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거 없는데 이상하게 떠나고 싶지 않은 도시

[발칸반도 기행 34]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성(Ljubljana grad) 기행

등록 2019.08.09 15:36수정 2019.08.09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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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블랴나(Ljubljana) 여행에서 절대 놓치면 안되는 것은 아무래도 류블랴나의 오랜 역사가 오롯이 담겨있는 류블랴나 성(Ljubljana grad)이다. 류블랴나 구시가에서 보면 류블랴나를 끼고 도는 류블랴나차 강을 지나 높은 언덕 위에 웅대하게 자리잡고 있는 성이 류블랴나 성이다. 중세 시대에 터키의 침략에 대비해서 효율적으로 지어진 이 류블랴나 성은 도시 형성의 내력이 그대로 담겨 있다.

언덕길을 걸어서 오르면 이 성을 만날 수 있지만 나는 아내의 체력을 고려해서 푸니쿨라(Funicular)를 타고 직진해서 올라가기로 했다. 류블랴나 대성당(Ljubljana Cathedral)을 지나 푸니쿨라 타는 곳을 찾아갔다.
 

캥거루 분수.귀여운 디자인의 캥거루 분수 앞에서 아이들이 떠날 줄을 모른다. ⓒ 노시경

 
푸니쿨라 매표소 앞에는 배 안에 새끼가 아닌 분수 물을 가득 채우고 있는 캥거루 분수가 있다. 이 귀여운 조형물은 류블랴나 디자인의 세련됨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듯이 친근하고 사랑스럽다. 류블랴나 아이들은 캥거루 분수 앞에서 장난을 치며 떠날 줄을 모른다. 아내도 이 귀여운 아이들과 캥거루 분수를 한참동안이나 서서 구경했다.
 

푸니쿨라.유리벽을 통해 류블랴나 시 구시가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 노시경

 
투명한 유리 속에 지어진 푸니쿨라 매표소 창구에서는 류블랴나 성의 역사박물관과 전망대 티켓도 있어서 한꺼번에 티켓을 구매했다. 경사진 길을 오르는 트램 같이 생긴 푸니쿨라는 생각보다 내부가 넉넉해서 많은 여행자들과 함께 탈 수 있었다. 사면이 유리로 되어 있는 푸니쿨라가 오르기 시작하자 방금 지나왔던 류블랴나의 구시가지가 점점 발 아래로 멀어져 갔다.

푸니쿨라에서 내려 성 안 지하공간으로 들어서자 양쪽으로 힘껏 펼쳐진 드래곤의 날개가 보인다. 드래곤 날개만 있고 몸통은 없으니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가 드래곤이 되어 사진을 찍는다. 류블랴나의 상징이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입구에서부터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와 아내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계단을 따라 성의 1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옆에는 류블랴나 성을 복원하는 과정이 담긴 전시물들이 보인다. 누가 보아도 과거의 역사와 똑같은 성을 복원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단순히 성의 외관 만을 복원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구조, 기둥의 높낮이까지 세밀하게 복원한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외부공간으로 이어지는 지하공간의 철제 기둥들도 과거부터 보존해 온 것이라니 참으로 치밀한 복원이다.

박물관 입구에서는 유물들을 설명해 주는 오디오 가이드를 빌릴 수 있다. 다행히 이 류블랴나 성에는 유럽여행 중에 흔치 않은, 한국어로 된 가이드가 있어서 주저하지 않고 빌려서 목에 걸었다. 풍부한 오디오 가이드의 설명대로 우리는 역사여행의 방향을 잡아나갔다. 가이드에 너무나 많은 내용이 담겨 있어서 우리는 그 내용을 들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9세기에 처음 세워졌다가 1511년의 지진으로 파괴된 후 17세기 초에 재건된 류블랴나 성벽이 언덕 위의 높은 평지를 둘러싸고 있었다. 류블랴나의 웅대한 성벽 안에는 생각보다 훨씬 넓은 류블랴나 성의 안마당이 펼쳐졌다. 성의 안마당에서는 방문객들이 석재 바닥에 자유롭게 엉덩이를 깔고 앉아 편안하게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여유로운 류블랴나 시민들의 모습은 류블랴나의 가장 인상적인 모습이다.

중세시대의 류블랴나 성은 터키의 침략을 막는 지역수비대가 주둔하는 요새로 사용되었다. 17~18세기에는 군사 병원, 무기 저장고 및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05년에 정부에서 류블랴나 성을 사들여 관광지로 개발한 뒤 현재는 관광객들과 류블랴나 시민들이 찾는 최고의 휴식처가 되어 있다.
 

류블랴나 성 안마당.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성 안마당은 시민들의 휴식처이다. ⓒ 노시경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받은 지도를 보니 현재 류블랴나 성은 슬로베니아 역사박물관, 전망대 외에도 일부는 웨딩홀,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지도 상에 설명된 성의 여러 역사적 명소만 25곳이나 되는 큰 성이다. 반갑게도 성 안 여기저기에 한글로 된 안내문도 있어서 성을 답사하는 데에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다.

