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DJ가 왜 여기서? 추락한 '명문고'의 황당 1인 시위

시험 문제 유출 적발 광주 K고... '낯부끄러운' 현수막 이어 민망한 시위

등록 2019.08.23 08:23수정 2019.08.23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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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고등학교 학부모로 보이는 한 남성이 광주광역시교육청에 앞에서 맥락조차 이해할 수 없는 피켓을 든 채 시험 문제 유출 의혹과 관련 시교육청의 특별 감사를 문제 삼고 있다. ⓒ 서부원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다. 시험 문제 유출 사건으로 시교육청으로부터 특별 감사를 받았고, 검찰 수사를 앞두고 있는 광주 K고등학교의 반발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지난 19일 학교 건물 벽에 낯부끄러운 내용의 초대형 현수막을 내걸어 여론의 질타를 받았는데도 굴하지 않고 끝장을 보겠다는 심산인 듯하다.

[관련기사] 해괴한 현수막으로 도배... 문제적 고등학교의 '도발' http://omn.kr/1ki62

급기야 22일 아침, 한 남성이 시교육청 정문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K고등학교의 학부모로 짐작되는데, 피켓이 워낙 커서 구체적인 신원을 확인할 수는 없다. 아무튼 피켓에 적힌 내용으로 보아 시교육청과 전면전을 벌이겠다는 결기가 느껴진다.

그가 든 피켓은 여느 것과는 달리 글귀보다 사진이 먼저 눈에 띈다. 맨 위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진을 나란히 걸었다. 시교육청의 특별 감사가 대체 두 사람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두 사진 아래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몽니'를 부린 10월 유신으로 국민이 죽었고, 장휘국 광주광역시교육감의 '몽니'로 K고등학교가 죽어간다는 내용을 담았다. 시험 문제 유출 사건으로 인한 시교육청의 특별 감사가 10월 유신에 비유된 것이다. 일개 시교육감이 전 대통령의 '반열'로 격상이 된 셈이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전공한 교사로서, 곰곰 생각해봐도 둘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언뜻 망국적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불순한 의도마저 읽힌다. 생뚱맞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진을 올려놓은 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적으로 온갖 핍박과 고난을 당한 그가 K고등학교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걸 말하려는 듯하다.

K고등학교가 자리한 광주는, 주지하다시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며,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에 대한 향수가 여전히 강한 곳이다. 반대로, 유신 정권이 자행한 수많은 조작 사건과 반민주주의 폭정에 대한 반감이 크다.

압권은 지난해 6월 13일 치러진 지방 선거의 결과마저 불복하겠다는 듯한 내용까지 실었다는 점이다. 당시 18시 40분에 발표된 KBS의 출구 조사 결과가 실제 개표 결과와 달랐다면서, 개표 과정에서 조작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자칫 현 시교육감이 부정 선거로 당선되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1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별 문제 제기를 하지 않다가 뜬금없이 지방 선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분명하다. 특별 감사를 벌인 시교육청을 어떻게든 흠집을 내보려는 것이다. 나아가 특별 감사가 시교육청과 K고등학교 사이의 이전투구로 비치게 해 당면한 검찰 수사의 예봉을 꺾고 여론의 피로감을 높여보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K고등학교의 일련의 행태, 도저히 납득 불가 

시교육청의 특별 감사 결과 발표 이후, K고등학교가 보여준 일련의 행태는 같은 교사로서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시교육청과 빗발치는 여론에 맞서기보다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성찰의 계기로 삼을 줄 알았다. 읽기조차 민망한 궁색한 변명 일색의 현수막을 내걸기보다 차라리 상투적이나마 다음과 같은 반성과 다짐의 글을 시민들 앞에 내놓을 거라 기대했다.

