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혁명'의 나라, 역사관도 바뀌었다

[서울교육감 기고] 일본 무역보복에 대처하는 성숙한 한국 사회

등록 2019.08.17 15:51수정 2019.08.19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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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한 아배 정권을 규탄하는 4차 촛불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 이희훈

 
지금 한일 간에는 유례없이 무역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현상적으로는 이것은 화이트리스트 배제와 같은 경제갈등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나는 이것을 역사갈등 혹은 역사정의 갈등으로 규정하고 싶다. 특별히 광복절과 한일갈등이 오버랩 되면서 해방 이후의 역사와 그를 둘러싼 역사정의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정의'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역사정의'란 역사적 사건에 대해 보편적 인권의 관점이나 정의의 관점에서 그 의미와 위상을 올바로 세우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최근의 한일 무역갈등은 촛불시민혁명에 의해서 역사정의의 지평이 확장된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정의의 주제는 나라마다 시기에 따라 다양하다. 한일 간에는 전쟁책임,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 그 지배의 기간에 일어난 다양한 범죄적 행위에 대한 참회와 사과, 배상·보상의 문제가 존재한다. 특히 후자와 관련하여 이른바 위안부 문제 내지는 전쟁 성폭력 문제가 있고 나아가 강제동원 배상 문제 등 여러 가지 묻힌 주제들이 존재한다. 역사정의가 바로 세워지는 것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관점에 서서 진실을 대면하고 그 아픔을 보듬고 사죄하고 배상·보상하는 진지한 행위를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역사정의'에 대한 타협적 무마정책도 모자라 공세적 보복으로

그러나 일본은 패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역사정의에 대해서는 부도덕한 태도를 견지해왔다. 스스로가 미국 원폭투하의 피해자라는 식의 사고를 하면서, 정작 그들이 한국과 아시아 민중에 대해 자행한 전쟁과 식민지 시대의 가혹한 행위에 대해서는 가해자로서 책임 있는 의식을 전혀 드러내지 못해왔다.

이러한 그릇된 피해자 의식과 '자폐적인 군국주의적 민족의식'으로 인해서, 위안부 문제가 내포하고 있는 여성 억압의 문제, 전쟁 범죄의 문제, 민족적 억압의 문제 등에 대해 일본은 진정한 책임인정과 사죄, 배상을 하지 않고 부인으로 일관해 왔다.


그런데 여기에 강제동원 배상 판결과 그에 기초한 강제동원 피해자의 징용기업 압류조치가 더해지며 결국 무역보복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사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이후 일본은 역사정의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한일치유재단을 만드는 방식으로—그것을 타협적으로 무마하는 방식의 대응을 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세적'인 무역보복으로 대응했다.

산업화독재 시기에는 한일 권력집단 간 타협적 역사해석체제

이 차이는 무엇인가. 이는 역사적으로 조망할 때 비로소 이해가능하다. 주지하다시피, 1960-70년대는 '산업화' '경제개발'이라는 이름하에 독재가 횡행했던 시대였다. 산업화 독재 혹은 개발독재는 이러한 전쟁책임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정의를 바로세우는 문제를 한일의 외교관계 복원의 문제로 접근하거나 근대화 '자금 조달'의 문제로 접근했다.

그 바탕 위에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체결하고, 역사정의의 문제는 '역사에 묻고자 했다'. 이는 한일의 보수적인 주도집단들 간의 타협적 역사해석체제가 존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이 산업화 자금은 한국의 경제도약의 일정한 계기가 되었고 고도성장이라는 '결과'적 현상은 역사정의의 문제를 진정으로 역사에 묻는 듯 했다).

그러나 민주화시대와 함께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민주화 시대를 거치면서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들이 한일청구권협정의 정당성, 그것이 묻은 역사정의의 문제들을 지속적으로 제기하여 왔다.

한편에서는 역사정의의 문제를 역사에 묻어버리고자 했던 1965년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1965년 협정을 뛰어넘는 새로운 개별적 역사정의 투쟁, 즉 위안부 문제와 강제동원 문제 등을 보편적 인권의 관점과 더불어 국가 간 합의와는 구별되는 개인적 배상의 문제로 제기하고 쟁점화 하였다.

이처럼 한일청구권 협정의 '그늘' 아래서도, 그리고 그에 기초해서 이러한 주제들을 외면하는 한일정부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피해 당사자들과 한일 시민사회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산업화 독재의 프레임을 넘는 방식으로, 국내외적으로 단순 쟁점화를 넘어 보편적인 역사정의의 문제로 확산해 왔다.

