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치과의사 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순간들

좋은 직업이란 결국 지금 애정을 쏟으며 해내고 있는 일

등록 2019.08.12 15:25수정 2019.08.12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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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 자리에 앉는 표성이라고 어디 있는지 아니?"

작은 키의 한 여자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나는 전주에 있는 작은 재수학원에 다니며 잠은 독서실에서, 식사는 독서실 근처의 저렴한 매식 집에 대놓고 먹고 있었다. 이 매식 집이 독서실과 가깝고 저렴한 것까진 맘에 드는데, 식사할 때 어쩌다 수챗구멍으로 들락거리는 쥐와 눈이 마주치는 건 소름이 돋았다.

"표성이 누나신가 봐요. 많이 닮았어요."
"네가 표성이 친구구나. 네 얘기 많이 하던데."
"지금 학원에 가 있을 시간인데. 저도 지금 학원에 막 가려던 참이니까 같이 가실래요?


표성이는 독서실에서 내 맞은편에 앉는 친구였다. 전주 소재에 한 재수학원 같은 반에서 만났고 독서실과 매식하는 식당도 같아서 자연스레 친해졌다.

"고맙다. 공부하느라 바쁠 텐데… 그런데, 독서실에서 자는 거 불편하지 않아?"
"저는 잘 모르겠어요. 공부하다가 졸리면 이부자리 깔고 그냥 자는 거라."
"근데 너는 무슨 과에 들어가고 싶어?"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성적이 잘 나오면 약학과에 들어가고 싶긴 해요."
"약학과? 남자가 하기에는 조금 가볍지 않나. 쉬고 있는데, 약국에 온 손님이 '박카스 한 병 주세요' 이렇게 부르면, 쪼르르 달려 나와서 500원 받고 박카스 팔아야 하잖아."
"한 번도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저는 약사가 크게 힘 안 들이고 돈을 벌 수 있을 거 같아서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은 수업에 들어오실 때마다 공부해서 의대, 치대, 약대, 한의대에 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 선생님 말씀 때문인지 동기 중에 실제로 의·치‧약‧한의대에 간 친구들이 많았다.

"세상에 힘 안 드는 직업이 어디 있어."
"그래도 저는 농사일이 제일 힘들었어요. '진짜 진짜 나 농사일하는 거 싫어서라도 공부할 거야'라고 아버지께 소리 지른 적도 있어요."
"너 그렇게 말했다가 아버지한테 혼 안 났어?"
"혼 안 내시던데요."


아버지는 농사꾼이셨다. 부모님이 농사지으시는 걸 부끄러워한 적은 없었다. 49세에 늦둥이로 다섯째 막내아들인 나를 낳아 키우셨으니… 지금 생각해보니 나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을 게다. 이상은 지금으로부터 29년 전 나의 재수 생활 얘기였다.

부모가 아이의 시야를 가려선 안 된다
 

세상엔 셀 수 없이 많은 직업이 있다. 어렸을 땐 병아리 감별사라는 직업이 있다는 게 신기했는데, 커서 보니 내가 상상해보지 못한 직업들에 종사하며 사람들은 소득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평생 한 개 직업을 꾸준히 해내기도 어려운데 2개 이상의 직업을 가진 N잡러가 있다는 말에 놀란다. 그 두 개 이상의 직업을 갖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말이다. 지난해 고3이던 딸에게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어봤다.

"아무 생각이 없는데…"

영혼 없는 딸의 대답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요즘 인기 있는 직업인 공무원이나 초등교사 아니면 그 어렵다는 의사가 된다든가 속 시원히 자신의 주관을 얘기해주기를 바랐는데 말이다.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었던 바람과는 달리 나는 의문의 1패를 당했다. 그래서 직업에 대한 기사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쓰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었다. 아버지는 은행에 막 입사한 작은 형이 직장에 다니기 힘들다 하면 "그만한 직장도 없으니 이가 물어도 꼼짝 말고 다녀라" 하고 웃곤 하셨다.

그리고 내가 재수 생활을 마치고 원서를 쓰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뵈었을 때는 공대에 들어가서 기술을 배우는 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평생직장이란 개념이 통하던 아버지의 세대와 내가 속한 세대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직업을 바라보는 프레임이 달라졌다.

