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진보주의자' 조국에게 원했던 것은

[주장] 메시지와 삶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진보'

등록 2019.08.21 13:49수정 2019.08.21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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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31일 당시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이 국회 운영위에 출석해 업무보고 하고 있다. ⓒ 남소연

 
올해 '젊은작가상 작품집'에 실린 이미상의 단편 <하긴>은 과거 학생운동을 했던 586 부부의 비뚤어진 교육열을 소재로 삼았다. 언론사 기자로서 지금은 기명 칼럼을 쓰고 있는 화자인 '나'와 번듯한 외국계 인권단체에서 일하는 '아내'가 딸 '김보미나래'의 스펙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딸이 공부를 못하자 '나'는 자신보다 학벌이 낮은 아내의 지능을 의심하며, 최연소로 등단한 친구 딸의 SNS에 매일 들어가며 부러움을 느끼는 존재다. 그런 '나'는 딸을 대학 보내기 위해 친구에게 컨설팅을 받고, 딸을 자퇴시켜 대안학교에 보내는 결정을 한다. 심지어 포트폴리오를 위해 1년 동안 미국 에코 공동체에 살게 하는데, 여기서 발생하는 사건과 이로 인한 부부의 고뇌가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웹진 '비유'는 이 소설을 실으면서 '#586세대' '#본격학종시대소설'이라는 해시태그를 달았다.

이 소설은 좀 짓궂다. 사회적 지위를 갖춘 중산층인 '나'는 교육을 통해 딸에게 자신이 가진 유·무형의 자산을 물려주고 싶은 욕망에 안달이 난다. 그래서 학원을 운영하는 친구의 컨설팅을 받으며 살짝 '뺨을 맞는' 굴욕까지 견딘다. 하지만 돈과 정보력으로 딸의 스펙을 만들려는 우스꽝스러운 '나'의 운명이 순탄할 리 없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소설과 현실은 다르다. 현실의 '나' 같은 사람 자식들에겐 탄탄대로가 열려있다. 오로지 '수시'와 '정시'밖에 몰랐던 평범한 이들에게는 별천지와도 같은 '기회'가 사회·경제적 상류층 혹은 권력자의 자녀들에게 주어진다. 억울하지만 대부분은 그런 현실을 받아들였다. '돈 있는 사람이 돈 쓰겠다는데 어떡하겠냐'면서. 

그럼에도 정치권 586 자녀들의 사실상 '특권 교육'이 드러날 때 사람들의 시선은 차갑다. 이들의 권력을 지탱하는 것은 평등하고 공정한 세상을 향한 시민들의 열망이기 때문이다. 혁신 세력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기존의 기득권과 동일한 행동을 한 것이 드러나면 실망감은 배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여론을 등에 업고 보수언론이 '이중성' 프레임으로 공격하면 당사자는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권력을 잡은 이상 감내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경우는 자녀를 특목고를 보내서 논란이 된 진보교육감 사례보다 비난 여론이 훨씬 크다. 그의 딸이 '특권'을 누렸던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외고 재학 중 의학 논문을 쓰고 1저자에 등극한 것(입학사정관제 전형에서 일종의 스펙으로 작용했다는 의혹)이나 의학전문대학원에서 두 학기 낙제 기록이 있는 등 성적이 저조했음에도, 지도교수가 만든 장학회에서 6학기 내내 (2016~2018) 장학금을 받았다는 사실은 놀랍다.

운동장이 다르다

서울에서 가장 땅값 낮은 곳 가운데 하나인 금천구에 살았던 나는, 친구들이 어떻게 입시를 망쳤는지 잘 기억하고 있다. 외국 유학은 물론, 고등학생이 논문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다들 EBS 강의를 보거나 작은 동네 학원에 다니며, '열심히 하면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공부했다.

학교 교사들은 입시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부모들은 대부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비싼 과외 선생이나 대형 입시학원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여러 조건을 볼 때 수시로 무조건 대학에 가야 하는 아이들이 무모하게 정시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고, 결과는 좋지 못했다. 문과에 속한 남학생 100명 중 그해 입시에서 서울 소재 대학에 들어간 것은 5명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이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만 일어나진 않았을 터. 나와 함께 입시를 치르던 친구들, 특히 당시 실패를 맛봤던 친구들은 조 후보자 딸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조금 무섭기도 하다. 화내지도 않고, 체념하고 냉소할 것 같아서.

이것은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니다. 애초에 운동장이 다르다. '유학-특목고-논문-입학사정관제-의전원-장학금'. 99.9%의 사람들은 조 후보자의 딸이 서 있는 운동장에 들어갈 수 없다. 조 후보자가 딸의 진학 과정에 관여 안 했어도, 불법이나 탈법이 없더라도 문제 삼을만한 내용이다. '아버지가 서울대 법대 교수'라는 지위에서 오는 특권을 갖고 살아왔다는 의혹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예서 엄마'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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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내정된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서울 종로구 인사청문회 준비단이 마련된 사무실 로비에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 이희훈

 
조 후보자가 '진보주의자'라면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 누리고 있는 권리와 기회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능력으로 따낸 것이 아닌  '부당 이익'이라고 느낄 때는 내려놓을 수도 있어야 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기득권에 안주해버리는 이에게 어떻게 '개혁'의 칼을 맡길 수 있겠는가.

"청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용기와 패기입니다. 비록 몸뚱이 하나 밖에 가진 것이 없고, 배운 것이 적다 하더라도 기죽지 마십시오. 용기와 패기만 있다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 조국, 2011년 2월 6일 평화방송 라디오 '열정으로 두드림'

"중요한 것은 용이 되어 구름 위로 날아오르지 않아도, 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하늘의 구름 쳐다보며 출혈경쟁 하지 말고 예쁘고 따뜻한 개천 만드는 데 힘을 쏟자!" - 조국, 2012년 3월 2일 트위터 


메시지와 삶이 불일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불일치를 조금이라도 보정하려는 모습이 우리가 '진보'에게 원했던 것 아닌가. 지금도 나는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솔직하게 인정했으면 좋겠다. 특권을 누리며 살았노라고, 자신이 누리고 있는 부와 권력에 대해 성찰할 기회가 적었다고, 딸의 남다른 스펙을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은 자신의 불찰이라고.

여전히 나는 조 후보자가 사법개혁의 적임자라 믿는다. 그가 진심으로 '진보주의자'의 모습을 보이며 정면 돌파해 나갔으면 좋겠다. 국민들에게 미안함을 표한 뒤에 장관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고 말하고, 만약 사퇴하더라도 멋있게 물러났으면 한다.  

올해 인기리에 방송된 JTBC 드라마 <스카이캐슬>은 후반부에 황당한 권선징악적 전개로 비난 받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하나의 교훈을 주는 것 같다.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예서 엄마(염정아 분)는 솔직하고 정의로운 태도를 취하며, 자신과 딸을 보호할 수 있었다. 부디 조 후보자가 <하긴>의 '나'보다는 <스카이캐슬>의 '예서엄마'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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