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헌신해야 평화롭다? 다 헛소리일 뿐

[여자의 소설] 패니 플래그 소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등록 2019.08.11 11:25수정 2019.10.14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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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소설가가 통찰력 있게 그려낸 여성 서사를 통해 여성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합니다. 여성에게 의미 있는,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더 많은 여성 서사가 우리 삶에 스며들길 기대합니다. - 기자말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책표지 ⓒ 민음사

 
밤에 자려고 침대에 누울 때면 내 인생은 이제 여기서 진전 없이 끝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엄청난 미래를 그려오진 않았지만 적어도 이 정도에서 멈추려고 지난 선택들을 해오진 않았다는 생각에 잠이 확 달아난다. 이런 생각이 들면 나는 잠을 얼른 포기한다. 잠을 자는 대신 자세를 바로잡고 앉아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지난 며칠의 상황을 가늠해본다. 그렇게 십 분, 이십 분 차분히 생각하다 보면 다시 마음에 질서가 돌아온다.


혼자서 마음을 추스릴 때 내가 하는 일이란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는 것이다. 마음을 이해하게 도와주고, 달래주고, 일으켜 세워주고, 생각을 정리해주며, 또 명징한 시선으로 상황을 해석하게 해줄 이야기들.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을 때도 물론 많다. 이럴 땐 역시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내가 나에게 들려주지 못하는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읽는 것이다.

레베카 솔닛은 <멀고도 가까운>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야기한다. 살아가기 위해"라고 말했다. 그녀는 이야기를 이렇게 정의했다.
 
"이야기는 나침반이고 건축이다. 우리는 이야기로 길을 찾고, 성전과 감옥을 지어 올린다. 이야기 없이 지내는 건 북극의 툰드라나 얼음뿐인 바다처럼 사방으로 펼쳐진 세상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레베카 솔닛의 말을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건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좋은 이야기들이라고. 길 잃은 우리를 이끌어줄 북극성 같은 이야기들이라고. 혼자 조용히 앉아 내면을 들여다본 적 있는가. 당신의 내면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는가. 그 이야기가 오늘도 당신을 구원해주고 있는가. 

자신에게 드려줄 이야기가 없다면

소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에 나오는 에벌린 카우치는 자신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없는 여자다. 마흔여덟 살인 에벌린은 지금 "어디쯤에서 길을 잃고 말았"지만 그녀 손에는 나침반이 없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여기저기 손을 내밀어 보지만 그녀를 이해해줄 이도 주위엔 아무도 없다. 남편 에드는 가장 역할을 연기하다가 이제는 자기만의 동굴 속에서 허우적대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고, 자식들이라고 해봤자 그녀를 앞질러 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이 세상이 두려울 만큼 낯설다. 세상은 그녀만 놔두고 너무 빨리 변했다. 에벌린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세상은 단순해 보였다. 순결을 지키며 정숙하게 지내는 여학생에게 이 세상은 따뜻한 미소를 보내주었으니까. 에벌린은 미소를 따라 걷기만 한다면 세상이 응당 그녀에게 합당한 보상을 내려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에벌린은 이제야 그간 그녀가 지켜온 가치가 모두 헛소리일 뿐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착한 여자, 조신한 여자, 남편에게 헌신하는 여자,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누구에게든 양보하는 여자. 에벌린은 이런 여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바람피운 남편에게 화를 내는 대신 아내는 남편의 행복을 위해 삶을 바쳐야 한다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었으며, 멀어지는 아들에게도, 엄마는 바보라고 야유하는 딸에게도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가정이 안정되기만을, 평화롭기만을 바랐다. 자신의 마음이 산산조각 나고 있는 것도 모르는 채.

에벌린은 이제 안다. 착한 여자로 살든, 그렇지 않은 여자로 살든, 인생은 누구에게나 어차피 때론 불행하고 때론 행복할 뿐이라는 걸. 그녀가 평생 지켜왔던 가치가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이제는 그녀를 바보 같은 여자이자 퇴물로 만들어 버렸다는 걸.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그녀는 늘 겁에 질려 있었다. 아주 작은 빌미만 주어져도 가차 없이 욕을 해대는 세상과 남자들이 두려워 잔뜩 웅크리고 살았다. '욕먹는 것에 대한 공포'는 선택 앞에서 늘 가장 강력한 기준이 되었다. 그녀는 두려워서 선택했고, 무서워서 선택했다. 에벌린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이 단순한 사실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그녀는 무엇을 좋아하며, 무엇을 하고 싶은가. 생각해 본 적 없다.
 