이런 도전에 대해, 촛불시민혁명 이전 박근혜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타협적 해소의 전략을 취했고 강제동원 문제에 대해서는 사법부와의 거래를 통해 판결로서 이를 부정하고자 하는 전략을 취했다. 1965년 협정의 틀을 통해 모든 것을 부인하는 일본정부의 전략에 조응하여, 이를 그 틀 내에서 해결하고자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이라고 하는 것이 국가 간 국제협정이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려웠다. 단적인 예로 노무현 정부 하에서도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해 - 1975년 정부가 1차 보상을 했음- 7천억 원의 추가 보상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단지 2005년 8월 민관 공동위원회의 발표 속에는 "일본군 위안부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와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자는 한일 청구권 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문구가 들어가 전향적인 단초를 제공하였다.

촛불시민혁명, '역사정의'의 지평에도 큰 전환점 마련

이런 상황에 대전환이 일어난 것이 바로 촛불시민혁명이었다. 민주화시대의 전환점인 1987년으로부터 30년이 흐른 2016-2017년에 한국의 민중들은 촛불시민혁명으로 박근혜정부를 탄핵했지만, 그 탄핵과 교체과정은 단지 최순실 문제 등 정권의 부도덕성을 드러낸 것만이 아니라, 역사정의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과정이기도 했다.

촛불시민혁명은 정치혁명의 성격을 기본으로 하지만, 역사정의에 대한 큰 전환점이기도 했다. 즉 산업화 독재가 근대화의 계기로 활용했으며, 민주화 세대가 그 재정립을 위해 싸워왔던 역사정의의 문제를 새로운 지평으로 이동시킨 것이었다라고 나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촛불시민혁명 이후 사법농단이 쟁점화되고 대법원은 다시 한일청구권 협정이라고 하는 국가 간에 이루어진 협정임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시기 민중들의 피해에 대해 개인적 배상이 가능하다고 판시하게 이른 것이다. 대법원이 역사적 시기의 정부 간 타협적 협정을 뛰어넘어 보편인권의 관점에서 강제동원 배상판결을 내게 된 것이고, 이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아베식으로 해석하지 않아야 된다고 하는 새로운 역사정의적 판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외에도 1945년 '우키시마호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산업화 독재를 계승한 박근혜정부 하에서 한일청구권협정이 묻어 버렸던 강제동원 문제를 '사법농단'의 형태로 다시 역사에 묻고자 했다면, 촛불시민혁명은 새로운 역사정의의 지평을 동반함으로써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산업화 독재적 프레임을 넘는 새로운 판결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 판결은 1965년 협정이 상정한 한일 역사질서에도 균열을 내는 것이며, 더 나아가면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도- 당시 당면한 반공냉전전선의 확대 강화를 위해서 전쟁도발국이자 패전국인 일본에 관대하고 약소 식민지 민중들의 고통을 외면했던-균열을 내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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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비 빈자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인 14일 오후 서울 남산 서울시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옛 조선신궁터앞)에서 기림비 제막식이 열렸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전 세계에 처음 증언한 고 김학순 할머니(1924~1997)가 지켜보는 가운데, 서로 손을 잡고 있는 한국, 중국, 필리핀 세 나라 소녀들 사이에 빈자리가 하나 있다. 기림비를 만든 조각가 스티븐 와이트는 전 세계인들이 남은 자리를 채워 기림비를 완성해달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밝혔다. ⓒ 권우성


남산에 세워진 '다국적' 기림비가 상징하는 것

2017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세인트메리 광장에 한국, 중국, 필리핀 소녀상을 포함하는 '다국적' 위안부 기림비가- 이 기림비가 세워지면 샌프란시스코와 오사카의 자매 도시협정이 파기된다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세워진 것이 상징하듯이- 세워진 것은 위안부 문제가 한일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 인권의 문제, 나아가 역사정의의 문제로 세워지고 있음을 의미한 것이다.

지난 8월 14일 서울 남산에 두 번째 기림비가 샌프란시스코의 첫 번째 '다국적' 위안부 기림비를 재현하듯 세워진 것도 유사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확장된 역사정의의 문제는, 일본의 아베정부가 가지고 있는 자폐적인 군국주의적 민족의식과는 더욱 괴리가 커지게 됨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그 더 커진 괴리가 아베정부로 하여금 위기의식을 갖게 했고, 이는 이전에는 사용하지 않던 무역보복 카드를 꺼내들게 했다고 나는 분석한다.

아베를 부끄럽게 하는 섬세한 전략 필요

그렇다면 이러한 아베정부의 무역보복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에 대해 정부는 정부대로 민간은 민간대로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시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 성숙한 대응노력을 하고 있다. 이 노력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이 새로운 역사정의의 인식을 어떻게 확산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첫째는 아베정부를 제외한 일본의 많은 양심적 국민들과 시민사회, 나아가 중국 등 아시아 시민사회가 더 많이 공감하고 공유하게 하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일본을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아베를 부끄럽게 하는 섬세한 전략이 필요하다.

