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전 '한일관계 반전', DJ는 이렇게 만들었다

[DJ 서거 10주기]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아베 신조는 변할 수 있을까

등록 2019.08.17 11:28수정 2019.08.17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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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정상회담1998년 10월 8일, 국빈 방일 2일째를 맞은 김대중 대통령은 8일 숙소인 영빈관에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기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21년 전인 1998년에도 한일관계가 위태했다. 출구가 안 보이는 터널을 달리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출구가 되어 나타난 게 그해 10월 8일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다. 한일관계를 복원하고 양국관계를 새 시대로 안내한 이 선언의 정식 명칭은 '21세기 한·일 새로운 파트너십 공동선언'이다. 오는 18일 서거 10주년을 맞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외교적 업적에 포함되는 일이다.

지난 7월부터 아베 신조 내각이 무역관계를 일방적으로 흔들어대듯이, 1998년에는 연초부터 일본이 어업 관계를 일방적으로 파탄내는 일이 있었다. 정월 23일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이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린 것이다. 이때 외무대신이었다가 그해 7월 30일 총리가 돼 10월 8일 공동선언의 주역이 된 인물이 오부치 게이조다.

1965년 체결된 한일어업협정은 양국이 배타적으로 관할하는 어업전관(專管)수역을 12해리(약 22km)로 설정했다. 그러나 일본은 1977년에 배타적 관할구역을 200해리(약 370km)로 설정하고 그 안에 들어오는 한국 어선들을 내쫓기 시작했다.

그 뒤 1994년, 영해 바깥 기선으로부터 200해리에 이르는 배타적 경제수역(EEZ)의 설정을 인정해주는 유엔 해양법협약이 발효됐다. 그러자 일본은 해양법협약에 따른 새로운 어업협정의 체결을 목표로 한국을 압박하다가 1998년 1월에 기존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분위기 바꾼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일본의 한일어업협정 파기를 보도하는 1998년 1월 23일자 <경향신문>. ⓒ 경향신문


일본이 하필이면 이 시점에 공세적으로 나온 것은, 한국이 외환위기에 빠져 19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1997년 12월 대통령선거로 정권이 교체되는 등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어수선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에 더해, 김영삼 정권 때 한일관계가 긴박해진 데 대한 보복의 차원도 있었다. 일본이 독도와 역사 문제에 관한 망언들로 한일관계를 악화시키자, 김영삼 대통령은 1995년 11월 14일 장쩌민(강택민) 국가주석과의 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발언했다. 이를 계기로 공방전이 가열되고 한일관계가 한층 긴박해지는 속에서 일본이 어업협정 파기라는 초강수를 던졌던 것이다.

김영삼의 발언이 긴장을 가중시킨 측면도 있지만, 지금처럼 그때 역시 한일관계를 추동하는 근원적인 힘은 국민들이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한국 국가권력이 약해지고 1990년 전후의 세계적 탈냉전(긴장 완화)으로 한국에 대한 미국·일본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1990년대 초반부터 한일관계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발언권이 한층 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인들의 투쟁이 이때부터 본격화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영삼 정권 때 한일관계가 긴박해진 것은 한국민들의 발언권이 높아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김영삼은 그런 분위기를 반영해 강경 발언을 내놓았을 뿐이다.

이 같이 한일관계가 파탄 직전까지 임박했던 1998년 초반에 등장한 것이 김대중 정권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에도 사실상 대통령이나 마찬가지였다. IMF 외환위기로 김영삼 대통령의 권위가 실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대중이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였던 1998년 1월에 일본이 어업협정을 파기했기 때문에, 한일관계에 대한 김대중의 중압감은 이만저만 높은 게 아니었다.

그는 한일관계 복원에 강한 의욕을 가졌다. 취임 직후부터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실무적 검토에 돌입했을 정도다. 그런 노력의 결실이 약 7개월 만의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다. 이 선언의 의의와 관련해 <김대중 자서전> 제2권에 이런 말이 있다.
 