"에벌린은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라는 말을 들을까 봐 순결을 지켰다. 노처녀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결혼을 했다. 불감증이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오르가슴을 연기했으며,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아이들을 가졌다. 괴상하다거나 남성 혐오자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았고, 못된 년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바가지를 긁지도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퇴물이 된 에벌린은 아침에 눈을 뜨면 그녀의 삶에도 어떤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길 무기력하게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밤이 되면 어김없이 오늘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나날의 반복이었다.

공허감이 사라지지 않아 먹을 것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절망감이 극도에 다다를 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을 상상하며 죽음 언저리에서 살고 있는 에벌린. 이런 에벌린 앞에 이야기꾼 스레드굿 부인이 나타난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원작으로 한 영화 ⓒ 존 애브넷

 
좋은 이야기의 힘 

1985년 12월 15일, 에벌린은 시어머니가 요양하고 있던 로즈 테라스 요양원에서 스레드굿 부인을 처음 만난다. 여든 후반인 스레드굿 부인은 본인을 휘슬스톱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꿈결처럼 행복했던 젊은 시절을 보낸 곳이자 사랑하는 사람이 가득했던 고향 휘슬스톱.

부인은 일주일에 한 번 에벌린이 요양원에 올 때마다 휘슬스톱에서 있었던 이야기란 이야기는 전부 들려줄 작정인 것 같다. 스레드굿 집안사람들이 얼마나 멋졌으며, 휘슬스톱 카페에서 만든 음식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건이 있었는지. 무엇보다 이지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이었는지.

에벌린은 세상을 인식하자마자 두려움에 떨며 알 속으로 숨어 들어간 여린 새였다면, 이지는 시행착오 없이 바로 세상을 향해 날깨를 쫙 펴고 날아간 강인한 새였다. 인습의 굴레가 개인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시기였는데도 집요한 인습의 장막은 이지를 덮지 못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이미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분명히 구별했으며, 또 선하고 지혜로운 부모의 영향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확히 배울 수 있었다. 이지는 욕먹을 생각에 두려워하기는커녕 제 감정과 생각을 용감하게 표현했고, 또 옳은 일엔 목숨 걸고 덤벼들었다. 사람들은 이런 이지를 사랑했다.  

스레드굿 부인의 이야기 속에 자주 등장하는 휘슬스톱 카페. 이곳은 이지, 그리고 또다른 여인 루스가 사랑으로 함께 꾸려가는 카페이자 마을의 이야기가 모이는 장소였다. 근처 부랑자 중 카페에서 밥 한 번 안 얻어먹은 사람이 없었으며, 흑백분리정책 때문에 흑인에겐 음식을 팔 수 없는데도 이지와 루스는 몰래 흑인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그들과 서슴없이 친구가 되었다.

이지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많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제 맘에 드는 패션 스타일을 이미 구축한 당찬 소녀였는데, 열 살 즈음에 불편하기만 한 드레스를 벗어던지며 이렇게 외친다. "죽을 때까지 드레스는 더 이상 입지 않을 거야!" 그러고는 정말 죽을 때까지 드레스 대신 바지와 셔츠를 입고 다녔다.

떠돌이 스모키와 친구가 된 에피소드도 마음에 든다. 낡아빠진 옷에 가죽도 다 해진 신발을 신고 카페에 나타난 스모키에게 이지는 맛있는 식사를 내주는 것도 모자라 농담하기 좋아하는 성격답게 이 낯선 남자를 실컷 웃게 만든다. 외롭고 쓸쓸하던 스모키의 삶에서 이 웃음은 정말 소중한 것이었다.