'성적 지상주의라는 오랜 관행에 젖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편법과 불법을 자행한 점에 대해 학부모와 학생, 그리고 광주시민 여러분께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이번 일을 성찰의 기회로 삼아 본교 재학생들이 민주시민으로 올곧게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며칠 전 현수막의 내용을 질타하는 기사를 쓴 후, 근무하는 교무실의 전화가 온종일 불이 났다. 기사에서 같은 지역에 근무하는 교사라고 밝힌 데다 이름까지 실명으로 공개된 터이니, 어느 학교인지 알아내는 건 누워서 떡 먹기였을 것이다. 학교장과 교감은 물론, 교무실무사 선생님까지 전화 응대를 하느라 업무를 못 볼 정도였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아침부터 퇴근할 무렵까지 수업이 없는 시간이면 거의 수화기를 붙잡고 있어야 했다. 항의 내용이 거의 똑같다 보니 답변도 한결같아, 마치 텔레마케터가 된 기분이었다. 이름 뒤에 선생님이라는 호칭도 붙이지 않을 만큼 분풀이하듯 화를 쏟아내는 경우가 태반이었고, 일부는 당장 고소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이들도 있었다.

기사 내용 중 어떤 것이 사실과 다르냐고 부러 여쭤보면, 횡설수설하며 맥락조차 이해되지 않는 답변이 되돌아왔다. 정확히 '시험 문제 유출'인데 기사에선 '시험지 유출'로 적었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대는가 하면, 검찰 수사가 예정된 사안인데 마치 범죄 사실이 확정된 것처럼 쓰고 있다며 문제 삼기도 했다. 말장난처럼 느껴져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오랜 시간 일일이 응대하기가 귀찮아 그냥 경찰에 고소하시라면서 전화를 끊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무 일이 없다. K고등학교의 고3 학부모라는 한 분은 자기가 누군지 아느냐면서 일개 교사 정도는 당장 옷 벗게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기도 했다. 물론, 그런 분들과는 대개 합리적인 대화나 토론이 불가능하다.

학부모들은 다짜고짜 "당신의 글 때문에 우리 아이가 피해를 입게 됐다"고 항의의 포문을 연다. 시나브로 여론이 잠잠해지고 있는데, 왜 다시 들쑤시느냐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일이 터질 때마다 냄비처럼 끓어올랐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믿으며 버텨보겠다는 뜻이다.

명문대 진학에 보탬이 되면 '선', 해가 되면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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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지 유출 사건에 대한 시교육청의 특별 감사 발표 직후, 해당 학교에서 대응책으로 현수막을 내걸었다. 이를 본 시민들은 하나같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 서부원

 
기실 K고등학교만의 문제는 아닐 테지만, 학부모들은 학교교육이 어떻게 이뤄지고 교육과정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별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녀의 명문대 진학에 보탬이 되면 '선'이고, 해가 되면 '악'일 뿐이다. 입시 명문이라는 평판 탓에 K고등학교에 두 자녀가 배정 받았다는 이유로 동네 주민들에게 한턱 냈다는 학부모들이 주변엔 적지 않다.

학교가 수업시간 내내 문제집만 풀게 해도, 소풍과 체육대회, 진로활동 등 전인적 성장을 돕는 비교과활동에 소홀해도 전혀 문제를 삼지 않는다. 성적으로 줄 세워 반을 편성하고, 과목 선택권마저 배제되어도 자녀가 공부를 못한 탓이라며 자책하고 넘어간다. 심지어 시험 문제 유출 의혹이 제기되고, 채점 과정에 부정이 저질러져도 학부모들이 관대할 수 있는 이유다.

지금 K고등학교가 편법과 불법의 온상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데는 학부모들의 책임이 결코 작지 않다. 흔히들 자녀가 '볼모'인 상태에서 학교에 그 어떤 문제 제기도 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조차도 비겁한 변명일 뿐이다. 21년차 교사의 경험으로 단언하건대, 학생이 요구하지 않으면 수업이 변하지 않고, 학부모가 나서지 않으면 학교는 결코 꿈쩍이지 않는다.

시교육청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인 분께 간곡히 요청한다. K고등학교의 교육과 자녀의 미래를 진정 걱정한다면, 부디 어처구니없는 내용의 피켓 대신 교사와 함께 교육의 본령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 그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목요일 퇴근길, K고등학교의 건물 벽에 여전히 내걸려있는 황당한 현수막과 시교육청에서 벌이는 어처구니없는 1인 시위 소식을 전해 들으며 문득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경구가 떠오른다. 내친김에 스마트폰 첫 화면에 올려놓았다. 방금 전화에 대고 언성을 높여 욕지거리를 쏟아낸 한 학부모에게 눈 질끈 감고 들려줄 걸 그랬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눈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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