우리 옆 건물 약사님은 자신의 점수에 맞춰서 가다 보니 약대가 맞아서 별생각 없이 지원했다고 말했다. 치과의사 친구에게 어떻게 치대에 갈 생각을 했느냐고 물어봤더니 "생각해보니 그래도 정신 차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치과의사가 되면 부모님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거 같아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떤 부모님들은 무조건 "너는 의대에 가야 한다"고 얘기하시는 분들도 있다고 들었다. 어찌 보면 부모도 자녀도 고민하지 않아서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달리는 말에 눈가리개를 씌운 말처럼 시야를 넓혀 주변을 보지 못하고 길들어 앞만 보고 달리면 되니까.

하지만 여기엔 함정도 숨어 있다. 자신이 선택한 직업에서 회의가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 위기의 순간을 잘 견뎌낼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이 형성돼 있을지 의문이다. 말에게 눈가리개를 하는 이유는 눈이 옆에 있어서 동물 중에서도 상당히 넓은 시야를 가졌음에도 마차를 끌거나 경주를 위해 주변을 못 보게 하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앞으로만 가게 하기 위해서다.

부모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장단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것이 부모와 같은 길을 걷고 싶다는 자녀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도, 때론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아이가 나와 같은 직업을 선택한다면 이 힘든 길을 어떻게 견디어 낼까? 나도 매일매일 반복되는 이 삶이 버겁고 체력적으로도 힘에 부치는데…' 먼저 걱정부터 앞섰다.

그러다 아이도 나처럼 부딪힐 수밖에 없겠구나. 내가 힘들다고 아이도 나처럼 힘들란 법도 없겠고 그건 그 아이의 선택 몫으로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나보다 잘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미리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직업에 대한 부모의 부정적인 시각과 염려는 자녀가 가질 수 있는 한 가지 직업의 길을 바라보는 시야를 흐리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부모의 가업을 물려받는 것도 좋지만 직업에 대한 시야를 부모가 가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은 부모보다 직업을 선택하는 데 있어 더 넓은 시야를 갖기를 바란다. 그래야 삶을 바라보는 시야도 커지고 인생도 더 잘 살아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가 되어야 한다고 배웠다. 딸 아이가 아무 생각이 없다니 나는 1패를 당했다고 징징거릴 필요가 없다. '최소한 직업에 대한 편견은 없겠다'라며 무한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

우연이 모여 필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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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위아래 치아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셔서 생전에 틀니를 쓰시며 많이 고생하셨다. 틀니가 잇몸에 닿아 불편하다고 하실 때마다 나는 틀니를 조정해드렸다. 그 오래된 틀니는 입관할 때 함께 넣어드렸다. ⓒ unsplash

 
아버지는 위아래 치아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셔서 생전에 틀니를 쓰시며 많이 고생하셨다. 틀니가 잇몸에 닿아 불편하다고 하실 때마다 나는 틀니를 조정해드렸다. 그 오래된 틀니는 입관할 때 함께 넣어드렸다.

부분 틀니를 쓰시던 어머니는 틀니를 붙잡아 주던 치아들이 흔들리면서 부분 틀니를 더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임플란트를 해드렸다. 부분 틀니 없이도 식사를 잘하게 해드렸다. 아직도 어머니는 내 단골 환자이시다.

부정교합이 있던 큰 딸아이는 교정치료를 끝마친 후에 예전 흑역사 사진을 바라보며 자신이 정말 용됐다고 말했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삶에 힘들고 우울한 마음이 들다가도 그래도 치과의사가 돼서 부모님을 치료해드렸고 두 아이의 교정치료도 해주었으니 '그래, 치과의사로서 내 할 일은 다 했다. 이걸로 족하다'라고 생각했다.

좋은 직업이란 결국 지금 내가 애정을 쏟으며 해내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에서 작은 보람이라도 찾아낸다면 더할 나위 없다.

한 사람이 직업을 갖기까지 우연한 순간들이 모여서 필연적인 직업을 갖게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필연적이라 생각했던 일들도 어느 순간에 다시 우연한 얼굴을 하고 우리를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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