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판사들의 논리가 뒤엉켜버렸다

[사법농단-양승태 23~24차 공판] 결백 주장하다 검찰 닮은 논리 펼쳐... 재판부 의문 드러내

등록 2019.08.16 21:20수정 2019.08.16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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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석방 하루만에 재판 출석보석으로 풀려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7월 2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사법농단’ 관련 재판을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 이희훈



'법리상 죄가 아니다'란 이유로 결백을 주장해온 사법농단 피고인들의 논리가 뒤엉켜버렸다.

14일과 16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5부(부장판사 박남천)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의 공판에서 박 전 대법관 변호인의 의견서 하나를 언급하며 "주장하고 있는 판례 범위가 저희 사건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남재준 전 국정원장의 직권남용죄 혐의를 무죄로 판단한 사건 이야기였다.

지난 3월 대법원 2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남 전 원장이 국정원 대선개입사건 수사를 방해할 목적으로 감찰실 직원들에게 관련 문건 비공개와 은닉을 지시한 것은 직권남용죄가 아니라고 했다. 직원들은 문서를 감추거나 공개하지 않을 권한이 없고, 상부 지시를 단순히 따르는 직무집행 보조행위를 했을 뿐이라는 이유였다.

박병대 전 대법관 쪽은 이 판례를 근거로 자신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거쳐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에게 보고서 작성을 지시한 것 또한 단순업무를 보좌하도록 한 것이라며 직권남용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박 전 대법관 변호인은 같은 의견서에서 법원행정처에서 양승태 대법원에 비판적인 판사들의 인터넷 커뮤니티 대응방안을 검토한 것은 정당한 업무라고 했다. 2015년 2월 14일 시진국 당시 기획심의관은 <'이판사판야단법석' 다음 카페 현황 보고>를 작성했다. 박 전 대법관 변호인은 이 보고서를 두고 "법관 및 사법 신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면 대응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하는 게 법원행정처가 당연히 해야 할 조치"라고 주장했다.

정당한 업무냐, 단순 업무냐

직권남용은 '공무원(A)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B)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하는 범죄다. 예를 들어 상급자 A가 부하직원 B에게 '이건 네 일이야'라면서 평소 B가 고유한 권한과 역할로 처리하던 업무 형태로 부당한 지시를 한다면 직권남용죄가 성립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1심과 항소심에서 문화체육관광부에 블랙리스트(문화계 인사 불이익)를 지시한 것을 직권남용죄 유죄로 판단한 이유다.

반대로 직권남용죄가 성립하지 않으려면 ① B에게 권한 등이 없는 단순업무지시였거나 ② 정당한 업무지시여야 한다. 사법농단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판사들은 그동안 ①번 주장을 해왔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 역시 심의관들이 보고서를 작성한 것은 단순보좌업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가 언급한 박 전 대법관 변호인 의견서 내용은 ②번 주장, 정당한 업무=심의관들의 고유업무라는 쪽이다. 

이 논리는 '피고인들이 심의관들에게 마치 그들의 고유 업무처럼 부당한 일을 시켰다'는 검찰 주장과 이어진다. 하나의 의견서에서 논리 충돌이 일어난 상황이었다. 14일 박 부장판사는 "그대로 법리가 적용되는 것인지, 이 주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인지... 박병대 피고인 변호인 주장이지만 다른 피고인 전부와 관련 있다"며 논리가 어긋난 부분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16일 재판부는 이 문제도 앞으로 따져보겠다고 덧붙였다.

'엘리트 판사'들의 엉킨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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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에 있는 서울중앙지방법원의 모습. ⓒ 이희훈

  
비슷한 모순은 법정에 나온 판사들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14일 증인으로 나온 조인영 부장판사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 시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소송 관련 보고서를 쓰며 '매춘'이라는 단어를 썼다. "일본군의 위안부 동원 행위가 국가의 주권적 행위인지 상사적(商事) 행위인지 아직 명백하지 않은 상태"라는 대목에서다. 조 부장판사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시한 표현이 아니고, 일본이 그렇게 주장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키는 대로 썼다'던 증언 기조와 다른 부분이다.

16일 출석한 박상언 부장판사도 법원행정처 때 작성한 보고서 대부분은 임종헌 전 차장이 불러준 대로 썼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그는 2015년 6월 쓴 <거부권 행사 정국의 입법 환경 전망 및 대응방안 검토 문건>에서 상고법원에 반대하거나 유보하는 국회 법제사법위원들의 설득전략을 마련했다. 작성 배경엔 임 전 처장 지시가 있었지만, 세부 내용은 박 부장판사가 기존 자료를 토대로 정리한 보고서였다.

박 부장판사는 "(국회의원 설득전략이) 언젠가 실행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작성한 것은 맞다"고 말했다. 실행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관련 문건이나 사건 정보를 찾아본 그의 행동을 단순한 업무라고 볼 수 있을까. 타자수와 판사 사이에서 사법농단 연루 법관들도, 전직 고위 법관들도 길을 잃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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