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스타도 압도당한 슈베르트 가곡의 특별함

[사연있는 클래식] 최초의 프리랜서 작곡가 슈베르트의 음악 인생

등록 2019.08.24 20:52수정 2019.08.25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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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같은 맑은 물에 숭어가 뛰노네'로 시작되는 트윈폴리오가 부른 '숭어'는 슈베르트의 가곡인 '송어'의 번안곡이다. 그렇다면 노래 '숭어'에 나오는 이 물고기는 숭어일까, 송어일까. 정답은 송어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되듯 송어와 숭어는 점의 높낮이로 완전히 다른 종이 된다. 송어(trout)는 '연어과'로 산란 시기가 오면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는 소하성 어류고, 숭어는 바닷물고기이기 때문이다.


한 시간 만에 완성된 불후의 명곡

'숭어'를 작곡한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1797-1828)는 오스트리아 빈의 외곽 리히텐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어 슈베르트'와 어머니 '엘리자베트 피츠' 사이 16명의 아이 중 13번째로 태어났으나 유아 사망률이 높던 시기에 5명의 아이(2녀 3남)만 생존했고 그중 막내아들로 자랐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운영했는데, 당시 아버지가 운영하던 초등학교는 우리나라 옛날 서당처럼 집에서 잠도 자고 생활도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그런 개념의 학교였다.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 덕에 위의 두 형, 이그나츠와 페르디난트는 음악교육을 받았으며, 슈베르트도 아버지와 형들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다. 자연스레 어린 시절부터 가족 현악 4중주단이 형성되었고 떡잎부터 달랐던 슈베르트는 7살에 음악에 재능있는 어린이를 선발하는 오디션에 당당히 뽑혔다.

이 오디션의 음악 감독이 안토니오 살리에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 <아마데우스> 속 모차르트의 재능을 시기해서 그의 숙적으로 나오는 그 살리에리 말이다. 당시 살리에리는 궁정 악장이었다.

1808년, 그의 나이 11살에는 음악 영재 소년들을 위한 슈타트콘빅트(Stadtkonvikt, 황실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입학하는데, 이때 슈베르트는 빈 궁정 예배당 소년합창단의 일원이 된다. 이 합창단은 현존하는 빈 소년 합창단의 전신이며, 하이든도 이곳 출신이다.


슈베르트는 이곳에서 살리에리와 궁정 오르가니스트인 벤젤 루지츠카로부터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는다. 하지만 1812년 변성기가 찾아와 더는 합창단에 머물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학교는 중퇴했지만, 특별한 재능을 인정받아 여전히 살리에리의 제자로 그에게 작곡을 배웠다.

13세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5년 동안 무려 교향곡 두 곡, 가곡 140개를 썼다. 보통 그를 가곡의 왕이라 일컫는데, 가곡의 왕뿐 아니라 다작의 왕이다. 곡을 얼마나 빨리 쓰는지 그 유명한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 '마왕'은 시를 보자마자 한 시간 만에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도 그가 18살에.

또 '들어라, 들어라, 종달새'라는 곡은 술집에서 이 시를 읽자마자 메뉴판 뒷장에 오선지를 그리고 그 자리에서 곡을 썼으며, 제대로 느낌 받은 어떤 날에는 하루에 열 곡을 만들었다니 알파고도 울고 갈 일이다. 그것도 습작이 아닌 '불후의 명곡'들로 말이다.

1814부터 그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보조교사로 일했다. 태생부터 자유로운 영혼인 슈베르트에게 한정된 공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맞지 않았다. 당장 좋은 시들을 읽고 영감을 받아 곡을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인데 그러질 못하니 숨이 턱까지 막혔다. 그러다 1816년, 라이바흐(지금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교원 양성기관에 음악감독 자리에 지원하는데, 이때 살리에리가 추천서를 써 주지만 안타깝게 탈락하고 만다.

그해 가을, 슈베르트는 돌연 학교를 그만두고 집을 나와 떠돌이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이때부터 오로지 '곡만 만들어서 먹고사는' 최초의 프리랜서 작곡가가 되었다(슈베르트 이전의 모짜르트나 베토벤같은 작곡가들은 작곡 이외에도 귀족들의 후원을 받거나, 공개 연주회, 개인 교습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밑천 한 푼 없이 시작된 프리랜서 작곡가의 길은 험난했다. 평생 천 곡이 넘는 곡을 작곡하면서 그는 피아노 한 대도 없이 오로지 책상에 앉아 곡을 썼다. 그가 죽기 일 년 전에야 피아노를 샀다고 하니… 그동안 그가 가진 건 낡은 기타 한 대였다. 하지만 그는, 그의 이런 처지에 대해 신세 한탄하지 않고 외려 이렇게 말한다.

"기타는 무릎 위에 올려진 교향악단이다."

슈베르트의 친구인 작곡가 휘텐브레너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그리고 난방도 없는 작은 방에서 낡고 해진 잠옷을 걸치고 떨면서 작곡을 하고 있었다."