나는 먼저 슬로베니아 역사가 집결되어 있는 박물관에 들어가 보았다. 성안 마당과 성벽까지는 무료로 입장할 수 있지만 박물관에 들어갈 때는 입장권의 바코드를 찍고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로마시대부터 이어져 온 이 도시의 생성내력이다.

류블랴나는 로마시대의 에모나(Emona)라는 도시로 시작되었다. 박물관 안에는 로마 시대 당시의 건물 기단과 모자이크 벽면, 토기 그릇 등이 남아 있다. 옛 모습이 담긴 그림들을 보니 류블랴나 구시가에는 로마 도시의 전형적인 구조인 격자 구조가 뚜렷이 보였다. 그리고 격자 구조 안에는 집이 약 네 채씩 들어있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신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류블랴나의 석기시대.영상으로 유물들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 노시경

 
최근에도 류블랴나는 도시의 현대적인 개발을 위해 신시가지 일대의 땅을 파는 공사를 했는데 고대 로마시대의 유물이 대거 발견되었다. 당연히 류블랴나 신시가지 일대의 개발은 중단되었고 유적 발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로마의 유물들이 계속 발견되면 류블랴나 역사박물관의 유물도 더욱 풍족해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박물관 전시실.류블랴나 성 박물관은 류블랴나의 디자인 저력을 맘껏 뽐낸다. ⓒ 노시경

 
근현대 전시관에는 과거 유고슬라비아 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를 이루었던 슬로베니아인들의 자부심이 담겨있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서유럽국가들과 국경이 맞닿은 슬로베니아는 동유럽 국가 중 가장 공업이 발달하였는데, 전시실 안에는 슬로베니아제 전화기, 오토바이, 트럭 등이 자랑스럽게 전시되어 있다. 동유럽에서 만든 공업제품들은 디자인이 대부분 투박한데, 이 슬로베니아제 제품들은 디자인과 색상이 세련된 것이 눈에 띈다.
 

류블랴나의 현대 전시실.구 유고슬라비아 국가 중 공업 수준이 가장 발달한 국가이다. ⓒ 노시경

 
류블랴나 성의 전망대로 올라 가려다 보니 중세시대에 감옥으로 이용되었던 곳이 있다. 당시 감옥 모습을 잘 재현해 둔 공간인데, 감옥 맞은 편에는 감옥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도 적혀 있다. 아름다운 류블랴나 성이 어느 사람들에게는 끝을 알 수 없는 공포와 불안감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시계탑이 있는 전망대 올라가는 길은 나선형 계단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생각보다 꽤 길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아내는 계단 난간이 온통 빨간색으로 칠해 놓은 것을 보고 계속 감탄을 하고 있었다. 대담한 빨간색으로 길고 긴 난간 전체를 칠해 놓았는데 빨간색이 아주 세련되고 밝은 진짜 빨간색이었기 때문이다. 잘 익은 빨간색이라고 할 수 있는 색상이 꼬리를 물고 시야 속에 이어지고 있었다.
 

전망대 계단.새빨간 색상의 구불구불한 계단 난간이 계속 이어진다. ⓒ 노시경

 
계단 바닥에도 류블랴나 성을 상징하는 문양이 있다. 성 위에 드래곤이 올라탄 듯한 계단의 문양도 너무 귀여워서 아내와 함께 한참을 웃었다. 계단은 생각보다 꽤 길어서 오랫동안 유럽여행을 함께 한 아내는 힘이 부쳤고 올라가면서 여러 번 계단에서 쉬었다.

드디어 류블랴나 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시계탑 전망대에 올랐다. 날씨가 좋으면 슬로베니아 국토의 2/3가 보인다는 곳이다. 성의 정상에 서니 또 다른 류블랴나의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무가 많은 시내는 온통 푸르러 보였다. 구시가지에는 주황색 지붕이 펼쳐져 있고 회색의 높은 건물이 보이는 곳이 신시가지여서 한눈에 바로 도시의 역사가 구분되었다.

류블랴나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시내는 더욱 평화로워 보였다. 작게 보이는 류블랴나차 강의 다리 위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모습도 정감이 간다. 강변의 노란색, 베이지색, 연두색 건물들은 마치 파스텔 색감을 다양하게 풀어놓은 것 같다. 레고 블록 같이 보이는 핑크빛 성 프란체스코 성당(Franciškanska cerkev)도 너무나 사랑스럽다.
 

류블랴나 전망. 류블랴나 전망에 취한 여인이 자리를 떠날 줄 모른다. ⓒ 노시경

 
약간 흐린 듯 하던 날씨의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망대 정상에 선 한 금발의 여성은 한 자리에서 서서 움직일 줄을 모른다. 화려하지 않으나 오묘하게 사랑스러운 류블랴나의 매력에 빠져버린 것이다.

드러내지 않고 별 게 없는 듯 하면서도 사람을 잡아당기는 류블랴나. 우리는 그 매력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한동안 만끽했다.
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에만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슬로베니아, 체코,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독일 여행기를 게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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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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