"흔히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1965년 체제'라고 한다면 나와 오부치 총리가 합의한 '21세기 한·일 새로운 파트너십 공동선언' 이후의 한일관계는 '1998년 체제'라고 해야 마땅하다는 이들이 있다."
 
'1998년 체제'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1998년의 이 선언은 획기적 내용을 담고 있다. 과거사·한반도·정치·경제·군사·문화·국제문제 등에 걸쳐 한일관계 전반을 미래지향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의가 높았지만, 과거사 문제에 관한 일본의 태도를 전향적으로 바꾸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컸다.

공동선언 제2조는 "양국 정상은 한·일 양국이 21세기의 확고한 선린 우호협력관계를 구축해 나가기 위해선 양국이 과거를 직시하고 상호 이해와 신뢰에 기초한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고 선언했다. 양국이 과거를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 다음, 이렇게 선언했다.
 
"오부치 총리대신은 금세기의 한·일 양국관계를 돌이켜보고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줬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오부치 총리대신의 역사인식 표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평가하는 동시에, 양국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선린우호협력에 입각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로 노력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는 뜻을 표명했다."

- '21세기 한·일 새로운 파트너십 공동선언' 중
 
일본 정부가 한국 국민들을 상대로 사과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전까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과 한국민을 상대로 이렇게 사과한 적은 이전에 없었던 것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문인 1993년 고노담화에도 '한국'은 언급되지 않았다. "정부는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그 출신지가 어디인지를 불문하고 ······ 사과와 반성의 뜻을 밝힌다"고 했을 뿐이다. '국적을 불문하고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뜻을 표한다'고 밝히는 데 그쳤던 것이다.

총리 명의로 발표된 1995년 무라야마 담화도 마찬가지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통해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의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라고 했을 뿐이다. 한국 국민에 대한 직접적 사과는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은 '한국한테 사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무슨 사과를 계속 하라는 것이냐?'며 울분을 토한다. 하지만 1998년 10월 8일 이전에 일본이 정확히 한국을 상대로 사과한 적은 없다. '국적을 불문하고 사과한다'라거나 '아시아 여러 나라에 사과한다'고 했을 뿐이다. 그런 일본을 상대로 '한국민들에게 사과한다'는 표현을 받아냈다는 점에서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획기적이었다.

획기적 측면이 더 있다. 일왕(천황)이 한국 대통령과의 연회 중에 구두로 사과하는 게 아니라, 일본 정부수반이 문서 형태로 사과했다는 점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위 자서전에서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분명히 사죄하고 이를 문서로 남긴 것"을 공동선언의 성과로 꼽았다.

김대중에게 일본 정부가 호응 보낸 이유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 총리. 일본 총리대신 홈페이지의 오부치 게이조 코너에서 찍은 사진. ⓒ 일본 총리대신 홈페이지


이 공동선언을 도출하기 위해 양국 정부 실무진이 다 같이 노력했지만, 어느 한 인물의 공헌도를 특별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실무자가 아니면서도 실무자처럼 공동선언 도출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 있다.

외교통상부 동북아 1과 서기관으로 공동선언 기획 및 추진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어 통역으로도 일한 조세영 동서대 특임교수가 쓴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의 탄생 과정과 그 의의'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대통령이 처음부터 외교정책의 상세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실무진은 그 기조에 따라 실천 방안을 잘 준비하기만 하면 되었다. 대개는 참모와 실무 조직이 성안한 내용을 대통령이 받아서 자신의 정책으로 삼는 것이 보통인데, 이 경우에는 순서가 거꾸로 바뀐 셈이었다. 따라서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크게 보아 김 대통령 자신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 재단법인 동아시아연구원이 2018년 1월 발행한 'EAI 이슈 브리핑'
 
이처럼 김대중의 역할이 매우 컸다. 대통령인 그가 한일관계 정상화에 대한 열정과 비전을 갖고 임한 것이 양국 정부를 움직이는 핵심 동력 중 하나가 됐다.

그런 김대중을 움직인 현실적 요인들도 함께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한국 정부한테는 어업 문제 말고도 한일관계를 신속히 복원시켜야 할 이유들이 있었다.

