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현장, 거기에도 사람이 있다는 분명한 사실

[서평] 비인간적인 드라마 현장을 담은 르포르타주, <가장 보통의 드라마>

등록 2019.08.11 19:44수정 2019.08.1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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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후, 제작 과정에서 전 스태프들에게 표준근로계약서를 쓰게 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었다. 원체 영화 현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았던 만큼, 법으로 규정한 주 52시간을 지켰다는 이유만으로 주목 받았다. 

그에 반해 드라마 현장은 어떤가. 2016년 tvN <혼술남녀>의 조연출이었던 이한빛PD가 해당 방송 종영 이튿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실이 1년 후인 2017년 동생 이한솔씨에 의해 밝혀졌다. 한빛 PD(이한솔씨는 책에서 이한빛 PD를 이렇게 부르곤 한다)는 드라마 제작현장에서 언어폭력을 당했으며, 과도한 업무량으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산업 규모 커졌지만 구성원 처우는 여전히 후진적
 

<가장 보통의 드라마> 책 표지. ⓒ 필로소픽

 
이에 이한솔씨는 한빛PD의 유지를 이어나가기 위해 방송 현장의 문제를 제보받고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를 설립해 활동 중이다.

책 <가장 보통의 드라마>는 '활동가 이한솔'이 드라마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은 것에 대한 르포르타주다. 드라마 산업이 커지면 커질수록 문제도 많이 발생함을, 저자는 지적한다. 
 
드라마는 한국 방송업계에서 오랜 시간 돈이 가장 많이 되는 산업이었다. (중략) 드라마 시장은 10년 사이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규모가 커졌고 구조도 복잡해졌다. 하지만 드라마 산업이 확장되는 동안 누구도 카메라 뒤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자본의 흐름이 노동자를 착취하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드라마 산업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현장 종사자의 처우는 개선되지 않고 더욱 악화되었다. 

대표적으로는 비용절감을 위한 노력이 구성원들에 대한 처우 악화로 돌아오는 경우다. 외주제작은 방송국 자체 제작보다 훨씬 저렴하다. 따라서 '제작비 후려치기'로 외부 회사에 제작을 맡기고 방송국은 편성만 책임지는 형태가 만들어진다. 2015년 기준으로 드라마 제작의 외주비율은 70%를 넘은 상태다. 

드라마 편수가 늘어나고 경쟁은 심화돼 제작사의 이윤이 줄어들자, 제작사는 인건비를 감축하는 방식으로 손해를 충당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작환경이 개선될 리 만무하다. 

한빛 PD의 근무기록에 따르면, 드라마를 만들기 시작한 이래 55일 동안 휴일은 단 이틀뿐이었다. 한빛 PD는 20시간 촬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두 시간을 잔 뒤에 다시 촬영장으로 나가야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정권이 바뀌고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되어도 드라마업계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꼼수만 더 늘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농담 같은 일이 발생했다. '21시간 일하는 것이 살인적이라 하니 18시간으로 줄이겠다. 다만 주 6일 일하던 스케줄을 주 7일로 바꾼다'는 공지가 스태프에게 내려왔던 것이다. (중략) 회사가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 정확하게 일주일에 126시간이라는 변동 없는 근무시간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조삼모사처럼, 하루에 3시간 쉬고 일하는 게 힘들면, 6시간 쉬게 해줄 테니 휴일을 반납하라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을 대책이랍시고 내놓은 것이다.

약자에게 더 가혹한 착취의 연결고리, 이젠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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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1월 4일 오후 서울 태평로 언론노조 사무실에서 열린 <드라마 '화유기' 제작 현장 추락 사고 대책 수립 촉구 기자회견>에서 '혼술남녀' 팀의 고 이한빛 PD의 동생인 이한솔씨가 발언을 하고 있다. ⓒ 이정민

 
사람을 갈아 넣어서 돌아가는 업계라면, 사회적 약자일수록 그 피해가 더 극심할 것이다. 드라마 업계가 그렇다. 여성과 아동에게 드라마 현장은 가혹하다. 한빛센터를 통해 성폭력, 성희롱 제보가 꾸준하게 들어오는 중이다. 대부분 성폭력이 그러하듯, 드라마 현장의 성폭력은 상하 관계 때문에 일어나고 상하 관계 때문에 문제제기가 힘들어진다. 
 
드라마 현장 역시 폐쇄적인 구조와 성차별에 무감각한 집단 문화가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개선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도급 계약, 턴키 계약, 프리랜서 계약 등으로 이루어진 위계적이고 복잡한 드라마 생태계에서, '슈퍼 을'인 여성 노동자 한 명이 문제를 제기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중략) 실제로 저명한 PD 중 한 명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적이 있었는데, "저 분 원래 좋은 분인데, 주사가 조금 있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너무나 쉽게 상황이 정리됐다고 한다. 사람들은 피해자를 향해 "이런 거 못 견딜 거면 이 쪽에서 일하면 안 돼"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런 거'란 무엇일까. 겪지 말아야 할 일을 겪었는데 그걸 견뎌내야 하는 상황은 분명 문제다. 이렇게 여성이 취약한 고리라면, 아동 또한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기본적으로 15세 미만 아동•청소년의 노동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허가증을 받으면 근로기준법 적용 아래 아동•청소년의 노동을 허용할 수 있다. 
 
성인의 경우 사람들을 모아서 항의하거나 한빛센터에 제보라도 할 수 있지만, 아동과 청소년들은 성인들처럼 문제를 인식하고 저항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에는 15세 미만의 청소년이 일주일에 35시간을 초과해서 촬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 특히 오후 10시부터 오전 6시까지의 야간 노동이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현장의 누구도 이 법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법안을 제대로 알고 있는 관리자조차 거의 없다고 한다. 

아동•청소년을 드라마에 출연시켜야 하는 상황이 온다고 해도 현행법과 당사자의 인권을 고려해서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책에서도 소개하지만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과 봉준호 감독의 <옥자>는 아동•청소년의 노동조건을 보장하면서 촬영을 끝낸 사례다. <옥자>의 경우 미국의 아동노동법을 준수했지만, <우리들> 촬영 당시에도 아역배우를 섬세하게 대하면서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고자 했다. 

책에는 2018년에 방영된 드라마 중 공식적으로 노동시간 문제가 지적된 드라마 리스트가 나와 있다. 너무 많다.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나 같은 사람도 이름은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작품들도 많았다. 이 문제가 어느 한 현장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람이 없으면 제작하지 못하는 게 드라마인데, 그들에 대한 처우가 정상화되지 못하면 이제는 더 이상 자력으로는 지속가능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만드는 사람이 아프지 않은 드라마를 정말 보고 싶다. 평생 관련 없을 줄 알았던 드라마업계의 일이 내 삶이 되어버렸지만, 딱히 억울하거나 후회스럽지는 않다. 그저 이 일이 한빛 형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이다. 이 공간을 외면하고 산다면 어떻게 살더라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와 같은 마음이라 해도 괜찮다. 정말 카메라 뒤의 사람들이 행복하다면, 나 역시 함께 행복해질 것이라 확신한다.

가장 보통의 드라마 - 드라마 제작의 슬픈 보고서

이한솔 (지은이),
필로소픽,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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