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무릅쓰고 올린 상소, 어떤 내용 담고 있기에

[서평] ‘백곡 처능, 조선 불교 철폐에 맞서다’

등록 2019.08.14 14:36수정 2019.08.14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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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뿐 아니라 어떤 조직이나 단체도 생존을 염려할 만큼 커다란 어려움에 처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커다란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지레 겁먹어 스스로 포기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처합니다. 반면 어떤 부류의 사람은 죽음을 각오하면서 까지 적극적으로 나서 행동합니다.

왕조시대도 그랬고, 일제 강점기에도 그랬고, 군부독재 시절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그랬습니다. 침묵하거나 외면하며 산 어떤 사람들의 삶이 소극적이라면, 난을 일으키고, 독립운동을 하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의 삶은 적극적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소극과 적극은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줄곧 있었고, 어쩜 이러한 현상은 인간들만이 갖고 있는 유별난 특징이 아니라 대개의 생명체들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본성일지도 모릅니다.

적극적인 사람들 중에는 열정은 넘쳐나지만 그 자리에서 필요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아쉬움이 없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열정뿐 아니라 문제해결을 위한 능력까지 족히 갖추고 있어 역사적으로 커다란 족적을 남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나라 불교역사에도 있었습니다.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 한때는 왕조를 농락할 만큼 기세등등했던 불교였지만 조선이 개국되며 '숭유억불'이 절정을 이룰 때를 불교 입장에서 보면 존폐의 기로일 수밖에 없는 위기였음이 틀림없습니다.
 
현종이 이에 도성 내의 두 비구니 사원의 혁파를 명하였다. 이와 함께 40세 이하의 비구니는 모두 환속시켜 시집가게 하고, 나이 든 비구니들은 도성 밖의 사찰로 옮기도록 했다. 또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자수원에 모셔진 선왕의 위패를 1657년 봉은사의 예에 따라서 정결한 곳에 묻게 하였다. -<백곡 처능, 조선 불교 철폐에 맞서다>, 165쪽-
 
승과를 폐지하고, 사찰을 폐쇄하고, 승려가 된 이들을 환속시키는 정책은 기존의 억불을 넘어 존폐 그 자체, 아예 불교의 씨조차 말라 버리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백곡 처능, 조선 불교 철폐에 맞서다 

<백곡 처능, 조선 불교 철폐에 맞서다>(지은이 벽산 원행·자현 / 펴낸곳 ㈜조계종출판사 / 2019년 8월 10일 / 값 22,000원) ⓒ ㈜조계종출판사

 
<백곡 처능, 조선 불교 철폐에 맞서다>(지은이 벽산 원행·자현, 펴낸곳 ㈜조계종출판사)은 척불의 절정기였던 현종 대, 우리나라 불교가 폐불의 위기에 처했을 때 죽음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8150자나 되는 장문의 상소, <간폐석교소>를 올려 질주하고 있던 척불 기세를 방향 틀거나 감소시킨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백곡 처능의 삶과 수행이력, 상소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조선 광해 9년에 태어난 백곡 처능白谷處能(1617~1680)은 15살에 속리산으로 출가하지만, 17살 되던 해에 서울로 올라가 선조의 부마이자 병자호란 때 척화오신(斥和五臣) 중 한 사람이었던 신익성의 집에 머물며 수학해 여느 출가자들과는 조금 남다른 이력을 갖고 있는 승려입니다.

어묵동정행주좌와로 일심 구도하고, 때로는 운수납자가 돼 선승들이 남긴 흔적을 더듬으며 출가수행자로 행장을 더해가던 처능은 45살이 되던 1661년, 척불의 기세가 절정을 이루던 현종 2년에 불교 탄압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를 올립니다.
 
백곡은 상소문의 마지막에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감당할 길이 없으며,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뢴다"고 적고 있다. 이는 사실인 동시에 무척 처연하고 숙연한 기상이 서린 말이 아닐 수 없다. -<백곡 처능, 조선 불교 철폐에 맞서다>, 173쪽-
 
임금의 권력이 성성하던 왕조, 왕명으로 이루어지는 척불 기세가 절정을 이루던 시대에 불교 탄압이 부당함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린다는 것은 자칫 임금의 뜻을 거스르는 반역이 돼 목숨을 잃게 하는 두려운 일이었지만 처능은 목숨 구걸하지 않고 장문의 상소를 올렸습니다.

죽음까지 무릅쓰고 상소를 올린 처능이 별다른 처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백곡이 올린 상소가, 부당함을 주장하되 어긋나지 않는 논리, 잘못 됐음을 간하되 모나지 않는 설득력, 간곡하면서 유수하지만 전하고자 하는 뜻만은 정곡을 찌르는 명문이었기에 가능했을 거라 가늠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시를 잘 짓는 승려는 고금에 많지만, 문장과 도덕을 함께 갖추고서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한 분은 오직 백곡 대사뿐이다. 어려서는 동희(신익성) 선생에게 수학하고, 자라서는 벽암 각성의 법을 얻었다. 동희는 유학의 으뜸이가는 어른이요, 벽암은 나라의 큰 스승이다. -<백곡 처능, 조선 불교 철폐에 맞서다>, 96쪽-
 
적극적이고 긍정적이었던 백곡 스님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스스로에게 한두 번 쯤은 던져봤을 자문,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데 도움을 주는 광의적 힌트가 될 거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풀어 설명한 글과 함께 더듬어가며 읽어보는 '간폐석교소' 원문은 시대적 모순과 논리적 주장을 두루 갖춘 명문 상소가 어떤 것인가를 경험하게 하는 또 다른 형태의 논술 공부가 될 거라 기대됩니다.

백곡 처능, 조선 불교 철폐에 맞서다

벽산 원행, 자현 (지은이),
조계종출판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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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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