우선, 외환위기 때문에 일본 차관을 낮은 이자로 도입할 필요가 있었다. 또 1998년 8월 대포동 미사일 발사 같은 북한의 군사 활동에 대응할 필요성도 있었다. 9·19 남북군사합의 같은 게 없었던 당시, 김대중 정권은 한·일 협력으로 북한 문제에 대응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또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서도 한일관계 복원은 필수적이었다.

그런 김대중에게 일본 정부가 호응을 보낸 데도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김대중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해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김대중의 역량을 높이 평가했음은 물론이고, 그와 일본의 인연에 대해서도 기대를 걸었다.

1965년 한·일 국교 체결 당시, 국민 대부분은 반대했지만 재선 의원인 김대중은 찬성했다. 이 점은 <김대중 자서전> 제2권에도 언급돼 있다. 또 1973년 도쿄에서 발생한 중앙정보부에 의한 김대중 납치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김대중에 대한 동정론이 퍼졌다. 또 전두환 정권 시절 김대중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는 시바 료타로 작가 같은 일본인들이 구명운동을 펼쳤다.

이런 인연 때문에 김대중 정권 출범 당시 일본 정부는 상당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의 취임 1개월 전에 일본이 어업협정을 파기한 또 다른 이유는 '김대중이 곧 복원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계산과 관련이 있다.

일본이 공동선언에 찬성한 데는 현실적 이유들도 있었다. 일본 역시 어업문제를 해결하고 한·일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한편, 북한 미사일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1992년부터 추진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문제를 마무리할 필요도 있었다. 한국이 역사문제를 매개로 일본의 도덕적 결함을 부각시키면 상임이사국 진출이 요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관한 한국의 협력을 얻어낼 의도에서도 김대중의 사과 요구를 흔쾌히 수용했던 것이다.

일본이 문서를 통한 사과를 해주는 조건으로 상임이사국 진출에 관한 지지를 얻으려 했다는 점은 공동선언 제6조의 "김대중 대통령은 국제연합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대한 일본의 기여와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금후 일본의 그와 같은 기여와 역할이 증대되는 데 대한 기대를 표명한다"는 문구에서도 읽을 수 있다.

조세영 당시 서기관은 위의 글에서, 일본 정부는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한 한국의 지지를 공동선언에 명기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한국 정부가 내부 반발을 의식해 우회적 방법으로 지지를 표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은 양국 정부의 현실적 필요에 의해 도출됐다. 그런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일본이 이전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과거사를 사과했다는 점에서 공동선언의 의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일본이 역사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 의지를 보여준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오부치 게이조가 외무대신 시절인 1998년 3월 김대중 대통령을 예방한 일을 소개하는 일본 총리대신 홈페이지. ⓒ 일본 총리대신 홈페이지


그런데 공동선언의 한쪽 주역인 오부치 게이조는 재임 중인 2000년 4월(당시 63세)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4월 5일 모리 요시로 내각이 새롭게 등장했다. 오부치는 5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오부치 총리의 뇌경색 때문은 아니지만, 얼마 안 있어 한일관계는 다시 악화됐다. 우익단체인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활동 때문에 2001학년도 중학교 교과서에서 위안부 내용이 삭제되거나 축소되고, 2001년 취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군국주의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이웃나라들을 자극하고 나섰다.

이런 속에서 김대중·오부치 선언까지 덩달아 경색 국면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선언이 일본 정부의 행동을 구속하기 힘들게 된 것이다.

이미 유명무실해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자체를 원래대로 복원하는 일은 의미가 별로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의 정신을 되살려 한일관계를 복원하는 일은 필요할 것이다.

그러려면 한국을 상대로 과거사를 사과하고, 돌이킬 수 없는 문서 형태로 남길 정도로 전향적인 자세를 가졌던 1998년 10월 8일의 마음가짐으로 일본이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서거 10주기를 맞는 고 김대중 대통령도, 아베 신조 총리가 그날의 오부치 게이조처럼 한일관계를 전향적으로 인식하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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