역사정의에 대한 한국의 인식변화가 일본 시민사회의 공감으로 이어진다고 할 때, 이러한 변화 위에서 아베정부 역시 미래지향적인 방향에서 스스로의 자폐적 역사인식을 변화시키면서 새로운 역사정의관에 기초한 동북아 평화공동체의 길로 나오기를 나는 소망하기까지 해 본다.

사실 인공지능을 말하고, 4차산업혁명을 말하는 21세기에 100년 전 자폐적 인식의 틀에 갇혀있다는 것은 일본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현재와 같이 동북아의 한・중・일이 다른 식의 민족주의의 길로 가면서 그것이 어떤 우연적인 정치군사적 충돌과 이어질 때, 새로운 동북아 갈등의 길로 갈 수도 있다. 노신(魯迅)과 신영복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곧 길이다'라는 자세로 모든 주체들이 변화하기를 소망해본다.

둘째는 이 높아진 역사정의의 인식을 어떻게 한국의 민주화 '이후' 세대들이 더 많이 공감하고 공유하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한일청구권 문제에 대한 비판, '위안부' 문제나 징용문제, 일본의 전쟁책임이나 식민지 지배 문제에 대한 사과 등 역사정의의 문제는 기성세대들 사이에서는 광범위한 공감대가 있다. 심지어 산업화 세대들 사이에서도 말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세대에게는 산업화 시대에 묻혀 졌다가 민주화 시대에 쟁점화된, 그리고 대법원 판결의 전환에까지 이른 현재에, 이러한 새로운 역사정의의 문제를 어떻게 자기화하고 새롭게 문화화 하도록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이를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적 기조에서도 접근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더욱 보편적인 문제로 접근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민족적 공감을 넘어, 역사정의에 대한 보편적 공감의 확대 관점이 필요하다. 강제동원이나 위안부 문제는 일제의 만행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반인도주의적 범죄이며, 이제는 전쟁 성폭력, 여성인권, 반인도주의적인 강제노동 등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도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남북문제는 통일의 문제로도 접근하지만, 평화의 문제이자 동북아 평화공동체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민족주의적 폐쇄성을 넘어 유연한 선도자로

바로 여기서 교육의 역할에 맞닥뜨리게 된다. 교육은 기성세대, 현재세대와 미래세대가 만나는 장이기 때문이다. 교육은 기성세대, 현재세대의 보편적 내용이 미래세대에게 전수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서울교육청에서는 사회현안 계기(토론)수업을 통해 민족적 쟁점일 뿐만 아니라 보편인권적 쟁점이자 역사정의의 쟁점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토론의 마당을 열고자 한다. 토론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판단하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며 동시에 미래세대에게 역사정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확산할 수 있는 '생각열림의 장(場)'이 될 것이다. 부디 미래세대들이 단순히 아베를 무시하고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그를 역사 앞에서 부끄럽게 만들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

마지막으로 나는 한국의 정부와 시민사회가 이렇게 놓아진 역사정의의 인식을 투철히 견지하되 그것을 근본주의적으로 관철하려 하기 보다는 동북아 각각의 나라가 갖고 있는 민족주의적 폐쇄성의 각기 다른 결을 섬세히 고려하면서 열린 선도자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사실 글로벌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각각의 국민경제가 겪는 '몸살' 때문에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 내에서 폐쇄적인 경제민족주의가 발호하고 있으며, 어찌 보면 개별 국가 내의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촛불시민혁명과 같이 민주주의가 한 단계 약진하고 그 속에서 역사정의에 대한 높은 인식의 단계로 나아가는 나라는 전 세계에 거의 대한민국 밖에 없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런 속에서 이상주의와 유연한 현실주의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학에 있을 때 '동아시아 평화연방'을 상상하면서 글을 썼던 적도 있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족주의적 폐쇄성의 섬세한 결을 고려하면서 우리가 또 다른 미래를 상상하고 견결히 그것을 향해 가되 '무찌른다는 자세가 아니라 부끄럽게 한다'는 자세로 미래를 향한 유연한 선도자가 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한다.

요즘처럼 전 세계적으로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한 시기도 많지는 않을 것 같다. 동북아에 한정하여 생각해보면, 중국은 '민족굴기(屈起)'의 자긍심에 기초한 신민족주의적 흐름이 존재하며, 일본은 평화헌법 개정 등을 포함하여 과거의 군국주의적 영광을 흠모하는 신우익적 민족주의의 흐름이 존재한다.

또 다른 민족주의 결을 가진 우리나라는 스스로의 '닫힌 민족주의' 즉 우리만의 자폐성을 성찰하면서, 성숙한 역사정의 의식와 보편인권의 가치와 함께 가는 '열린 민족주의'로 가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일본의 무역보복에 대한 시민들의 성숙한 대응 속에서 나는 이미 희망을 보고 있다.
덧붙이는 글 조희연 기자는 서울특별시 교육감입니다.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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