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봉기에 참가하고 살아남아

[운암 김성숙 평전 18회] 광주봉기는 중국공산당이 군벌에 항거하기 위해 광주의 혁명적 인민들을 지도하여 일으킨 무장봉기였다

등록 2019.08.17 16:25수정 2019.08.17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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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표의 김성숙 선생수형기록표의 김성숙 선생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중국대륙의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는 한국혁명가(독립운동가)들에게 생과 사의 갈림길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광주봉기'의 경우도 그러했다.

1927년 12월 11일의 광주봉기에는 한국인 다수가 전투원ㆍ선전원ㆍ구호원 등으로 활동하고, 김성숙도 적극 참가하였다. 김성숙은 한인 청년들을 인솔하여 포병련과 함께 한때 사하(沙河)를 점령하기도 했다.

12월 12일 광주에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되고, 김성숙은 장지락(『아리랑』의 주인공)과 숙반(肅反)위원회(반동숙청)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국민당군의 대대적인 공세로 소비에트 정부는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광주봉기 때 광주에 있었던 조선 동지는 광주봉기의 주력이 된 교도단에 주로 집중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제2영 제5연대는 기본적으로 조선동지들로 편성되어 김규광(김성숙)이 연대의 당 책임을 맡고 있었다.

교도단 이외에는 포병 연대와 황포군관학교 특무영에도 조선인 동지가 일부 있었다. 광주봉기를 전후해 제3인터네셔널(코민테른) 역시 군사훈련을 받은 한 무리의 조선청년을 조직해서 광주에 파견해 전투에 참가시켰다.

봉기 중에 많은 사람이 군사참모, 지휘원, 포수, 기관수 등의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예를 들면 박건웅 같은 이는 독자의 임무를 갖는 분견대장을 담당했다. 당시 광주의 중산대학에 있었던 조선인 학생도 역시 적극적으로 선전, 구호 등의 활동에 참가했다. 당시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 동지는 적어도 250명 이상으로 보인다. (주석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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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두군혜 가족사진. 김성숙의 중국가족과 동지들. 가운데 김성숙과 두군혜 부부가 서있고, 오른쪽이 박건웅이다. 운암 두군혜 가족사진. 김성숙의 중국가족과 동지들. 가운데 김성숙과 두군혜 부부가 서있고, 오른쪽이 박건웅이다.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광주봉기는 중국공산당이 군벌에 항거하기 위해 광주의 혁명적 인민들을 지도하여 일으킨 무장봉기였다. 여기에 김성숙을 비롯하여 다수의 한인들과 중산대학의 한인 학생들이 참가한 것이다. 희생자도 적지 않았다.

대륙을 지배한 중국 정부는 1955년 광주코뮨 희생자를 기념하기 위해 광주시내 중심부에 광주봉기열사릉을 만들고 그 가운데 광주코뮨열사지묘를 조성하였다. 하지만 희생자의 유해는 한 구도 묻히지 않았다. 국민당 측에서 시체를 모두 빼돌렸기 때문이다. 열사릉에는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誼亭)'이 세워지고, 비의 안면에는 광주봉기에 참가한 한인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1927년 12월 11일, 광주의 노동자 계급과 혁명 병사는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장렬한 무장봉기를 결행했다.

봉기에 참가한 혁명 병사 가운데는 조선병사 150여 명이 있었다. 그들은 중국의 전우와 함께 정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다. 마지막에는 사하의 전투에서 진지를 굳게 지키며 대부분이 영웅적으로 희생되어 무산 계급의 위대한 국제주의 정신과 두려움 없는 혁명 영웅의 기개를 보여 주었다.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조선동지는 영원토록 불멸하리라!
중조 양국 인민의 전투적 우의는 영원하리라! (주석 9)


한인의 희생이 많았던 것은 전투과정에서 다수가 희생되고, 이후 광주를 장악한 국민당 세력이 시가지를 샅샅이 뒤져 한인들을 색출하여 사살한 결과이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김성숙은 두군혜와 함께 중산대학 기숙사를 찾아 생존한 한인학생들에게 중국인 복장과 여비를 마련해주고 이들을 탈출시켰다.

그리고 본인은 두군혜의 아지트에 숨어 수색과 국민당정부의 백색테러를 피할 수 있었다. 그가 두군혜를 만나지 않았으면 '광주봉기열사릉'에 이름이 올랐을지 모른다. 두군혜는 동지ㆍ연인ㆍ부인ㆍ생명의 은인이었다.

김성숙의 1920년대 중국에서 활동을 깊히 연구한 손영홍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김성숙의 혁명운동은 민족혁명과 사회주의운동을 동시에 수행했지만 『혁명』의 주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민족혁명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혁명운동의 방략은 『혁명운동』에서 그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각각 공산당과 민족적 대혁명당의 통일 지도 아래 진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공산당의 비밀조직 'KK'를 조직하고 의열단을 대중적 혁명조직으로의 개편을 강력히 주장하고 실현시켰다.

하지만, 김성숙의 혁명운동은 중국 국민혁명의 실패와 함께 좌절되고 말았다. 그는 국공합작이 무너지고 중국 국민혁명이 실패하게 되자 중국공산당 진영에 가담하였다.

그는 중공의 지시에 따라 무한으로 가 주로 한인들로 구성된 교도단 제2영 제5련의 중국공산당조직 책임자를 맡아 광주봉기에 참가하여 중요한 역할을 해냈고, 광동 소비에트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숙반위원회 위원의 위치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광주봉기가 실패로 끝나자 그는 광주를 떠나고 1930년대 중반까지 혁명운동에 나서지 않은 채 문필 생활을 보냈다. (주석 10)


주석
8> 『김산과 님 웨일즈 아리랑 그 후』, 이희성ㆍ미즈노 나오끼 엮음, 윤해동 외 옮김, 99쪽, 동녘, 1993.
9> 앞의 책, 103쪽.
10> 손염홍, 앞의 책, 61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운암 김성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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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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