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이 주는 술잔 거부한 신입, 그 후에 벌어진 일

[존버가 목표입니다] 내가 회사에서 '자발적 아싸'가 된 이유

등록 2019.08.08 09:00수정 2019.08.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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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서 하는 일. 일하면서 떠올랐던 생각들을 공유하고자 합니다.[편집자말]

군대 같았던 회사 ⓒ pixabay

 
내가 입사했을 때 우리 부서 직원은 모두가 남성이었다. 상명하복식 군대 문화를 매우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전통적인 기계/제조업 분야에 속해 있는 회사여서 전체 여성 직원 비율이 낮기도 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부서장이 여성 직원을 일부러 안 받았다는... 아무튼 그 때 우리 팀은 남성들끼리 모여서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였는데, 군대와 공대를 거쳐 살아온 내겐 그곳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무엇이라 정의하기 힘든 신세대인 'X세대'들이 신입사원으로 입사하기 시작한 지 몇 해 정도 지난 시점이어서, 기존의 군대식 회사 문화가 어느 정도 변화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X세대 남성들은 회사 문화를 바꾸기보다는 회사 문화에 편안하게 물들어 갔다. 공식적인 회의에서 불과 3~4년 먼저 입사한 선배들로부터도 '까라면 까는 거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이런 회사에서 회식을 하게 되면 어떤 분위기일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회식 장소는 대체로 고깃집. 왁자하게 술을 마시며 거나하게 취해 서로에게 서운했던 일을 이야기하며 갈등을 풀기도 하고(물론 다시 싸우기도 했다), 그간 얄미웠던 다른 팀 사람들을 함께 욕하며 하나됨을 확인하기도 했다.

"전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나와 동기들이 팀에 배치된 후 신입사원 환영 회식이 열렸다. 팀장은 우리 회사의 위상, 그 안에서 우리 팀의 역할, 신입사원들에게 거는 기대 등을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술을 따라주고 받기 시작했다. 팀장은 자신의 소주잔을 옆에 앉은 동기에게 건네며 술을 따라준다. 그러면 잔을 받은 사람은 그 잔을 비운 후 다시 팀장에게 그 잔을 건네고 술을 따라 드린다. 이걸 함께 모인 사람들 모두에게 반복한다. 팀장은 엄청난 술고래였다.

사람들에게 돌아가던 잔이 드디어 내게도 왔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나.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었다. 술을 마셔서 알딸딸해지는 상태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몸이 술을 잘 받아내지 못했다. 예의 상 윗사람들이 따라주는 술을 한 두 잔 받을 수도 있겠지만 강압적으로 술을 권하는 분위기가 싫어 학교 생활 내내 아예 술을 마시지 않으며 지냈다.

대학 입학 때 흔하게 하던 신입생 환영식에서도, 학과 모임 때 선배들이 술을 따라줘도, 대학원 때 실험실 회식 모임에서도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는 학교와는 또 다른 진짜 사회가 아닌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처음 만난 부서의 팀장이 술을 권하고 있었다.

난 팀장님이 권하는 술을 받지 않았다. 대신 당돌하게 나갔다. "전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라고 선언하며 소주병 대신 사이다병을 내밀었다. 팀장님을 포함해 회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경악했다. 차마 '강압적으로 술을 권하는 게 싫어서 안 마십니다'라고 대답하지는 못하고 몸이 술을 잘 받지 않아 못마신다고 했다.

팀장도 바로 물러서지 않았다. 술은 마시면서 익숙해진다며 다시 권했다. 대체 뭘 믿고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난 팀장님이 권하는 술을 끝내 마시지 않았다. 팀장님 표정은 어두워졌고 분위기는 뭐라 말할 수 없게 어색해졌다. 

그럼에도 난 끝까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도중에 태도를 바꿔 술을 마시면 안될 것 같았다. 싫은 건 그냥 안 해버리는, 융통성이 0에 한없이 가까운 성격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무탈하게 사회생활을 하기엔 참 쉽지 않은 성격과 태도를 가진 신입사원이었다. 간을 배 밖에 빼놓고 다니는 신입사원. 팀장님은 운나쁘게 '또라이' 하나를 만났던 것이다.

회식 자리에서 오고가는 것들
 

팀장님이 내게 술잔을 건넸다 ⓒ pixabay


팀장님도 분위기를 더이상 나쁘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걸까. 내게 더는 술을 권하지 않고 옆 사람에게 술잔을 넘겼다. 그 시간 이후로 그는 회식하는 내내 내게 말을 걸지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술잔이 몇 번이나 돌았던 것 같다. 그 때마다 팀장이 내미는 술잔은 나를 건너뛰고 지나갔다. 가시방석에 앉아 있다는 말이 꼭 맞아떨어지는 상황이었다.

회식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팀장님이 내게 다가와 왜 술을 마시지 않느냐고 다시 한번 이유를 물었다. 이제 와서 술잔을 받을 수는 없었기에 난 똑같은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때 팀장님은 신사적이어서 자기 고집을 굽히지 않는 신입사원에게 막말이나 욕을 해대지는 않았다. 나름 좋은 사람이었다. 마지막엔 자기 팀원으로 들어와 반갑다며 고기 한 점을 상추에 싸 내 입에 넣어주기까지 했으니.

팀장님은 이런 나를 보면서 시대가 참 좋아져 그럴 수 있다고 했다. 그 말도 맞다. 내가 시절을 잘 만나서 팀장이 권하는 술을 거부하고도 무사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 후로 나는 계속 비주류로 회사 생활을 하고 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비주류일 뿐만 아니라, 요즘 말로 '아싸(아웃사이더)'라고 할 수 있는 비주류가 되기도 했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자발적 아싸'라고 해두자.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인사상 불이익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해서 비주류가 된 것은 아니다. 담당하는 일의 성과만을 가지고 회사생활을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회사도 결국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에 중요한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다. 회식 혹은 술자리에선 알게 모르게 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회식 자리에서 술잔만 오고가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 잘 풀리지 않던 일들이 한 두 차례의 회식 자리에서 풀리기도 하고, 협조가 되지 않는 부서와는 억지로라도 술자리를 만들기도 한다. 환영회식에서 팀장의 술잔을 거부한 사건 이후로 내게 술을 억지로 권하는 사람은 없어졌지만, 조금은 편하게 관계를 맺어갈 수 있는 기회도 함께 없어졌다. 관계를 부드럽게 풀어갈 수 있는 나만의 방법들을 찾아야만 했다.

(* 다음 기사에서 비주류의 회사생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블로그(네이버, 티스토리)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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