다행인 건, 친구 없이 외골수인 다른 많은 음악가와 달리 슈베르트는 기숙사 생활을 할 때부터 항상 친구들 사이에 둘러 쌓여있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이다. 슈베르티아데는 '슈베르트의 밤'이란 뜻으로 슈베르트를 중심으로 그의 음악을 좋아하고 후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 그룹은 동년배에서부터 한참 나이가 많은 사람들로 범위가 넓었으며 음악가, 화가, 문필가, 법률가, 철학가, 귀족 등 서로 관련 없는 사람들이 오로지 슈베르트 곡을 좋아하는 것 하나로 뭉쳐 그의 곡을 알리고 후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 친교 모임이다.

반주에 스토리를 입힌 슈베르트의 가곡
 

슈베르티아데(율리우스 슈미트, 위키미디어 커머스,1897) ⓒ 위키미디어 커머스

  
이 그림은 율리우스 슈미트가 그린 슈베르티아데의 모습이다. 슈베르트는 1828년에 눈을 감았고 슈미트는 1854년에 태어났으니, 이 그림은 화가가 그 장면을 상상하며 그린 작품이다. 물론 피아노 앞에 앉아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슈베르트이다.

이 모임의 일원인 휘텐브루너와 몇몇 친구들이 슈베르트가 작곡한 마왕을 괴테에게 보냈다. 일단 곡에 자신이 있었고 괴테의 명성을 이용해 슈베르트를 알리고 싶은 계획이었지만, 당시 괴테의 흥미를 끌지 못한 건지, 아니면 괴테의 음악 자문인 젤터(Zelter)가 곡을 전달하지 않은 건지, 어쨌든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슈베르트가 죽고 나서야 괴테는 이 곡을 듣게 되었고, 듣고 나서 매우 감탄했다.

슈베르트는 계속해서 슈베르티아데를 통해 신곡을 발표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명곡들이 탄생했지만, 세상에 알릴 방도가 없던 차에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바리톤 가수 미하엘 포글을 섭외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쉰 살이었던 포글은 재능 있는 작곡가라고 주변에서 소개해 여기저기 다니며 수없이 만나 봤지만, 번번이 실망했던 터라 슈베르트도 별 기대 없이 만났다.

21살의 슈베르트는 덩치가 큰 이 거장 앞에서 기가 죽었다. 하지만 꿈에라도 한번 만나고 싶었던 대스타를 앞에 두고 평생 다시 올지도 모를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해 반주를 시작했다. 그의 반주에 맞춰 포글은 몇 곡의 노래를 부르더니 몇 마디 상투적인 칭찬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사실 포글은 슈베르트의 곡에 압도당했다. 우물쭈물 사라진 건 아마도 그 앞에서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미하일 포글과 슈베르트(모리츠 폰 슈빈트,1825) ⓒ 위키페디아

  
포글은 이후 적극적으로 모임에 참여했고 슈베르트의 열성 지지자가 되어 그의 곡을 알리는 데 누구보다도 앞장선다. 슈베르트와 포글은 오스트리아 전역을 돌면서 순회공연을 했고 덕분에 그의 이름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잠깐, 포글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슈베르트의 가곡은 도대체 뭐가 그리 특별한가?

슈베르트 이전의 가곡들은 유명한 '시'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피아노 반주는 그 시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수단이었다. 잔잔히 코드 몇 개로 곡을 따라가는 형식으로 말이다. 문학을 위한 음악이었다고 할까? 하지만 슈베르트는 반주에 스토리를 입혔다.

예를 들면 마왕의 경우, 말이 긴박하게 달리는 장면을 피아노가 묘사하고 있다. 듣고 있으면 나도 덩달아 마음이 급해져 당장 일어나 어디론가 뛰어가야 할 것 같은 감정에 사로잡힌다. 독일어를 몰라서 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곡만 들어도 뭔가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이는 때때로 연주자들에게 대단한 솜씨를 요하는 것으로, 연주자로선 곤혹스러운 일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슈베르트는 일반적인 가곡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렸으며, 이것이 단순히 가곡을 많이 써서가 아닌 그가 진정 가곡의 왕인 이유다. 이에 대해 슈베르트는 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이 작곡과 연주를 통해 가수와 연주자의 혼연일체를 요구하는 새로운 예술형식을 만들어 냈다고 썼다.

슈베르트는 생전에 633개의 가곡을 만들었으며 이 중 70여 개가 괴테의 시로 만들어졌고 이외에도 실러, 하이네, 셰익스피어, 단테 등 많은 문필가의 시를 이용해 곡을 만들었다.

슈베르트와 포글은 공연을 위해 포글의 고향인 슈타이어에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질베스터 파움가르트너(Silvester Paumgartner)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광산업자이자 아마추어 첼리스트였다. 그는 슈베르트의 가곡 송어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그가 슈베르트에게 송어를 변주한 연주곡을 부탁했고, 그로 인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명곡 '피아노 5중주 A장조'가 탄생했다.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참고서적
프란츠 슈베르트(한스-요아힘 힌리히센, 홍은정 옮김, 프란츠)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이언 보스트리지, 장호연 옮김, 바다 출판사)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금난새, 생각의 나무)
음악가와 친구들(이덕희, 가람기획)
더 클래식(문학수, 돌베개)
덧붙이는 글 이글은 인천 투데이와 개인 브런치에 실립니다.
#프리랜서는 고달퍼 #피아노없는 작곡가 #시만보면 악상이 떠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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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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