로빈 후드처럼 멋진 활약을 하기도 했다. 휘슬스톱엔 몇 년째 도둑이 출몰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레일로드 빌'이라 불렀다. 대공황기였던 당시 레일로드 빌은 정부의 물자 수송 기차에 몰래 올라 타 식료품이나 석탄을 밖으로 내던지며 공무원들을 골탕먹였다. 흑인들이 굵어 죽거나 얼어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정부에선 현상금까지 내걸었지만 아무도 빌을 신고하지 않았고, 흑인들은 빌이 잡히지 않도록 그를 위해 기도했다. 레일로드 빌은 물론 이지였다.

책을 읽으며 나는 스레드굿 부인이 사랑하는 고향 사람들을 모조리 다 사랑하게 됐는데, 이유는 그들이 편견 없는 태도로 사람을 대해서였다. 휘슬스톱 사람들은 아무도 타인의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점 때문에 이 소설은 내게 판타지 소설로도 읽힌다. 이 세상 어느 마을로 가야 나를 있는 그대로의 나로 받아들여줄 사람이 이처럼 많을까 싶어서. 그렇기에 이 소설이 그려 놓은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누군가에게 치유일 수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절로 타고난 나의 모습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지와 루스의 사랑을 바라보는 휘슬스톱 사람들의 시선에도 편견은 없다. 아름다운 여인인 루스를 사랑하게 된 이지. 야생마 같은 이지의 매력에 빠진 루스. 시련이 없던 건 아니지만 결국 그들은 억지로 자신들의 사랑을 포기할 필요 없었다. 

에벌린의 변화  

스레드굿 부인의 이야기가 주말 드라마처럼 끊이지 않고 상영되면서 에벌린은 점점 적극적인 청자가 되어간다. 왠지 애간장을 태우도록 이야기를 끌어가는 스레드굿 부인 때문에 에벌린은 주말이 돌아오면 최대한 빨리 휴게실로 찾아가 '그래서 루스는 어떻게 다시 휘슬스톱으로 돌아오게 된 건데요?'하고 묻게 된다.

가끔은 마치 에벌린 자신의 삶보다 휘슬스톱 사람들의 삶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에벌린은 주말이 기다려졌고, 스레드굿 부인이 좋아졌으며, 자기가 자기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고 느꼈다.   

과감하게 삶을 개척한 이지의 삶은 에벌린의 삶과 거의 모든 부분이 달랐다. 하지만 에벌린은 이 활력 넘치고 정의로운 여인의 삶에서 위로를 받는다. 그녀가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라도 알을 깨고 나와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나도 한 번쯤은 나를 믿어도 되지 않을까. 이지가 스스로를 믿었던 것처럼, 스레드굿 부인이 나를 믿어주는 것처럼, 나도 나를 믿을 수 있지 않을까. 
 
"매주 스레드굿 부인과 함께했던 근래의 몇 달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니니 스레드굿은 에벌린에게 젊다는 느낌을 갖게 해 주었다. 에벌린은 앞으로 살아갈 날이 반이나 남은 여자로 자신을 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친구는 진심으로 에벌린이 메리케이 화장품을 판매할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이전에는 에벌린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우선 그녀 자신부터가 그랬다. 스레드굿 부인이 그런 이야기를 자꾸 하자 에벌린은 점점 더 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에벌린은 변했다.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려 한다. 한 번도 발휘하지 못한 재능이 내 안에도 있다고 믿고, 그 믿음의 힘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스레드굿 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에벌린 내면으로 스며들어 그녀의 삶을 어루만져주더니 그녀의 등을 가볍게 밀어주기까지 한 것이다.

에벌린의 변화를 통해 이 소설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어쩌면 참 소박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치고 힘이 들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면, 일어나기 위해 혼자서 너무 많이 애를 쓰진 말라는 것. 때론,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에 기대봐도 좋으리라는 것. 따뜻한 마음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덧 조금씩 다리에 힘이 붙으리라는 것.

이 소설은 또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 삶을 이끌어줄 이야기를 찾아내야 하고, 그 이야기 속에서 삶을 지속할 힌트를 얻어야 한다고.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패니 플래그 (지은이), 김후자 (옮긴이),
민음사, 2011


#프라이드그린토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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