하거나 강제한 적은 없었다. 이 점에서 한가지 고민을 덜게 된 2019년의 7월은, 그냥 여느 해의 7월과 조금은 다른 7월이 된 셈이다.

다시 '모든 문학 작품은 작가의 삶의 연장에서 비롯된다'는 국어 선생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이제 이 시가 정말 한국의 시를 대표할만큼 아름다운 시였는지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서정주는 친일 작가였고, 2019년 친일에 미루어 그의 친일이 매우 자발적인 친일이었음을 상상해 볼 때, 이 시는 매우 헌신적인 일본 찬양시는 아니었을까? 그 많은 꽃 들 중에 왜 하필이면 일본 왕가를 상징하는 국화 꽃이었을까?

국화 꽃을 일본의 왕실로 바꾸어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이 시가 어떤 시였는지 단숨에 이해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이는 내가 알아챈 것이 아니다. 나에겐 그럴만한 문학적 이해력이 없다. 어느 누군가가 알려 주었던 것. 그 분께 감사한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40대 원숙한 여인'이 어쩐지 생뚱맞다고 느꼈던 것이, 오히려 그럴만했다고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어쩔 수 없이 친일할 수 밖에 없었다는 너희들의 거짓말은 이제 여기까지다. 2019년 7월, 너희들은 그 말이 거짓임을 몸소 증명했다. 서정주의 친일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의 문학적 가치는 별개로 인정해야 한다는 그 얘기도 모두 거짓임을 생생하게 증명해 주었다. 2019년 7월이 지닌 역사적 가치는 많지만, 너희들의 거짓을 너희가 애써 입증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가 결코 부족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 #전영기 #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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