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죽음의 비밀 밝혀주세요'... 2주만에 모인 3000만원

[백범 서거 70주기] 암살 배후 규명을 위해 미국 NARA에 가다 (상)

등록 2019.08.19 11:04수정 2019.08.1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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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2019년 8월 12일 발행된 백범 서거 70주기 기념특집호 <백범회보> 통권 61호 상권에 실려있는 '백범은 겨레의 마음속에 뜨겁게 살아있다'를 상편, 하편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편집자말]

대한민국 임시정부 백범 김구 주석 만년의 모습. ⓒ 백범기념사업회

NARA 서고 안을 아키비스트 보이 랜이 안내하고 있다(왼쪽부터 보이 랜, 이도영, 권중희, 이선옥, 이재수. 2004. 2. 5.). ⓒ 박도

 
한 해외동포의 제보

2002년 7월, 당시 나는 쉰여덟 늦깎이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됐다. 뒤늦게 시민기자가 됐기에 보다 의미있는 기사를 쓰고 싶었다. 그래서 '의를 좇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연재를 만들었다. 그 첫 번째 인물로 박종철 열사 아버지 박정기 선생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자 해외에 거주한다는 한 독자가 나의 열렬한 팬이라면서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10여 년간 추적한 권중희 선생을 취재해 달라고 제보했다.

마침 나의 중국대륙 항일유적답사 때 동행·안내해 주신 이항증 선생(이상룡 임시정부 초대국무령 증손자)과 권중희 선생은 같은 안동 출신으로 평소 잘 아는 사이라 하여 그분의 주선으로 쉽게 연결이 됐다. 
 

서대문 독립공원(옛, 서대문형무소) 3.1 기념탑 앞에서(왼쪽부터 이항증, 권중희, 기자). ⓒ 박도

 
우리 세 사람은 2003년 10월 하순, 당시 내가 근무하던 학교(이대부고)에서 가까운 서대문 독립공원(옛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났다. 그런 뒤 안두희가 백범 선생을 시해한 현장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을 둘러보고, 효창원 백범 묘소에 참배했다.

그런 뒤 조용한 장소를 찾으려고 했으나 마땅치 않아 내 집으로 모셨다. 그날 저물도록 권중희 선생이 10여 년간 안두희를 추적한 이야기를 들었다. 마치 007 시리즈 영화를 보는 듯했다.

나는 아무래도 1~2회 기사로는 이 추적사를 다 담지 못할 것 같아 <오마이뉴스> 데스크에 최소한 5~6회 권중희 선생 이야기를 연재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당시 정운현 편집국장은 '아무리 좋은 인터뷰라도 2회를 넘기면 독자들이 식상해 한다'면서 2회로 줄여서 송고하라고 당부했다.

나는 잘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내 평생소원은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는 일"이라는 첫 회 기사를 송고했다.

그 기사가 실리자 하루 사이에 조회수 7000을 거뜬히 넘겼다. 그래서 나는 데스크의 압력을 묵살하고, 연재를 계속 이어갔다. 그런데 회를 거듭할수록 조회수도, 댓글도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그러자 데스크에서는 오히려 전담 편집기자를 배정하기도 했다.


마지막 회인 8회 "안두희 입에서 쏟아진 이승만 연루설"은 조회 수가 2만 건을 넘겼고, 모두 44개의 댓글이 달렸다.
 

늦은 밤임에도 워싱턴 덜레스공항입국장으로 환영 나온 재미동포들[2004. 1. 31. 이재수, 김만식, 서혁교, 이종국, 허용, 김경우, 심영주, 박기웅, 박권성 등이시다. 가운데 꽃다발을 든 이는 권중희 선생(흰 파카)과 기자다. 오랜 세월이 흘러 사진 순서대로 존함을 정확히 밝히지 못해 죄송한 마음 그지없다]. ⓒ 박도

 
'로또 복권'을 사보고 싶다

나는 권중희 선생에게 마무리 말씀을 부탁드렸다. 그러자 돈이 마련되면 영어를 잘 하는 사람과 동행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가서 1945년 해방 후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때까지 한국 관련문서를 모두 열람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 백범 암살배후에 관한 정보가 어딘가에서 나올 것으로, 그게 당신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그러자면 비행기삯과 체류비 등 2000만~3000만 원 정도의 돈이 필요했다. 기업인들이 정치인에게는 사과상자에다 현찰로 수십억 원씩 검은 돈을 갖다 바치지만, 권력이 없는 자신에게 단돈 10만 원이라도 주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로또 복권을 사고 싶어요."
"네?"


사실 나는 그 이전부터 학생들이 그런 걸 사면 대단히 꾸중을 했던 까칠한 구닥다리 교사였다. 그 기사가 나가자 여러 누리꾼이 많은 댓글을 달아줬다.

독야OO : "조금씩 모으면 3000만 원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박 기자님께서 주도하시면 가능 할 것도 같은데… 한번 심사숙고하시길..."
아줌마(ultra****) : "가슴이 저밉니다. 희망돼지처럼 성금을 모아 백범 암살배후를 밝혀야 합니다."
독립군 : "모아봅시다. 권중희 선생의 계좌를 올리고 모금활동을 한번 해보는 게 어떨까요."

 

NARA 2층 자료실에 마련된 ‘Kimkoo Research’ 팀 좌석. ⓒ 박도

 
백범 선생이 등을 두드려주신 듯
 

뜻밖에도 독자들은 '권중희 선생 미국 보내기 모금'을 제안했다. 나는 그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가 만일 목표액에 이르지 않았을 때 그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로 고민하다가 아내와 상의했다.

"이참에 당신 학교 그만두고 퇴직금으로 다녀오세요."

아내는 주저 없이 명쾌한 답을 줬다. 나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모금에 앞장섰다. 열기는 예상 밖으로 뜨거웠다. 모금 1주일 만에 1000만 원이 모였고, 2주 만에 애초 목표액 3000만 원을 거뜬히 달성했다(총 1000여 명 기부자에 4300만 원가량 모금). 
  

재미 워싱턴 D.C. 지역 동포 환영만찬회(2004. 2. 8.). ⓒ 박도

 
그해 연말까지 모금하려던 계획이 단 2주 만에 목표액을 초과했다. 다행히 독자들의 열화같은 성원으로 나는 조기퇴직을 하지 않아도 됐지만, 그해 학기 말에 사표를 냈다. 대부분 기부자는 이름을 밝혔지만 익명 기부자도 상당수 있었다.

그들은 '힘내십시오' '노동자' '부탁드립니다' '백범사랑' '소원성취' '진실은 반드시' '건강기원' '한국인의 혼' '반민특위 재개' '바로 서는 역사' '진실과 화해' '독립자금' 등 자신의 이름대신 격려의 문구를 적어 보냈다. 

"망설이다가 하루 일당을 보냅니다"라는 ID '촌부'의 성금에는 고개가 숙여지고 숙연해졌다. 그 순간 나는 마치 하늘에 계신 백범 선생이 등을 두드려주시면서 "자네가 내 한을 풀어주느라 애쓰네"라고 한 말씀하시는 듯했다.
 

NARA 2층 자료실에서 조사자 주태상씨가 발굴한 백범 장례식 날 운구행렬 사진. 현 신세계 백화점 앞을 지나고 있다(1949. 7. 5.). ⓒ NARA


(* 다음 기사 <미국이 '파기'한 김구 암살의 흔적들, 하지만>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백범 암살 사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는 2019년 8월 11일에 방영된 '연합뉴스TV 스페셜' 97회 <박기서, 김구를 말한다> 편을 봐주십시오.
#김구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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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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